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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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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윤은철 목사 |
참고 : | 갈릴리교회 |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라
요 6:5-14
오병이어의 기적은 현대 과학으로 아무리 설명을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기적입니다. 어떻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대략 이 만 명이나 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일이 역사상 우리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고래 중에 가장 큰 고래가 혹등 고래라고 합니다. 이 고래는 인간의 500배의 몸집을 가지고 있는데 한 마리의 혹등 고래가 하루 먹어야 하는 새우의 양이 2.5톤입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이 혹등 고래가 먹어야 하는데 누가 먹이시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 고래 떼를 배부르게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요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들을 보라. 새들은 씨앗을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곡물창고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들이 새들보다 더 귀하지 아니하냐?”(마6:25~26)
오늘 우리들은 수많은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을 충분히 먹이시고 부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기적을 체험하기 전에 시험이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5절과 6절 말씀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요6:5-6)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시험과 연단의 순간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그 사람에게 기적을 베풀어 주실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해서는 그 사람이 참된 기적의 의미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적은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의 문명의 혜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구태여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병에 걸리면 현대적으로 잘 시설된 병원으로 찾아갑니다. 감기 몸살이 걸리면 효능이 입증된 약을 먹고 고치면 됩니다. 구태여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며 사는 것이 구차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날의 인간들이 회개할 수가 없는 까닭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회개라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회개란 인간적으로 살았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회개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은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말씀을 믿고 있지만 우리들의 삶의 모습은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이 여러분들을 진정으로 여러분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게끔 하셨습니까? 이것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민입니다. 분명히 성경의 지식을 알고 믿고 있지만 우리들의 삶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고 믿고 있지만 변화가 없는 것일까요? 이것으로 인해 여러분들은 깊이 고민한 적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빌립은 전형적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한 것은 “빌립 네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라는 말은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을 제자들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그들을 돌보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서 먹일지라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입니다. 누구라도 이렇게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은 현실주의자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환경을 보면서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성으로 분석하고 계산하고 따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실주의자인 사람들을 항상 시험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사십년을 삶을 살아간 것은 그들이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머리로 따지지 말고 마음으로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인간의 최선의 헌신이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9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9)
빌립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분석하고 따지는 삶을 취했지만 안드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미약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어린이의 도시락 하나를 구해 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었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힘으로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어린 아이의 도시락 하나를 들고 옴으로 인해 그것을 기본으로 해서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들의 최선의 헌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다고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면 전혀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기독교인들의 기본 진리가 나옵니다.
먼저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더 이상 죄에 종노릇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은 이제 죄와는 상관이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들은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이 자신 안에 살아계신 것으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산 자로 여길 때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기적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일어난 실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천 년 전에 그것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구원이면 구원, 질병이면 질병, 가난이면 가난, 저주이면 저주 등 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이미 처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금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앞으로 돌아가실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이천 년 전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 분을 통한 하나님의 기적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정말로 그 기적을 믿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방식으로 우리들을 지금 바꾸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순간을 위해 평생을 준비한다” 한 순간을 위해 평생을 준비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오랜 세월을 믿음으로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남들처럼 오늘 현실에 나타난 대로 보이는 대로 살아간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반드시 믿음을 통해 역사하실 것을 믿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사는 방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갈렙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0~12)
오늘 현실을 보이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이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습관과 태도 이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오늘 하루를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런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몸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매일 매일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기적은 주님이, 나눠주는 것은 믿는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을 다같이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요6:11)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헌신을 통해 가져 온 아이의 도시락을 가지고 기도하셨을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고기와 보리떡이 예수님의 손에서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빵과 물고기가 가득찬 광주리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나눠 주었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너무나 즐거웠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달라고 하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빵과 물고기를 만들어 내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나누어 주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적은 예수님이 일으키시고 이 능력을 우리들이 Delivery 하는 것이 진정한 기적이고 바른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우리들이 나눠주는 것 뿐이니 우리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능력을 일으키신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남을 도와주고 일으켜 주고 내가 받은 축복을 나눠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이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남으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보통 그냥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바로 하나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남을 사랑하되 조건 없이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그 어떤 사람이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분 뿐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런 아가페의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할 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을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8)
예수님께서 착한 일을 행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착한 일이란 단순히 남을 도와 주셨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기적을 행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삶 속에 기적을 베푸신 성령의 역사가 바로 착한 일입니다.
이 ‘착한 일’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행4:9) 이 말씀은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던 날 때부터 일어나지 못한 사람을 일으킨 것을 제사장들 앞에 가서 변론하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일생을 한 번도 일어나지 못한 자가 일어난 것을 ‘착한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10)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이 모든 착한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하는 선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정말 성령으로 살아야 하겠구나’라는 결심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바이올린을 시작했으면 훌륭한 연주가가 될 때까지 피 눈물 나는 연습을 거듭해야 합니다. 화가가 되려는 사람들은 오직 그림을 그리는 데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축구선수의 길에 들어선 사람은 체력을 단련하고 끊임없이 공을 차는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작가가 되기를 원하는 문학청년들은 손가락 하나로 바위를 긁어내서 구멍을 뚫는 각오로 심혈을 기울여 열심히 글을 쓰는 땀 흘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꿈을 키워가는 사람들이 언젠가 훌륭한 연주가로, 미술가로, 운동선수로, 큰 작가로, 위대한 인물로 세상 한 가운데에 우뚝 서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신앙도 예외는 아닙니다. 마음에 안 들고 조금 힘들다고 신앙생활을 버리고 다시 세상에 몸을 던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국은 고사하고 악한 영들에게 사로 잡혀서 타락을 거듭하고 죄를 짓다가 그 영혼과 인생이 영원히 파멸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줄기차게 묵상하고 기도하며 복음적인 삶을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는 자들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귀한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길만이 우리들이 진정으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이 너무 만족하다고 해서, 또는 너무 힘든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편법을 써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광을 볼 때까지 그 주님의 능력과 기적을 볼 때까지, 성령님의 선한 일이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달려 갈 길을 달려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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