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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7: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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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0.9.5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요17:20-24
어린 아기를 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디서 요런 것이 나왔노?”하는 생각일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오묘하게 여겨지지요.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저런 사람이 나왔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성서를 통해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살 중의 살이라”고 하고,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하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존재의 근원을 묻는 말입니다. ‘도대체 당신 같이 사랑스런 존재가 어디서 나왔을까? 당신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인자들이 이 세상 어느 다른 곳에서 왔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는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고, 당신이야 말로 나의 몸의 몸이요, 내 뼈의 뼈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유래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최대의 사랑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지독히 미운 사람, 증오의 대상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로 “어디서 저런 인간이 생겨났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아마도 우리의 평상심을 벗어나 사랑이나 미움이 평균율을 넘어설 때, “어디서부터”라는 물음을 갖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기의 얼굴을 보는 부모는 이것이 부모에게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나는 인형도 하나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이런 정교하고 오묘한 녀석이 나온 것을 보면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아마 하나님의 솜씨, 선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첫째, 나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왔는가? 어느 가문의 외아들 혹은 무남독녀로 왔는가? 인간의 뿌리는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부터인가?
요한 1:13은 말합니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 유교는 내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왔고 내 정신은 스승님으로부터 왔다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고백합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왔다고 하고, 또 예수 자신은 “나는 하늘로부터 왔다. 나는 아버지(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 명백히 선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기독론임을 다음 구절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6:37-38/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뜻을 이루려고 해서가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이다.
요8:42/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세상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16:28/나는 아버지에게서 떠나서 세상에 왔다. 나는 세상을 두고 아버지께로 간다
요7:29/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러한 고백은 그분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도 되지만 그 이야기의 초점은 바로 우리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밝히는 말입니다. 예수에 관한 기록은 그분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보고 감상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말은 오늘 우리의 뿌리가 하늘에 닿아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고 그냥 우연히 이 땅에 던져진 존재가 아닌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왔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들이며 또한 하늘을 향해서 가고 하나님을 향해서 가는 여정의 존재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언제부터 있는 존재인가?
한때 유행처럼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서점가를 강타하고, 텔레비전에서는 연예인들의 전생 체험 방영하는 등 떠들썩하게 전생에 대한 화제가 유행했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여기 지금 나타난 것으로 전부다라는 것은 참 천박한 사상, 허무한 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내가 있기 전 나는 본래 조선시대 선비였고,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이었다.’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자신의 자아가 넓어집니까? 인류 역사의 광범위하게 열린 창이 내게로 모아집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성서는 자기 존재의 뿌리를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바울은 “나를 모태로부터 구별하여 세우셨다”(갈 1,15)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성장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내 마음에 예수를 알고 은혜 받게 된 그 순간부터 하나님과 관계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장성한 후가 아니고 ‘처음부터,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구별해서 세우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더 거슬러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함으로 유대인들의 분노를 사고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습니다(8,58-59). 새파란 젊은이가 자신이 아브라함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 그 배짱은 무엇입니까? 뿐만이 아니고 자신은 천지 창조이전에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태초부터 유래된 사람이라는 주장의 맹랑함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런 주장이 예수님 자신 만의 주장은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자기 존재에 대해 깊이 사고하는 선조들도 이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잠언 8:22이하에 보면 지혜의 선재에 대한 본문이 나옵니다.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
주께서 모든 것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주께서는 나를 데리고 계셨다
영원 전, 아득한 그 옛날
땅도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세움을 받았다.
아직 깊은 바다가 생기기도 전에
물이 가득한 샘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다
아직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낫다
…… 나는 그 분의 곁에 창조의 명공이 되어
날마다 그분을 즐겁게 하여 드리고
나 또한 그분 앞에서 늘 기뻐하였다
그분이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그 분이 지으신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31절).
또 집회서 24:9에 “그는 나를 영원 전 태초에 창조했다.”고 하고 오늘 본문인 요한 17:24에도 “그는 나를 창세 전에 사랑했다”고 합니다. 경외서인 모세의 승천 1:14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를 택하시고 발견하시어 세계 창조 때부터 나를 그의 계약의 중보자로 예비하셨다”
이것은 나의 존재의 기반을 고구려나 인도의 어느 인물로 보는 전생의 구도보다 얼마나 심오하고 철저합니까? 이것을 요즈음 과학적인 사고로 받아들여 인간을 구성하는 철분, 나트륨, 칼슘, 탄소 …… 이런 분자나 원자들이 태초부터 있었고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통해서 이런 원소들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을 분해해서 철분, 칼슘 얼마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 속에 있습니까? 그게 ‘나’라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지요! ‘나’라는 인격 자체, 나의 외형을 하고 나의 성품을 가지고, 나의 인격을 구성하는 나의 온전한 존재 전체를 가리켜야합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적 가치도 나를 인수분해 해서 따지지 않아야 합니다. 내 좋은 점만 말하는 것도 아니요, 나의 자랑하고 훌륭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자란 그대로의 가능성의 인간이요, 넘치는 그대로의 가능성의 인간으로서의 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으로부터 까마득한 태초 이전부터 나를 예비하셨고 당신의 동반자로 삼으셨고, 오늘 이 시간 ‘나’라는 형상을 하고 한반도에 나타나도록 태초 이전 우주에 프로그램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창조이전부터라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은 유사품이 없는 존재이고 복사판이 없는 존재입니다. 모두가 독특하게 서로 다른 유일무이한 존재로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창조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 뿐인 독특한 존재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럿 중에 하나 김씨 중 하나, 대한민국 사람 중 하나, 여러 목사 중 하나, 안경 낀 사람 중 하나로 우리를 보내 신 것이 아니고 나 아니면 안 되는 고유한 임무를 주어 단 하나의 사람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파송이고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도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게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17:20-21)라고 합니다.
23절/이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24절/창세전부터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주신 내 영광을 , 그들도 보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는 예수로 말미암아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분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일치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고 완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 곧 완전한 일치는 종말의 목표요 목적입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를 말하는 것은 우리들을 겨냥해서입니다. 요한복음은 심지어는 예수의 표징과 이적을 말하면서도 우리들은 그것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14:12). 예수의 선재성을 말하는 것도 각자 우리의 존재의 시작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10살짜리 어린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단지 10년의 삶을 산, 10년의 가치를 가지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의 나이 10살 이전에는 괄호 안에 들어있는 시간이 숨겨져 있습니다. 까마득한 태초로부터 유래한 그의 존재의 뿌리의 시간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까마득한 시간은 그 아이와 우리들의 공유의 몫입니다.
오늘 우리들 각자는 우리들의 나이에다가 태초로부터 나이를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까마득한 뿌리의 시간 태초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유서 깊은 전통과 경험을 인하여 기뻐하십시오. 아마도 그리스도인에게 추석이란 이런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한 인간, 한 아이를 보는 인간의 깊이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의 모습 그대로, 그의 태초로부터의 깊이는 그의 인권의 깊이이고, 그의 인간적 가치의 깊이는 태초로부터 내려온 인류의 경륜의 깊이와 같습니다. 자기 자식이라 하더라도, 이 어린아이는 나에게 유래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며 나와 내 아이는, 몸으로 아버지 아들, 어머니와 딸이라는 관계를 하고 있으나, 사실은 태초부터 예비 되었고 오늘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도록 예비하신 인물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자신'으로 다시 그것은 '교회'로, 교회는 결국 당신과 나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나]가 있는 것인데, 그 [나]는 이렇게 어마어마하고, 장대하고, 오래되고, 큰 [나]인 것입니다. 이런 [나]가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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