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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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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30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소망. 사랑. 믿음
요14:1-12
고린도전서 13장에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이 개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 단어를 순차적으로 여깁니다. 믿음다음에는 소망이고, 소망다음에는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랑]이 믿음보다, 소망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구나 생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하는 단어들의 순차는 그가 처한 고린도교회의 형편을 고려해서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고린도교인들은 서로 신앙적으로 잘난 척을 하면서 다퉜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믿음이 아무리 훌륭하고 자랑할 만해도, 소망이 확실해서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결단을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이 바울의 중요 개념의 순차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믿음을 자라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우선시 할 때 소망-사랑-믿음 이런 순서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없으면 새로운 내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망을 제일 앞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 내일이란 사랑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또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사랑을 놓았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악의 세력을 이길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출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크리스마스 사건에서 봅니다. 아기 탄생은 어떻게 이룩되었습니까? 그것은 가난에 떠는 갈릴리 농민들의 간절한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저들은 날이 갈수록 극심한 가난에 찌들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에 사회에서 소외되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저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날로 더 쇠약해 갔습니다. 저들이 간절히 바란 것이란 일용할 양식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가족들과 같이 삶을 즐기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지키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늠름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저들을 억눌러서 날이 갈수록 앞날이 더 어두워 졌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원성이 천지에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성에 응하여 아기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기 예수는 민중들의 이런 간절한 바람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라고 한 천군 천사들의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대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포함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온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민중들의 간절한 갈망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소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경우도 같습니다. 저들이 애굽에서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까?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하는 바로의 권세 아래에서 365일 뼈 빠지게 일해도 그 열매를 다 빼앗기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과부와 고아가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 우리에게도 땅을 주소서. 우리도 자기 손으로 지은 열매를 먹게 해 주소서. 처자와 친구들과 더불어 삶을 줄길 수가 있게 하소서!” 하고 하늘을 향해서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와 같은 간절한 소원에 응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어 시내 산 잎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제부터 비참했던 애굽의 삶과는 결별하고 과부, 고아. 나그네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평등공동체를 이룩하는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와도 같이 하나님은 그들의 간절한 바람에 응하여 새롭게 살 수 있는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역시 민중들의 간절한 갈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변한 것입니다.
이제 이 바라는 것이 현실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이 사랑의 길만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바라는 것이 현실화가 될까요? 그것 역시 사랑으로만 이룩됩니다. 그 꿈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이룩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혹은 지혜가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그 소망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맙니다.
먼저 사랑이 없어서 실패한 한 소망의 이야기부터 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에 이룩된 평등공동체였습니다. 신명기 24장에 보면 그 꿈이 그려져 있습니다.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 이삭을 밭에 남긴 채 잊고 돌아왔거든 그 이삭을 집으러 되돌아가지 말라. 그것은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몫이다. 그래야 야훼께서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
“올리브 나무 열매를 딸 때 한 번 지나간 다음 되돌아가서 다시 가지를 뒤지지 말라. 그것은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몫이다.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던 일을 생각해 보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명하는 것이니 너는 반드시 이를 지켜라.”
그러나 이 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힘의 각축전에 휘몰려들어 결국 사랑이 아니라 힘을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이란 저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무력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무력을 사용했기에 주변에 있는 종족들이 더 큰 힘으로 저들에게 도전을 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힘을 기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들도 하나님 외에 다른 권세 있는 자를 두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왕을 모시게 되었고 날이 갈수록 왕은 힘의 철학에 도취해서 자기 절대화를 할 뿐만 아니라 백성 수탈 행위를 당연시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평등사상은 완전히 파괴되고 백성들은 다시 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꿈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랑이 없으면 그 꿈은 신기루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꿈을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로 말미암는 꿈은 그렇지 않았지요. 그 꿈은 나사렛 청년 예수의 삶을 통해서 아름답게 현실화되었습니다. 그가 간 곳마다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어 생명이 피어오르는 인정공동체를 이룩하게 한 것입니다. 그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 있는 우정 정도도 아닙니다. “네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다”고 하는 애인들 사이의 사랑도 아닙니다. 온 인류를 사랑하는, 아니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한없는 생명 사랑입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저들 사이에 이룩되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악마의 세력은 날이 갈수록 발광하게 되어 마침내 나사렛 청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발악은 저들의 몰락을 자초했고 이로 해서 이 인정공동체 운동은 온 천하로 확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랑의 기적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이야 말로 천하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라는 것을 믿게 했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는 예수님과 도마 사이의 대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곁을 떠나게 되었을 즈음 제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들은 내가 간 길을 가면 된다. 그 길을 알고 있지 않느냐?” 하고 말씀하시자 도마는 그 길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예수님은 “나는 곳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철저히 사랑의 길을 걸으면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평화의 공동체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교회가,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와 온 인류가 서로 축복을 하면서 평화롭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라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타 이르셨던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우리교회 1,2여선교회 회원들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심장로님이 박장로님 삼계탕 집에서 낸 것이었습니다. 저도 오래된 교우들과 그 날 같이 점심을 먹었습니다. 실로 그분들과는 30여년을 생사고락을 같이한 교우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와는 나이 차이가 나지만, 제 목회의 중심 세대이기도 합니다. 밥 먹기 전에 옛날이야기가 한참 오고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30여년의 목회 기간 동안 저는 몇 가지들을 하나님께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유성윤 장로님처럼 책을 많이 내는 것, 겨울마다 장작을 4톤트럭 3대는 사서 패고 때야 겨울을 날 수 있는 예배당을 헐고 새로운 예배당을 짓는 것, 새벽 기도회에 나갔을 때 많은 교우들이 앉아 있는 것, 그리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교회의 일꾼들이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그때는 너무 아프고 시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그리고 기도로 간절하게 그런 날이 오기를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그런데 지내놓고 보니까 제가 간구하던 모든 게 다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경험들을 통해서 한 가지 결론을 경험적으로 얻었습니다. ‘뭔가 간절히 바라는 게 있으면 언젠가는 이루어지게 되어 있구나!’하고 말입니다. 나는 소망했고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게 저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가슴 설레는 소망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저절로 현실화되지 않습니다. 참된 사랑이 뒷받침해야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람하고, 온 인류를 사랑하는 높고 깊은, 그리고 끈질긴 사랑이 뒷받침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기적을 나타낸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크고 작은 소원들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소원, 내 가족을 위한 소원, 내 교회를 위한 소원, 내 민족을 위한 소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크게는 온 인류를 위한 소원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개인적인 소원은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공동체에 대한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지금보다 약간 교우들의 수가 많았으면 하는 것이고, 지금의 예배당 앞이던지 옆을 조금 더 넓혀서 교육관, 사무실, 공연실, 식당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날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소원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믿을 때 소망으로 변한다는 것도 확신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간절한 기원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참된 사랑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을 때 그것은 신기루와도 같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꿈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고 참된 사랑으로 뒷받침이 될 때 그것은 아름다운 현실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크고 아름다운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나는 바울의 믿음-소망-사랑의 순차를 바꿔서 소망-사랑-믿음을 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저의 삶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30여년을 그리 하신 것처럼, 내가 꾸는 꿈은 여러분의 기도가 되고 마침내 현실이 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바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그리고 성취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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