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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정복된 나라

요한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961 추천 수 0 2012.07.30 23: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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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17-27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2012.4.8 주일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좋은 세상 만들기(3) 죽음이 정복된 나라
요한복음11:17-27

오늘은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통하여 좋은 세상 만들기 세 번째로 “죽음이 정복된 나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좋은 세상이란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4. 11 총선을 앞에 놓고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자들이 너도 나도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공약을 내어 놓고 있습니다. 자신이 되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터이니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거리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정치 민주화를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경제 민주화를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복지 국가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지역의 현안을 풀어 주면 좀 더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경제적으로나 감각적으로 욕망을 좀 더 많이 충족시켜 주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 제도와 관행을 좀 더 합리적으로 만들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복지 사회를 만들면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가 아량을 베풀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정도의 차이지 방향을 다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실행력입니다. 정치 지도자들 잘 뽑아야 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먼저 중요한 것은 지도자입니다. 이해 갈등을 잘 조절하는 정치 지도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듯이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정치는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 집단의 욕망 사이에서 타협하려면 반드시 타협을 위한 가장 발전된 도구, 정치가 필요합니다. 이번 선거에서 기권하지 마시고 꼭 투표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할 사람에게 투표하십시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질문할 사람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지금까지 그가 해 온 것을 보면 압니다.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산 사람인가? 아니면 남을 위해 산 사람인가? 금방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힘을 가지고, 그에게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그에게 주어진 돈을 가지고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를 보십시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것 아닙니다. 대부분 지금까지 살아 온대로 살아갑니다. 어느 대통령이 “인사가 만사”라고 말했던 것처럼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사람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 세상을 산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만큼 좋은 세상을 만들어 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여인들은 사람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종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사랑과 용서가 꽃이 피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은 각 분야에 나타나 삶의 질을 향상시켰고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유, 평등, 박애, 복지가 실현되었습니다. 좋은 세상은 근본적으로 어떤 세상이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어떤 나라를 만들었습니까?

1. 예수님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죽음이 정복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인류를 불행하게 하는 근본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25-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네가 믿는냐”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왕국을 만드는 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왕의 능력에 따라 나라가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신 분이십니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좋지 않는 세상이 된 이 땅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난 주 살펴보았듯이 죄로 말미암아 파생된 문제들입니다. 그 중에 가장 큰 문제가 죽음입니다. 정녕 죽어야 되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 죽음 앞에 절망하고, 그 죽음 앞에 슬퍼하고, 그 죽음 앞에 고통스러워하고, 그 죽음 앞에 낙심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모든 악은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죽음 앞에 울부짖는 한 가정에 오셔서 예수님을 죽은 나사로를 살림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평화롭고 행복하게 사는 식구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의 부모님은 일찍이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녀들의 오빠인 나사로입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면 나사로는 가장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이들 가족과 예수님은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가족과 예수님과 어떤 사이였을까요? 11:5절을 보십시오. 3절을 보십시오. 36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말보다 더 가까운 사이를 표현하는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들었습니다. 여 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어 간절히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불구자를 고치시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베푸신 분이심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청을 들어 주지 않았고 그의 오빠는 죽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지만 때로는 이런 고통에 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정도 사랑하는 자였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항상 행복이 넘쳐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도 병들 수 있습니다(2). 주님께 부탁했는데도 문제가 풀리지 않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6, 17). 나사로는 병은 낫기는커녕 죽었습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도 죽습니다(32). 주님만 계셨으면 죽지 않을 것으로 알았지만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 두고 오셔서 고쳐 주실 줄 알았지만 결국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성도님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도 너무하신다.” “예수 믿으면 잘 된다더니 다 거짓말이다.” “왜 원하는 대학과 원하는 직장에 합격을 안 시켜주는가?” “하나님이 사랑한다면서 왜 이런 불행을 주시는가?”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하나님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 어떤 집사님과 대화하는데 1년 동안 되는 일이 없다고 실망스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을 보았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떨어졌다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초월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 좋은 일만 생깁니까? 모세는 40년 처가살이 하고 희망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20년 동안 열 번이나 외삼촌에게 속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절망하고 낙심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민족을 해방시키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민족을 만드는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덤 앞에 가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41).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4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나사로가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사람의 말 한마디도 얼마나 권위가 있습니까? 말 한마디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순간적인 말 한마디로 밤잠을 자지 못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재판장의 말 한마디에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무죄로 석방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 한마디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과학이 발달된 현대를 살아가는 이성 만능주의 자들, 경험 만능주의 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스피노자는 "만일 누구라도 나를 위하여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나사로의 부활기사를 진실로 입증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내가 세운 철학을 파괴하고 크리스천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 "기절한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 바깥 바람 쐬어 호흡을 회복했다."고 했습니다.
예수전을 쓴 르낭 "예수에 대한 신앙이 식어 가자 베다니의 세 남매와 짜고 술책을 부렸다"고 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이 가짜일 수 없습니다. 소경이 태양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귀머거리가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해서 바람이 없습니까?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자신의 경험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초 논리, 초 이성의 세계입니다.
오늘날 자연과학과 역사 비평의 합리적 사고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 속에 실제적으로 일어난 유일한 사건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산물로서 인간의 창작에 의해 채색된 신화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과학적 사고의 기초가 되는 비평의 원리, 유추의 원리, 상관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과학 문명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제자들의 신앙 고백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의하여 신화적으로 꾸며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활에 대한 의심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의 역사성, 둘째, 부활 기사의 신빙성, 셋째는 빈무덤의 역사성, 넷째는 부활 후 출현의 역사성입니다. 결국 부활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적이고 유일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가설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일시 기절했을 뿐이며 장사를 한 후 정신이 되돌아와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여인들이 어두운 새벽길에 잘못 찾아서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옮겨 놓고는 부활했다고 거짓을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는데 돌아가신 후 죄송한 뉘우침에 부활을 말하신 것을 굳게 믿고 심히 피곤하여 머릿속에 그리다가 마침내 환상을 보고서 이것을 실제인양 퍼트렸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신화, 동방신화에 나오는 부활설을 예수님께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이 사기이고, 환상이고, 꾸며낸 이야기이고, 신화일까요? 기절하였다가 다시 일어났겠습니까?
과학적 증명만 꼭 사실을 입증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법적-역사적 증명도 있습니다. 법적 증명은 구두증언과 문서상의 증거 그리고 증거물에 의존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성경의 증언이면서 역사적 사실입니다. 빌라도도 '빌라도 보고서'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초기의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그는 메시아였다. 우리 유대인들 중의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고소했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를 정죄하여 십자가의 처형을 받도록 했다."라고 기록했고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도 "이 이름의 창설자인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 중에 총독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다."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 사실인 것을 확실하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가서 빈무덤을 보고 착각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묘지는 공동묘지가 아니라 개인 묘지이기에 찾기에 쉬웠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의 위치를 미리 확인하여 두었습니다.(눅23:55). 제자들이 시체를 도둑질하여 옮겨놓고 거짓으로 부활했다는 소문을 퍼뜨렸겠습니까? 그럴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잡히시던 현장에서 도망하고 주님을 부인하던 제자들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부활을 전했을 때, 믿지 않으려고 확인까지 하려던 제자들입니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들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하였는데 한결같이 거짓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너무 그리다가 그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헛소리 한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일시에 환상을 보고 실제적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간 무려 11번 나타나셨고 갈릴리 지정된 산 위에서는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확실한 증거는 부활을 목격한 예수님의 가족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요7:5) 미쳤다고 했습니다.(막3:21) 그러나 그들은 부활을 목격하고 그들의 삶은 변하였습니다(행1:14)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기록했고 유다는 유다서를 기록했습니다. 회의론자들이 회심한 것입니다. 핵심적인 사회 구조가 변해 버렸습니다. 희생제사, 율법, 안식일을 기반으로 하는 유대 사회가 변했습니다. 1500여 년 동안 이어온 안식일이 예수님이 부활한 날로 예배가 바뀌었습니다. 바벨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등에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이것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유대를 지배한 민족은 사라졌지만 유대인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사회 구조가 바뀔 수 있겠습니까? 로마가 부활신앙으로 정복되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채 20년도 되지 않아 로마의 황실까지 들어가 로마의 권력을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 밖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을 부활이 지배하는 소망의 세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신 죽음이 정복된 좋은 세상입니다.

죽음이 정복된 세상에 누가 살 수 있습니까? 좋은 나라가 되려면 좋은 왕도 중요하지만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도 중요합니다. 백성이 좋은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2. 죽음이 정복된 나라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그 나라에서 살 수 있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 싶은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을 갖고 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왕노릇 못하는 세상의 백성이 되길 원하십니다. 나사로만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만 역사 속에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우리도 죽지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좋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음의 종이 되어 절망하는 삶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 되어 소망가운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왕자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잃었습니다. 뒤에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하들과 함께 지방 순시를 갔습니다. 저작거리에서 거지들이 춤을 추면 놀고 있었습니다. 구경하고 있는데 자신과 비슷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신하에게 데려오게 하여 보니 뒤에 점이 있었습니다. 분명 자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이 거지를 향하여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왕국에 가서 살자.” 이 거지가 어떻게 하면 왕궁에 가서 살 수 있습니까? 자기 앞에 서 계신 분이 자기 아버지라고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우리도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이 정복된 영원한 나라에 가서 산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것은 잘 믿습니다. “어떤 탤런트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 대통령을 접대하여 흑인 아이를 낳았더라.”라고 말하면 그것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열심히 전해줍니다. “어느 탤런트가 결혼하기 전에 임신했다.”고 하면 자신은 그 탤런트를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고, 실제로 임신 기록을 보지도 않았는데 잘 믿습니다. 우리가 전해 들은 것이 100% 사실적인 경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기억의 한계가 있고 다 자기가 본 것으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라는 책을 보면 스무 명의 사람들에게 링컨이 새겨진 미국 동전을 보여 주고 그리라고 하니까 여덟 가지 특징을 빠짐없이 그린 사람은 열렬한 동전 수집가 한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실을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그런데 온갖 시시콜콜한 것은 잘 믿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은 객관적 사실과 수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잘 믿지 않습니다. 어느 시골에서 깡패하시다가 목사님이 되신 분이 부흥사로 가셔서 부흥회를 했답니다. 그런데 동네 깡패들이 부흥회를 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와 설교 방해를 하자 서울 깡패 출신 부흥사 목사님이 내려가 다 때려 눕혔답니다. 그러자 시골 깡패들이 무릎을 꿇고 “형님, 알아보지 못하고 죄송합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고 믿으라고 하였답니다. 설교를 듣던 깡패들이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까? 믿을 것을 믿으라고 해야 하지요.”라고 말했답니다. 그 때 부흥사 목사님이 “믿으라면 믿어 까불지 말고 좋은 말로 할 때 얻어터지기 전에 믿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부활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분 계십니까? 믿어서 손해될 것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습니다. 팡세를 지은 파스칼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수학자 겸 물리학자이면서 철학자인 파스칼은 "이성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이성의 최고 업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였든 파스칼은 팡세에서 "천국! 이것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도박이다! 그냥 우리가 포기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어마어마한 이것은 도박이다." 파스칼은 수학자이니까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천국이 없어도, 천국을 믿고 살았든 나에게 별로 손해 볼 것은 사실은 없다. 그러나 천국이 정말 존재했다면, 준비만 했으면 갈 수 있었던 천국, 그런데 그 천국을 내가 놓쳐버렸다면 이것은 큰일이다. 이것은 놓쳐버리기에는, 이것은 그대로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어마 어마한 도박이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을 인생의 끝이라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 끝났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아니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모태의 삶은 끝이지만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끝이지만 또 다른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벌레가 고치가 되고 고치가 다시 나비로 태어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을 죽음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리 교수는 운동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은 모두 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네. 만일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다면 사람들은 금방 딴 사람이 될 걸세.'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활만 확신한다면 우리 인생은 새로워질 것이다.”라고요.
병든 나사로를 고쳐주기 위해 바로 가지 않고 지체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15)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옵니까? 3번 나옵니다. 이 말을 듣고 마르다가 무슨 고백을 합니까?(27)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왜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까?(42) 결국 유대인들이 믿음을 가집니다.(45,12:11)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십시오.

1) 죽음이 정복된 나라의 백성으로 막연한 부활 신앙인이 아니라 확고한 부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마르다를 보십시오. 어떤 신앙인이었습니까?
21절에 보십시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질병에서 고침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문제의 해결자인 것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시킬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이제라도 주님께서 하시면 살릴 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지금 살아난다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24절에 보십시오. 마지막 날에 부활할 줄 믿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지금 부활시킬 것을 믿지 못합니다. 무덤 앞에 가신 예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보십시오. 죽은 지 사일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진 그녀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말을 하는 그녀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합니다(40).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라" 합니다(43). 죽은 나사로를 살려냈습니다.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종말론적인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신앙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부활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실제 부활을 목격하게 함으로 확고하게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에는 역사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또 다른 부활 신앙은 불트만이 말한 실존적인 부활 신앙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의 이적이나 표적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앙적인 사건이다”고 봅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것은 역사적으로는 있을 수 없고 신앙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활 신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시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낙심에서 낙관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부활의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을 간접 경험한 마르다의 삶이 얼마나 달려졌겠습니까? 죽음이 문제되지 않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삶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확고한 부활신앙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이 부활장입니다. 결론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2) 죽음이 정복된 나라의 백성으로 체험적인 부활신앙인에서 영향력을 주는 부활신앙인으로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쓰임 받아야 하겠습니다.
나사로는 부활 신앙을 체험하였습니다. 직접 죽음에서 부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활체험으로 어떤 영향력을 끼쳤습니까? 12장 11절을 보십시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한 부활신앙을 가진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초월한 나라의 백성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니까 빙정 댑니다. 냉소주의 자들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맹인도 눈을 뜨게 한다매 그런데 왜 사랑하는 사람 병들었는데 고쳐주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두어, 그리고 죽으니까 울고 있어” 이런 식으로 빈정거리는 것입니다. 그랬던 그들이 나사로가 죽음에서 살아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믿게 되었습니다. 변할 수 없는 증거를 본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를 본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한 사람을 통해 엄청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부활을 이론적으로 알 때 그들은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그들은 부활의 산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로 하루에 3000명 5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부활 공동체인 오순절 교회를 보십시오. 날마다 같이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배웁니다. 기도하여 질병을 치유 받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정치적 자유과 경제적 자유, 복지가 실현되는 좋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부활을 확신하고 체험하며 사는 우리는 죽음이 정복된 세상을 만드는데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4월 11일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정치인들도 자신이 되면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터이니 자신에게 표를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감각적으로 욕망을 좀 더 많이 충족시켜 주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사회 제도와 관행이 좀 더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자유와 평등,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모든 사람이 더불어 잘 사는 복지 사회를 만들어 주겠다고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좋은 세상은 죽음이 정복된 세상입니다. 죽음에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죽음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죽음을 정복한 주님을 구주로 믿고 돌아온다면 세상을 보다 좋은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최대의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가장 두려운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지막 남는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사망의 강력한 독화살 앞에 부자도, 권력자도, 미인도, 학자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무너집니다. 누구도 죽음 앞에 예외가 없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초교파 외국 선교 연합회의 조사에 의하면 24시간에 32만 명이 출생하고 16만 명이 사망을 한다고 합니다. 매시간 7,000명 매분 120명, 매초 2명씩 사망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해에 25만 명이 죽습니다. 하루 685명입니다. 한 시간에 28명입니다. 교통사고로만 하루에 26명이 죽는다고 합니다.
누가 그 대상일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 그 죽음 앞에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건강했던 사람이 병원에 가 건강검진을 받고 죽음의 공포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죽음이 멀리 있었던 것 같았는데 죽음만 보이게 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죽음을 초월하여 살듯했던 싸르트르도 사망을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 달 동안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그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불란서의 신문들은 싸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기사를 썼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각 언론이 말했답니다. 그때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었다고 합니다. “싸르트로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싸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 참 안식의 본향, 죽음도 슬픔도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는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권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할 듯 살았던 마르크스도 사망을 두려워했습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고,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숨졌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죽음을 정복한 세상을 만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죽음이 정복된 좋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18세기 말 유럽 사회는 노예무역과 아동노동, 대중의 빈곤과 상류층의 타락 위에 세워졌습니다. 당시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력과 상선을 갖추고 노예무역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영국의 선박들은 서아프리카를 통해 10만 명의 노예들 중 절반 이상을 실어 날랐으며, 1783년부터 1793년까지 리버풀의 노예선만 약 30만 명의 노예를 서인도 제도로 실어 날라 1천 500만 파운드(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2억 5천만 파운드)에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영국에서의 노예무역은 1600년대에 국왕의 칙허와 의회의 법령으로 합법화되었습니다. 노예무역은 영국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영향력에 대하여 1791년 리버풀의 의원이었던 탈턴 대령은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무역은 순식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무역 때문에 연간 5,500명 이상의 선원이 고용되고, 약 160척의 배가 사용되었으며, 수출 물량도 8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노예무역을 폐지한다면 서인도제도의 무역도 파국으로 치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수출량과 수입량은 거의 600만 파운드에 달하며, 약 16만 톤의 선박과 수만 명의 선원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무역을 금하는 것은 반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믿으며 죽음을 초월하여 산 영국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사명감을 갖고 일어나 이 제도를 폐기 시키고 양심과 정의감이 살아 있는 나라 영국을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반대를 헤치고 “노예무역 폐지”라는 사명을 붙들고 투쟁한 지 20년 만에 노예무역 폐지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무려 150번의 의회 논쟁을 통하여 노예제도가 영국에서 사라졌습니다. 그가 그런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처형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권력을 쥐고 타락한 생활을 하던 160센티미터의 작은 체구를 가진 월버포스는 필립 도드리지의 『영혼에서 종교의 부흥과 진보』라는 책을 공부하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완전히 변화가 되었습니다. 상류층 인사가 모이는 다섯 개 클럽에서 탈퇴하고 도박과 춤을 끊었으며, 당시 타락 일로로 흘러갔던 연극 극장에 가는 것도 중단했습니다. 성경책에 몰입하였고 신앙은 그를 지탱해주는 거대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 활동의 목표는 바뀌었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목표를 두셨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근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고 부활하신 부활주일입니다. 죽음이 정복된 나라 좋은 세상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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