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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6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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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2년 8월26 http://dabia.net/xe/607899 |
정용섭 목사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0-71, 성령강림절후 14째 주일,
2012년 8월26
요한복음 6장은 전체적으로 오병이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초기 기독교에 잘 알려지기도 했고, 신빙성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 자체는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숫자가 오천 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밥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도시락을 준비할 수도 없었고, 식당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떤 아이가 갖고 온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생선을 손에 들고 기도한 후 거기 모였던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었고, 남은 것을 모으자 열두 바구니나 되었다는 겁니다. 빵과 생선이 수천 배로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술일까요? 초자연적인 기적이었을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생명현상은 이런 마술처럼 보입니다. 보십시오. 옥수수 한 알을 심으면 수천 배의 결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쌀도 그렇고, 밀도 그렇습니다. 제가 영천 원당리에 있는 농가에 들릴 때마다 복숭아 과수원 곁을 지나갑니다. 봄에 복숭아꽃이 피는 순간부터 잎이 나고 작은 복숭아가 열리고 또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나무 한 그루에서 수십 개의 복숭아가 달립니다. 수십 배, 수백 배, 수천 배를 결실을 맺습니다. 그것도 한 해에 머물지 않고 매년 반복됩니다. 이 세상의 생명현상 자체가 오병이어 기적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다르게 생각할 겁니다. 옥수수나 복숭아나무는 그냥 자연현상에 불과하지만 복음서가 전하는 오병이어는 그런 자연현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 우리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가서 세상의 경제 문제까지 해결하는 하는 게 참된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믿고 싶은 분들은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성서와 그 성서를 기록한 초기 기독교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잊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런 것을 거부했습니다.
떠나는 제자들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뒤에 사람들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여기서 표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민중들이 오병이어 자체에 호기심을 보인다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들은 자기들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일어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에 열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제, 복지에 관심을 보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으로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조상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만 결국은 죽었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이 많은 미국사람들이나 너무 못 먹어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들이 많은 에티오피아사람들이나 모두 죽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58) 이 생명의 빵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바로 이 사실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일반 민중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건 그럴 수 있지만 제자들이 그렇다는 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열두 제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잘 따르던 여러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어렵다고 생각한 이유는 광야의 만나에만 삶의 초점을 맞추고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한다고 해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인권은 천부적이다.’는 말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렵다거나,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며,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는 말이 너무 어렵다고 투덜거린 제자들이 많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예수님의 답변을 들어보십시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요 6:65)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해야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이 자칫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개인의 생각이나 책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결정이라고 말입니다. 칼뱅의 이중예정론도 이런 오해를 받습니다. 이미 구원받을 사람과 버림받을 사람이 이중적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건 오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이 신비로운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각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친구를 따라서, 또는 스스로 교회에 나온 경우도 있겠지요. 그 모든 것은 신비입니다. 더구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믿음의 단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런 믿음의 경지는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믿음도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게 되고,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런 상황은 예수님 당시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에 그대로 해당되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가 안 되고 동의할 수 없으면 결국 떠납니다.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처럼 흉내를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런 믿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떠나게 됩니다. 그 제자들이 모두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말씀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자신의 세계관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교회가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교회가 부도덕하거나 비상식적으로 운영되어서, 또는 따뜻한 사귐이 없어서 거기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는 것은 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지만, 그들이 복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떠난다면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부단히 영적으로 도전을 해야 합니다.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집중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충실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하게 해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 많은 제자들이 떠난 뒤에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인 실망이 있었을 겁니다. 외로움도 느끼셨겠지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이와 비슷한 상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기도 했지만 결국 다 떠났습니다. 홀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목회자들도 너무 사람들을 모으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런 건 정치인들이나 연예인, 또는 기업가들이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심정으로 열두 제자에게 떠나겠는가, 갈 테면 가도 좋다,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영적 도전입니다. 예수님을 떠날 기회는 언제가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우면, 즉 동의할 수 없으면 떠나야 합니다. 이런 도전 앞에 실제로 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는 당연히 죽을 때까지 나가야 하는 거지, 하는 생각만 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두 번째에 속할 겁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나가라고 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서로 자기 교회라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게 한국교회 성장의 저력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위기이기도 합니다. 복음의 중심이 아니라 단순한 종교생활에 만족하다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떠날 것인지 아닌지, 즉 기독교 복음을 감당할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십시오. “너희도 가려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직면해보십시오.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동의하지도 못하면서 체면 때문에, 또는 교우 관계 때문에 남아있다는 건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에게 실제로 떠나라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떠나간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떠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있어서 모여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떠났습니다. 이것보다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떠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머지 열두 제자가 있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준엄한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복음을 확실히 붙들라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1)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에게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다른 누구에게도 갈 수 없습니다(68절). 2)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69절).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머물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반복된 핵심 개념인 ‘예수가 생명이다.’가 여기서 다시 강조됩니다. 예수님을 떠나느냐, 아니면 머무느냐 하는 결단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 영생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되고 믿을 수 있다면 머물게 될 것이고, 어렵기도 하고 믿을 수 없다면 떠나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처지인가요? 대답이 각양각색일 겁니다. 큰 소리로 “나는 믿습니다.” 하고 외치는 분들도 있겠지요. 예수 영접의 확신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확신이 단순히 주관적인 경험에 떨어지지 않고 바른 신앙에 올라서려면 예수님과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느껴야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추상적인 것보다는 지금 여기서 예수님처럼 이웃을 위해서 살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삶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중심은 아닙니다. 대부분 진실한 신앙을 추구하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확실하게 믿고 싶지만 여전히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불안할 때가 있다고 말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너희도 가려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연루된 영적 상황을 직면하십시오. 여러분이 기꺼이 그렇게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하는베드로의 고백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말씀이 귀에 아예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이미 마음과 몸이 예수님을 떠난 제자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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