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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별다른 사람이라고 느낄

요한복음 신대현 목사............... 조회 수 1921 추천 수 0 2012.09.25 23:28:01
.........
성경본문 : 요7:53-8:11 
설교자 : 신대현 목사 
참고 :  

'나만 별다른 사람이라고 느낄 때'

본문: 요7:53-8:11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는 어떠한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끼는가? 예수님은 어떤 바탕에서 나를 받아주시는가?

 

오늘 주어진 본문들을 읽다 보면 나를 용납해 주는 것은 나 자신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것을 깨닫게 된다.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느낄 수는 있어도'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을 통해서는 '내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연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받아주시는 걸까. 어떤 모습으로 나를 용납하시는 것일까. 그 안에서조차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나님 마저 나를 용납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하나.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염려를 씻어주신다. 아마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염려를 하게 되는 것은 그 동안에 사람들로부터 받은 냉대와 쓸쓸함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제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상처들을 드러내어 놓고 하나님의 치료를 받자.

1. 요한복음 8장의 말씀은 버려진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예수님과 달랐다. 대조되는 면들은 무엇인가?

 

유대의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러 모양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들먹였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었다: 세리, 죄인, 과부, 병인, 이방인, 어린아이들, 여인들...(참조, 마 11:19; 눅 7:34). 그들은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을(눅 21:37-38) 견뎌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율법의 테두리에서 백성들이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실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찾아 나서는 목자였건만(눅 15:4-6) 율법을 꽤나 안다고 하는 유대 지도자들은 '죄인 한 사람을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백성들 가운데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붙들어 세웠다. 의분(義憤)으로 씩씩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수치로 인해 어찌할 바 몰라하는 그 여인, 가르침을 듣다 말고 뭔 일인가 의아해 하는 백성들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예수님... 과연 예수님은 이 갑작스런 상황을 어찌 해결하실 것인가.

모세의 율법을 따르면 그런 여인은 돌로 쳐야했지만(레 20:15), 유대인들의 손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었으니, 그 여인을 놓으라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돌로 치라고 하면 로마법을 어기게 되는 딜레마에 예수님은 놓이게 되었다.

 

율법을 정치란 덫에 걸어 예수님 앞에 내세웠을 때 예수님은 그 문제를 인간의 본질(nature)의 문제로 바꾸어 그 때부터의 상황을 인도해 가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답변 앞에서 누가 감히 돌을 집어 들 수 있었겠는가. 조금 전까지는 화통(火筒)을 집어삼킨 듯 부릅뜬 눈알로 의의 연기를 뿜어내던 인간들이 그 질문 앞에 꼬리를 내리는 꼴이란...

 

그렇게 자기 의를 주장하는 선봉에 '믿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관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분명한 목소리로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고 우리 귀에 들려주셨다(벧전 4:17). 심판은 딴 동네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도 아닌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토록 판단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손대시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로부터의 비판을 받는(be judged) 문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판 곧 '심판'을 당하는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갑작스런 질문을 받으시고는 모든 시선이 모아진 앞에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하신 후에도 다시 몸을 굽혀 쓰던 일을 계속하셨다. 그리고는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나가버렸다. 예수님의 말 때문만 아니라 또한 땅위에 써진 그 내용들로 인해서도 사람들은 뒷걸음질 쳤다고 본다. 무엇이 쓰여져 있었을까. 아마도 십계명이 아닐까싶다. 특히 5계명부터 사람들 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율법의 말씀을 하나씩 쓰면서 사람들로 더 생각하게 하셨다고 본다. 죄 없는 자라고 생각했던 자들로 하여금 율법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신 것이다.

 

인간의 의(義)라는 것이 어쩌면 그렇게 야비하고 비굴하고 추악하고 '상대적'일 수 있는지... 사람 앞에서야 다 자기가 옳지 누가 자기 틀리다 할 사람이 있겠는가마는 '하나님 앞에서'야 어떤 사람이 자기 본질과 상태를 내세우며 여전히 깨끗함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 야비한 상대적 의(義)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상처를 주고 외롭게 하고 있는가.

 

'버려진' 사람들의 쓸쓸함과 고독은 '인간의 의'가 상대의 마음에 저질은 살인이다. '버려졌다'고 할 때 '경제적으로 불쌍한' 처지만을 떠올릴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인간 관계로 인해 버려진 모든 모습이 다 포함된다. 예수님은 이 간음한 여인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고 여인을 보내셨다(11절). 그렇다면 예수님은 모든 죄에 대해서 이렇게 응대하시는가. 결코 아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죄를 간접적으로 지적 받고 사함 받지도 못한 채 뒷걸음쳐 달아났지 않은가. 또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마 12:34). 우리 예수님은 결코 죄 앞에서 유하신 분이 아니었다. 그렇담 이 여인은 왜 죄를 지적치 않으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시며 보내셨는가.

 

이것은 예수님이 1:17의 말씀을 이루려하신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그것도 다름 아닌 그 여인의 마음 안에서 이 말씀을 이루셨다. 예수님은 그저 그 여인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에게 은혜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 여인의 마음에 새겨 보내셨고, 그 때부터 그 여인은 죄사함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인격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버려진 자들의 '사정'을 알려하기보다 버려진 상태에 질겁하고 도망치거나 손가락질하기가 일쑤이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신다. 물론 버려진 자들이라고 죄가 없고 다 옳은 건 아니다. 그들도 정죄하자면 얼마든지 정죄 당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죄'에 있지 않고 '은혜와 진리'로 초대하시는 데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되 율법의 기준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인격 안으로 불러들이시면서' 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은 이제까지 지은 죄에 대한 방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의 회개와 새 출발의 선물이다.

 

진리는 '긍휼'과 만나고 의는 '화평'과 입맞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시 85:10).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이 진리였고 의였다면 그것이 긍휼과 화평의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외식하는 믿음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태도를 따른다고 한다면 그들이 아는 진리만큼, 그들이 품은 의(義)만큼 삶에는 긍휼과 화평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우리로 인해 세움 받은 자보다 버림받은 자가 더 많다면, 아니 버림받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나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와 화평의 관계를 가져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외식이다. 그 외식을 버리고 다시 설 때까지는 결코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들을 들어주자고 당신의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다.

2. 빌립보서 4:6-7과 요일 1:9는 예수님의 용납과 위안을 확증해 주는 약속을 담고 있다. 약속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약속에 따르는 조건들을 행해 보았는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말씀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요일 1:9a)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응답이 오기 이전에 우리편에서 요구되는 행동이다. 과연 어떤 응답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빌 4:7) 과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요일 1:9b)이다. 이 둘은 서로 떼어질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불의하고 죄를 품은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마음과 생각이다.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풀어내면 거기에는 우리의 바라는 바의 내용만 마음을 헤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깨닫지 못했던, 아니 깨닫고 있었지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진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모든 숨겨진 더러움이 드러나고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지키실 만한 참 내 마음과 생각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용납과 위로는 우리의 '중심의 향방'에 있다고 하겠다. '누가' 과연 나를 위로하실 자인가, 누가 과연 내 염려를 받아주실 자인가, 그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모든 것을 맡겨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벧전 5:7). 지금껏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면 또 혼자만의 문제를 안고 끙끙 앓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맡겨버릴 대상을 '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26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주께서 심지(心志)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우리 중심에는 항상 주(主)가 의뢰자로 계셔야 한다.

 

평강이 임하지 못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 계셔서가 아니라 우리의 '심지'가 이러 저리 흔들려서 주님께로 초점을 맞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마음의 뜻'만 견고하고 주님을 의뢰함은 없기 때문이다. 후자는 특별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이다. 전자의 예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요한복음 5:1-9가 그것을 얘기해 준다.
병을 안고 삼십 팔 년을 살아왔다는 것은 실로 만고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그 사람의 문제는 그 오랜 세월동안 병을 고쳐줄 대상을 잘못 여기고 바라왔다는 데에 있다. 그가 바랐던 것은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었다. 이것마저도 문제 해결책을 찾은 것이지 인격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뜸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셨다. 이제까지 죽는소리하며 누워 하소연하던 그 병인은 그 소리에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이것도 간음하다 잡혀왔던 여인의 경우처럼 예수님께서 병인의 죄를 다루기보다는 사람의 형편을 먼저 낫게 해 준 예라고 하겠다. 이 사람이 죄가 없어서였는가. 아니다. 14절에 보면 후에 예수님이 그 사람을 만나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러면 이 사람의 경우를 통해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특별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는 말 다음에는 '이 날은 안식일이니'라는 말이 붙어 나오는데 여기에 우리가 찾는 답이 있다.

 

마가복음 2:28에서 예수님은 "이러므로 인자(人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셨다. 무엇이 '이러므로'인가. 그것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님으로'(27절)이다. 무슨 얘기인가. 지금까지 사람들은 많은 규율로 사람들을 얽맸다. 안식일이라고 하면 쉬어야만 하는 것을 생각했고, 쉬기 위해서 무한히 많은 규정들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안식일'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었지 사람을 묶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해 있는 그 안식일마저도 정작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주님은 말씀해 주셨다. 이는 우리의 안식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신 것이다.

 

우리의 안식의 근원은 어떤 규율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아니고 주님이시다. 삼십 팔 년 된 병인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 땅이 줄 수 없는 생명을 맛보았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그의 이 땅에서의 삶은 병자로 마치는 것이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낫게 된 것은 이 땅의 삶이 아니라 새 창조의 삶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변하는 역사를 체험하고 또 예수님이 다시 만나 주셔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으로 이전의 죄를 사해주신 사실을 깨닫게 된 그 병인이었던 사람은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15절)는 분명한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자기가 바라볼 대상을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생각건대 그가 예수님과 인격을 나누는 자가 되지 않았겠는가. 여느 병인들과는 달리 그토록 목말라 자기를 도와줄 대상을 삼십 팔 년 동안이나 찾던 그가 자기의 삶을 근본으로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쉽게 버렸겠는가.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와 주신 은혜가 있는 그가 그 은혜를 저버렸겠는가.

 

우리는 우리 몸을 던져 맡길 대상이 있는 자들이다. 주님은 우리의 위로이며 신뢰할 자이시다. 그 분과의 대화 단절을 가지지 말 것이다. 그 분 앞에서의 고백에 회칠을 하지 말 것이다. '나아서 자리만 들고 걸어갈 것'을 바라지말고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그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분이 '예수'라는 고백을 하며 살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된 자들의 마땅히 지녀야 할 모습이지 않겠는가.
/신대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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