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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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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8.15 주일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가라, 예수님은 이 말씀만 하셨다.
요5:1-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연못가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중풍병자를 고쳐줍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성전에서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병으로 고생할지도 모른다.”(14)였습니다. 또 한 번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 끝부분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 8:11)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설교자들과 성도들은 이 두 본문을 근거로 ‘죄와 병’의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병이 걸리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가 잘 못 되거나 하는, 원하지 않는 삶의 불행이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고, 그렇게 믿기도 합니다. 본문의 예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이게 올무가 되어서 항상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를 끌고 다닙니다.
이 가르침과 이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두 주 전에 [죄]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거듭 3주를 ‘죄’와 그 의식에 연관된 그릇된 신앙 관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정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뭘까? 병 고쳐 주신 것은 뒷전이고, 병을 고쳐서 기뻐하며 돌아가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고 겁주듯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어. 만약 그런다면 더 큰 병이 걸릴 거야.”하는 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일까요? 봅시다. 성서를 면밀히 봅시다.
벳세다 못 가의 중풍병자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그의 병을 죄의 결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거나 또는 믿음을 가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그로 하여금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요 5:10).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의식했다면, 더구나 한국의 많은 성도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어기면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병이 낫자마자 다시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은 그 병자의 믿음이 좋아서 그의 병을 고쳐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병이 나은 다음에도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5:1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사람의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5:14). 그러나 이 구절은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체로 예수께서 비유를 들거나 병을 고쳐준 다음에 그 현장에서 떠난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를 설명했다거나, 또 여기서처럼 나중에 다시 만나서 얘기했다고 하는 표현들은, 예수의 말씀이기보다는, 후대의 복음서 기자들의 편집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구절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라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그가 눈이 먼 것이 그의 죄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 것(요 9:3)과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요점은 앞부분 즉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수술 후에 병이 다 나았다 하더라도 의사가 경과를 보고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의사의 완치 선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얼굴이 환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지금 그 사람에게 그처럼 축복의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뒷부분은 치유된 사람을 공연히 불안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동안 그가 고생한 것이 죄 때문이었다는 해석을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바레트는 이 구절이 “신체적인 치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의 처리”를 함축하고 있으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은 지금까지의 죄가 이미 다 처리되었음을 말 한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옳습니다. 즉 의사가 “이제 깨끗이 나았어요. 앞으로는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세요” 라고 말했다면 그 말은 병이 다 나았다는 데 포인트가 있는 것이지, 지난날의 병은 당신이 무리해서 온 것이니 어쩌니 하는 복잡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어요. 이미 병이 다 나았는데 말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에서도 예수는, 그 여자를 고발하고 죽이려고 끌고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 여자의 지난 행위를 불문하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새번역 등 대부분의 한글성경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가라”를 “가서”라고 번역함으로써 “가라”라는 명령이 갖는 독립적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뒤에 오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명령을 수식하는 부사구 정도로 격하해 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공동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 등에서는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라는 식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본래 헬라어 성경의 의미를 잘 드러낸 것입니다. KJV, ASV, RSV, GNB, CEV 등 대부분의 영어번역본들도 이와 같은 식으로 “go, and do not sin agai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본래 이 구절은 “가라”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두 개의 명령문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문맥을 볼 때 후자보다는 전자 즉 “가라”라는 명령에 초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 이야기에서도 예수의 치유 명령은 “일어나라, 네 자리를 걷어라, 그리고 집으로 가거라”(막 2:11)라는 세 개의 명령어가 복합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죄와 관련된 명령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예수의 치유 명령은 죄를 강조하고 회개를 촉구한 다음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식이 아닙니다. 예수는 먼저 죄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며, 사람을 마비되게 하고 수십 년 동안 자리에 눕게 하는 그런 도덕주의의 자리를 “걷어치우라”라고 하며, 자신의 과거의 잘못이나 죄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 8:11)라는 말은 이 구절의 요점이 아닐 뿐만 아니라 후대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아라이 사사구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구절이 요한 기자의 전문용어라는 점(5:14, 8:11)과 중풍병자 이야기에서는 이 구절이 기적 현장의 말이 아니라 사후 설명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후대 교회의 해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원래의 전승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라”라고 하는 명령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는 명령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되는 겁니다. “가라”는 명령에 우선적이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는 말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 다음에 더 이상 죄 문제에 매이지 말라는, 부수적인 명령입니다. 죄의식, 정죄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걸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희망의 선언인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돌토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시오. 목표를 바라보고, 앞에 나 있는 길의 평평한 부분을 살펴보시오. 그래야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여서 길이 좋은 상태로 난 부분만 찾아낼 수 있다면, 당신은 움푹 패인 부분들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 122). 돌토는,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질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윤리화된 종교가 인간 존재 깊은 곳의 욕망을 억압하여 불어넣는 죄의식과, 그것에 대해 징벌하는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가 질병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 질병을 치유하여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왜곡된 종교적 정죄의 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큰 병에 걸리면 혹시 그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는 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얼추 그 내용이 이렇듯 인과응보 적입니다.
그러나 병은 죄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의 저급한 미신들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이고, 유대교에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것을 깨뜨렸고 이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는 늘 불운과 질병에 시달리던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고 조건 없이 병을 고쳐주는 분이라고 선포하였고, 자신이 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수많은 치유기적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어린 시절 겪은 아버지의 학대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서 늘 괴로워하는 청년 윌에게 상담 치료사 숀은 여러 가지로 접근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숀은 윌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아주 강하고 또렷하게 말해줍니다. 한두 번 듣던 윌은 나중에는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거세게 저항하고 큰 소리를 지릅니다. 하지만 숀은 굴하지 않고 거듭해서 “네 잘못이 아니야!” 하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나중에 윌은 자기를 평생 억누르던 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흐느끼면서 숀을 끌어안습니다. 윌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교육도 심리치료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 사람을 믿지 못해서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는 것 ...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상처가 있고 그 자신이 뭔가 잘못되어 있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못 된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상처도 그의 성격도 그의 잘못이 아니며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가장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깨닫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윌이 그 모든 치료와 상담을 다 포기하고 오직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만 반복한 것은,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아무 말도 아무 탓도 하지 않고 그저 “일어나거라” “걸어가거라”“가거라!”했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고지전의 신일용 대위(이제훈 역)가 겪는 죄의식도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포항에서의 후퇴당시 작은 배에 타려고 하는 같은 중대원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전우를 학살 합니다. 그 일로 인해 어린 일용이는 죄의식에 괴로워합니다. 그런 그를 악어중대원들은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냐. 너는 전우를 사살한 게 아니라 우리를 살렸어.” 이것이 일용에게 희망이 되어 끝까지 전우를 위해서 전선을 사수하다가 죽어갑니다. 일용이가 과거의 죄의식에 붙들려 있었다면 그는 폐인이 되어서 사라졌을 것이지만, ‘앞으로 가라’는 중대원들의 응원에 힘입어 나날이 용감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일용이에게 복음은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선언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병들어서 마음으로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어떤 잘못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해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으며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괜찮아”“앞으로 가”하는 우렁찬 예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요즘 제가 읽고 읽는 책,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에서 돌트라는 정신분석학자는 말합니다. “신앙이란 본래 무엇인가 감행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요5:1-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벳세다라는 연못가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중풍병자를 고쳐줍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성전에서 다시 그를 만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 심한 병으로 고생할지도 모른다.”(14)였습니다. 또 한 번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 끝부분에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 8:11)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많은 설교자들과 성도들은 이 두 본문을 근거로 ‘죄와 병’의 인과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병이 걸리거나, 사업이 망하거나, 자녀가 잘 못 되거나 하는, 원하지 않는 삶의 불행이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하고, 그렇게 믿기도 합니다. 본문의 예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이게 올무가 되어서 항상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의식과 사고를 끌고 다닙니다.
이 가르침과 이 믿음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두 주 전에 [죄]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오늘까지 거듭 3주를 ‘죄’와 그 의식에 연관된 그릇된 신앙 관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병자를 고쳐 주시면서 정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뭘까? 병 고쳐 주신 것은 뒷전이고, 병을 고쳐서 기뻐하며 돌아가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고 겁주듯이 “다시는 죄를 짓지 말어. 만약 그런다면 더 큰 병이 걸릴 거야.”하는 게 예수님의 본래 모습일까요? 봅시다. 성서를 면밀히 봅시다.
벳세다 못 가의 중풍병자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그의 병을 죄의 결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면, 적어도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거나 또는 믿음을 가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이 명령은 그로 하여금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유대 사람들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그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요 5:10).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의식했다면, 더구나 한국의 많은 성도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어기면 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병이 낫자마자 다시 안식일을 범하는 죄를 짓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예수님은 그 병자의 믿음이 좋아서 그의 병을 고쳐준 것도 아닙니다. 그는 병이 나은 다음에도 자기를 고쳐 준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5:1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그 사람의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 때문입니다. “그 뒤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리하여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생기지 않도록 하여라’”(5:14). 그러나 이 구절은 그렇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체로 예수께서 비유를 들거나 병을 고쳐준 다음에 그 현장에서 떠난 상태에서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를 설명했다거나, 또 여기서처럼 나중에 다시 만나서 얘기했다고 하는 표현들은, 예수의 말씀이기보다는, 후대의 복음서 기자들의 편집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구절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이라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에게 그가 눈이 먼 것이 그의 죄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 것(요 9:3)과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14절에서 요점은 앞부분 즉 “보아라. 네가 말끔히 나았다”라는 구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수술 후에 병이 다 나았다 하더라도 의사가 경과를 보고 “다 나았습니다”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의사의 완치 선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얼굴이 환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지금 그 사람에게 그처럼 축복의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뒷부분은 치유된 사람을 공연히 불안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 그 동안 그가 고생한 것이 죄 때문이었다는 해석을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바레트는 이 구절이 “신체적인 치유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의 처리”를 함축하고 있으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명령은 지금까지의 죄가 이미 다 처리되었음을 말 한다”고 해석합니다.
이는 옳습니다. 즉 의사가 “이제 깨끗이 나았어요. 앞으로는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세요” 라고 말했다면 그 말은 병이 다 나았다는 데 포인트가 있는 것이지, 지난날의 병은 당신이 무리해서 온 것이니 어쩌니 하는 복잡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뭘 어쩌겠어요. 이미 병이 다 나았는데 말입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에서도 예수는, 그 여자를 고발하고 죽이려고 끌고 온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과는 달리, 그 여자의 지난 행위를 불문하고, “가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에 번역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 새번역 등 대부분의 한글성경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식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가라”를 “가서”라고 번역함으로써 “가라”라는 명령이 갖는 독립적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뒤에 오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명령을 수식하는 부사구 정도로 격하해 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공동번역과 공동번역개정판 등에서는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라는 식으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본래 헬라어 성경의 의미를 잘 드러낸 것입니다. KJV, ASV, RSV, GNB, CEV 등 대부분의 영어번역본들도 이와 같은 식으로 “go, and do not sin agai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본래 이 구절은 “가라”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두 개의 명령문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문맥을 볼 때 후자보다는 전자 즉 “가라”라는 명령에 초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린 중풍병자 이야기에서도 예수의 치유 명령은 “일어나라, 네 자리를 걷어라, 그리고 집으로 가거라”(막 2:11)라는 세 개의 명령어가 복합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죄와 관련된 명령은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예수의 치유 명령은 죄를 강조하고 회개를 촉구한 다음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식이 아닙니다. 예수는 먼저 죄 문제로 왈가왈부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며, 사람을 마비되게 하고 수십 년 동안 자리에 눕게 하는 그런 도덕주의의 자리를 “걷어치우라”라고 하며, 자신의 과거의 잘못이나 죄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 8:11)라는 말은 이 구절의 요점이 아닐 뿐만 아니라 후대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아라이 사사구는,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구절이 요한 기자의 전문용어라는 점(5:14, 8:11)과 중풍병자 이야기에서는 이 구절이 기적 현장의 말이 아니라 사후 설명이라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후대 교회의 해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원래의 전승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에서 끝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가라”라고 하는 명령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는 명령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가 되는 겁니다. “가라”는 명령에 우선적이 강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는 말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 다음에 더 이상 죄 문제에 매이지 말라는, 부수적인 명령입니다. 죄의식, 정죄에 시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걸 떨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희망의 선언인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자 돌토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아가시오. 목표를 바라보고, 앞에 나 있는 길의 평평한 부분을 살펴보시오. 그래야 그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주의를 기울여서 길이 좋은 상태로 난 부분만 찾아낼 수 있다면, 당신은 움푹 패인 부분들을 피해 갈 수 있을 것입니다”(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 122). 돌토는,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질병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윤리화된 종교가 인간 존재 깊은 곳의 욕망을 억압하여 불어넣는 죄의식과, 그것에 대해 징벌하는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가 질병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 질병을 치유하여 주신 것은 바로 이런 왜곡된 종교적 정죄의 짐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큰 병에 걸리면 혹시 그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에게 큰 인기가 있다는 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얼추 그 내용이 이렇듯 인과응보 적입니다.
그러나 병은 죄에서 기인한다는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의 저급한 미신들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것이고, 유대교에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것을 깨뜨렸고 이것을 고수하려고 하는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는 늘 불운과 질병에 시달리던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고 조건 없이 병을 고쳐주는 분이라고 선포하였고, 자신이 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의 수많은 치유기적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어린 시절 겪은 아버지의 학대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해서 늘 괴로워하는 청년 윌에게 상담 치료사 숀은 여러 가지로 접근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숀은 윌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아주 강하고 또렷하게 말해줍니다. 한두 번 듣던 윌은 나중에는 그 말을 듣지 않으려고 거세게 저항하고 큰 소리를 지릅니다. 하지만 숀은 굴하지 않고 거듭해서 “네 잘못이 아니야!” 하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나중에 윌은 자기를 평생 억누르던 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끼면서 흐느끼면서 숀을 끌어안습니다. 윌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교육도 심리치료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학교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 사람을 믿지 못해서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하는 것 ...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상처가 있고 그 자신이 뭔가 잘못되어 있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못 된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상처도 그의 성격도 그의 잘못이 아니며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그것은 가장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가장 깨닫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윌이 그 모든 치료와 상담을 다 포기하고 오직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만 반복한 것은,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아무 말도 아무 탓도 하지 않고 그저 “일어나거라” “걸어가거라”“가거라!”했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영화 고지전의 신일용 대위(이제훈 역)가 겪는 죄의식도 같은 의미를 같습니다. 포항에서의 후퇴당시 작은 배에 타려고 하는 같은 중대원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전우를 학살 합니다. 그 일로 인해 어린 일용이는 죄의식에 괴로워합니다. 그런 그를 악어중대원들은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냐. 너는 전우를 사살한 게 아니라 우리를 살렸어.” 이것이 일용에게 희망이 되어 끝까지 전우를 위해서 전선을 사수하다가 죽어갑니다. 일용이가 과거의 죄의식에 붙들려 있었다면 그는 폐인이 되어서 사라졌을 것이지만, ‘앞으로 가라’는 중대원들의 응원에 힘입어 나날이 용감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일용이에게 복음은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선언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병들어서 마음으로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에게, 그들이 어떤 잘못을 해서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해서 말해 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으며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괜찮아”“앞으로 가”하는 우렁찬 예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합니다.
요즘 제가 읽고 읽는 책,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에서 돌트라는 정신분석학자는 말합니다. “신앙이란 본래 무엇인가 감행하고, 위험을 무릎 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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