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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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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1.9.14 주일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요한이 이해하는 예수
요10:1-16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수없이 예수를 설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고 설교하는 예수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경험과 관점이 다르고 추구하는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이런 다양성을 나쁘게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본시 다양성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조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다양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해석들이 각자의 가치관과 상황 속에서 충돌하는 경우가 있지요. 목사와 성도 간에, 교회와 교회 간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면 갈등하고 생명을 해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원형적인 그리스도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원형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서입니다.
성서, 즉 성서의 기록자들은 어떻게 예수를 이해하고 받아 들였으며, 삶과 신앙에 적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각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각각으로 신앙을 완성해 가야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앙인들은 ‘원형적인 예수의 이해’도, ‘다양한 신앙생활을 통한 완성도’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원형적인 예수의 이해가 제 각각 이고, 신앙 삶은 다양하기 보다는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나와 같이 고백하지 않고, 나와 같은 방식으로 믿지 않으면 틀렸다고 정죄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서가 말하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어떤 분인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원형적인 예수의 이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는 ‘목자’입니다. 요한 또는 요한의 신앙 공동체가 기준으로 삼는 원칙으로서의 예수상은 혁명가, 기적의 유발자, 병 고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이 말은, 종교적인 위엄을 가진 숭배 대상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자’는 숭배의 대상이기 보다는 되레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가벼운 사회적 존재입니다. 이게 요한의 신앙 공동체가 보는 예수입니다. 그들은 ‘목자로서의 예수’를 믿고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죠.
시편 기자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 하신다”고 노래합니다(23:1-2). 여기서 우리는 목자의 인도를 받는 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죠. 공관복음서에서도 예수를 목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 자신이 잃은 양의 비유를 들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양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목자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 양을 뒤에 두고 찾아 나서며, 찾으면 기뻐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베푸는 목자입니다. 마치 우리 동네 어떤 인자하고 마음씨 고운 아저씨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예수는, 집도 직업도 없이 떠도는 갈릴리의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하게 여겼으며, 그들을 영접하여 기쁨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하신 일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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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목자 중에서도 ‘선한 목자’로 믿고 있습니다. ‘선한’(kalos)이라는 말은 ‘좋은’, ‘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미 그 당시에, 겉만 번드레한 거짓 목자들이 많이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점차 제도화되고 직업화되어 가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요한 기자는 그들을 도둑, 강도, 또는 삯꾼이라고 부르면서 선한 목자와 대조를 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는 그들은 선한 목자와 구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구별하는 기준을 몇 가지 제시합니다.
먼저,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준다는 것입니다. 양들은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따라간다고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이 친밀한 관계는 목자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이 또한 있어야 합니다. 요한 기자는 자신이 속한 요한 공동체가 바로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한 기자는 어찌하여 이렇게 목자의 목소리를 강조하는 것입니까? 선한 목자와 대조를 이루는 도둑이나 강도는, 예수께서 육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이거나, 바리새파와 같은 유대주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 기자는, 이미 제도화되어가고 굳어져가고 있던 초기 공교회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제도화되면 될수록, 그 안에서는 교리, 의식, 위계질서 같은 것이 중요하게 되고, 개인이 예수를 친밀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에게나 가능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고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예수에 관한 교리 같은 것이 더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비교적 소규모 공동체인 요한 공동체는, 밖으로는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안으로는 제도화된 공교회로부터 소외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요한 기자는, 아무리 거짓 메시아들이 판을 쳐도 자신들은 절대로 속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목자를 겉모습만 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또 아무리 기성의 공교회가 화려한 모습을 갖추어도 선한 목자는 바로 자신들의 작은 공동체에 현존하심을 확신했습니다. 공교회에서는 목자의 목소리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들을 수도 없지만, 자신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만큼 목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전에 비해 건물이나 시설이 더 좋아졌습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이전보다 더 깔끔하고 세련되어졌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 거의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교회에 다녀옵니다. 세련되었다는 것은 매우 형식적이 되었다는 것과도 같죠. 이런 생활은 신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편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신자들이 예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 나를 불러주는 목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오늘날 교회에서는 모방이 유행합니다. 건물 모양도, 목회자의 목소리도, 찬양하는 방식도, 잘 되는 교회, 성공하는 교회에서 배워서 따라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예배는 화려하고 요란하지만, 우리의 영의 감수성을 일깨워주고, 목자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는 진정한 예배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것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큰 교회에서 신자들은 하나의 집단이 될 뿐 개별성을 갖기 어렵습니다. 거기서 어떻게 신자들이 자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목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늘 집단 속에서 익명성을 즐기다가, 축도 끝나고 나서 음악이 흐르는 동안에 바쁘게 몇 마디 속으로 기도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지요. 이러면 안 됩니다. 예수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요한 공동체처럼,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아는 그런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는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고 합니다. 우린 ‘문’ 하면 높은 대문이나 자물쇠와 보조키가 있는 철문, 아니면 시험에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는 회사나 학교 정문 같은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와는 전혀 다른 문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문이라고 합니다. 이는 목자가 양을 치는 풍속을 보면 알 수 있는 말입니다. 목자는 평소에는 일반 우리에 양들을 두지만, 따뜻한 계절에는 양들을 끌고 동리에까지 들어오지 않고 들에 약식 노천 우리를 만듭니다. 울타리를 간단히 둘렀기 때문에 문이 따로 없고 양의 출입구에 목자 자신이 앉아서 문 노릇을 합니다. 그러면 양들은 그 목자를 문 삼아 드나듭니다. 선한 목자는 바로 이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솟을대문도 철문도 아니요 양들이 드나들고 때로 등을 비비기도 하는 그런 문입니다. 이미 기성의 공교회에서 예수의 상이 엄숙해지고 굳어져가고 있을 때, 요한 기자는 선한 목자는 그보다 훨씬 더 친근한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가서 만나고 마는 어떤 분이 아니라, 매일 드나드는 문과 같이 늘 일상의 삶 속에서 만나고 의지할 수 있는 친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으로 만나고 볼 수 있는 ‘목자’상을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만나야 하고, 예수님의 음성은 항상 들어야 합니다.
끝으로, 삯꾼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칩니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의 수난을 언급하는 것이죠.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수난을 부정하였습니다. 유대주의자들도 십자가의 수난을 수치스런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내세운 메시아 상은 수난 받지 않는 메시아 상입니다. 그들은 양들을 위해 자신들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한 마리 잃은 양을 끝까지 찾는 예수, 무리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는 선한 목자 예수는 그 일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삯꾼은 목자인 척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따라할 수도 흉내를 낼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선한 목자의 목소리를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는 뭐 대단한 종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일상에서 소소하고 작은 일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로 보면 볼품없는 ‘목자’에 비유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요한에게 예수는 누구인가를 명백히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뭐 거창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초라하기까지 하지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자로서의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요한은 이런 예수를 전하는 것일까요? 요한의 교회를 빼고 대부분의 교회가 예수를 우상화하는 단계로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높은 사람 낮은 사람이 생기고, 예수를 통해 이득을 취하는 무리들과 수탈을 당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걸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볼품없는 들판의 목자이다. 이런 예수를 믿는 것만이 진정한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런 예수를 믿을 때, 인생들의 삶이 평안하고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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