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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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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08-02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2008년 온가족 여름 수련회 GBS 교역자 교육 (08. 08. 02)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인간의 의무
I.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성
1. 인성과 신성의 결합
2. 영혼의 탁월성
A. 지성
B. 능력
C. 사랑
3. 성육신하신 목적: 창조 목적의 회복
4. 성육신하신 이유
A. 죽으시기 위함
B. 모본을 보이심
II. 성육신, 구원의 지혜와 능력
1.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A. 창조에서
B. 구원에서
2. 성육신, 인성과 신성의 만남
A. 영광과 겸비
B. 위엄과 온유
C. 통치와 섬김
D. 자족과 의존
3. 구원의 근거가 되심
A. 용서를 통한 속전
B. 생명과 사랑의 전달
III. 교회의 모든 필요의 유일한 보고이신 그리스도
1. 창조와 신적 상호교통
2. 구속과 신적 상호교통
A. 구속의 목적
B. 그리스도, 교회의 모든 필요의 유일한 보고
C. 성령을 통해 생명과 사랑을 주심
3. 그리스도로 충만케 됨
IV.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1. 창조, 처음 머리되심
A. 창조의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
B. 한 몸으로 창조된 세계
2. 구속, 교회의 머리되심
A. 인간의 타락과 상호 교통의 단절
B. 타락한 세계를 보호하심
C.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심
3. 완성, 다시 머리되심
A. 구속의 완성을 통한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
B. 창조의 영광을 회복함
4. 영원, 영광의 무한한 증진
A. 증진하는 영광
B.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교통하심
5. 영원을 소망하는 성도의 삶
들어가면서
며칠 전 상한 병어와 갈치를 요리하여 먹은 까닭에 식중독으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저는 몇 가지를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목회와 말씀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는 양들을 덜 먹여서 문제이고, 또 하나는 잘못 먹여서 문제입니다. 안 먹이면 피골이 상접하여 움직이지 못하니 문제이고, 잘못 먹이면 병이 들어 고생하게 되니 모두 잘못된 경우입니다. 이 둘은 반드시 그 결과가 드러납니다. 진리의 말씀을 아무리 올바르게 가르쳐 주어도 영혼에 성령의 빛이 비치지 않아서 흐리멍덩하게 이해할 때에는 잘 가르쳐 준 효과가 별로 없지만, 성령의 강한 빛이 역사하면 한 순간에 들어온 그 진리가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잘못된 신앙의 토대를 한 번에 무너뜨리고 거기에 복음이 세워지게 합니다. 자기만의 개똥철학으로 살아온 것은 삼사십년인데, 복음진리는 단 한순간에 그것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일으킵니다. 나아가 상한 생선처럼 그릇된 교훈으로 가르침을 받는다면 말씀의 식동독 효과는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인간 본성 안에도 어느 한순간 번쩍이듯 들어와 그것을 붙들게 만드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본성적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득도(得道)’라고 합니다(성화와 헌신 中 본성적 자기 깨어짐과 신령한 자기 깨어짐을 참고할 것). 진리가 아닌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번 먹은 그것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출가하여 불도에 귀의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지성의 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본성에 의한 깨달음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지배하였기에 거기에서 사로잡힌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사람이 한 순간에 종교를 바꾸고, 진리도 아닌 어떤 종류의 종교에 자신의 생명도 바칠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쏟아지는 수많은 사상서들은 이런 것들을 추구하나 번뜩이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책은 많지는 않습니다. 만약 모든 책들이 매순간 이런 영향력을 미친다면 이는 온 인류에게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무언가 커다란 업적을 이룬 사람들, 불굴의 강한 지속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은 모두 이런 종류의 어떤 종교적 본성의 빛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 교리를 풀어서 양들에게 먹일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라
탁월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탁월성을 인식하는 주체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필연적으로 피조세계와 연관이 됩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세 위의 영광과 불변함과 탁월성은 모두 동등합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삼위 안에서도 탁월하시나 각 위들 사이의 영광스러움은 동등하니 이는 피조세계와 관련시켜 언급되는 것이 더 적절하다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필연적으로 이 탁월성을 인식하는 주체들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인식 주체는 바로 천상에 있는 천사와 지상에 있는 인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이전에도 탁월하신 삼위셨으나 인간이나 천사들에게 그 탁월성이 인식되는 것은 시공간 세계가 도입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도성 인신하여 시공간 속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큼 확실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도성 인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와 성령의 탁월하심을 말해 줍니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은 시공간을 통해서 인간과 천사에게 인식 됩니다(천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천상에 계실 때 그들이 성자를 대할 때보다 이 땅에 오신 성자를 대할 때 그분에 대한 지식이 더욱 더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지만 육신을 입으심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피조물로 보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모든 사람이 사람을 입은 모습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은 결코 피조물이 아니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와 동일하게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인간의 육체는 썩어서 소멸하여 땅으로 돌아가고 그 영혼은 하나님께로 가지만, 그리스도의 육체는 이후에 인간의 육체가 누리게 될 영광을 위해 땅에 묻히지 않으시고 영광스럽게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만 차이가 있습니다. 그분이 참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영혼 속에서도 확연하게 특징이 드러나지만 그 몸이 완전하고 순수한 사람의 몸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래서 배고픔, 추위, 고통과 같은 것에 종속되셨던 것이다.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 자체가 그분의 겸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치 왕이 잠행할 때 왕의 곤룡포를 입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상민의 옷을 입고 나가듯 하나님이신 그분이 미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3. 피조세계(천상/지상)에 대해 탁월하신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천상에는 천사를, 지상에는 인간을 두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지상과 천상 모두를 아우르는 두 세계 모두에 있어서 탁월하십니다. 그리스도 탁월하심은 그 탁월하심 통해 삼위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보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상과 천상의 모든 세계에서 피조물을 아우른다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그리스도를 머리가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창조에 있어서도, 구속에 있어서도, 또 완성에 있어서도 그분은 머리가 되십니다. 창조는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성령 하나님 안에서, 성자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by God father, in Holy Spirit, through Christ). 그리스도는 창조에 있어서도 구속에 있어서도 중보가 되시는데, 둘은 구별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구속의 중보란, 구속의 주체되시는 하나님이 구속의 대상인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중보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시나 여전히 용서의 주체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달리, 창조에서의 중보는 이런 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가 중보 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희생하여 그분을 도구로만 삼아 성부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성부께서는 계획(design)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실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창조 세계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구속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머리 삼으셨으며, 그분께 만물이 다 연결되어 붙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는 하나 된 천상과 지상세계에 대한 통치자를 삼으심으로써 다시 머리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이 두 세계 안에서의 탁월성입니다. 이를 전제하고 본 교재를 살펴봅시다. 특별히 이 교재는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탁월성만을 다룹니다.
4.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생각하라
탁월성은 영광과 같은 개념이고 미, 선, 진의 개념과도 통합니다. 탁월하다는 것은 특별히 존재론적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탁월하다는 것은 영광을 말합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똑같은데 뭔가를 더 소유함으로써 다른 것보다 더 돋보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피조물은 아니지만 피조 된 육체를 입고 사람으로 계실 때는 피조물처럼 보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인간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분은 피조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인간 중에서 좀 뛰어난 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탁월함은 단순한 이성의 눈이 아닌 신앙의 눈이 필요합니다.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탁월성을 신앙의 눈으로는 단번에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성은 자연적 탁월성이 아니라 신령한 탁월성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것들은 신령한 감각(new sense)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의 핵심은 육체에서 찾기 보다는 영혼에서 찾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경우에는 인성만 가지고 있지만 그리스도는 신성을 아울러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지성과 의지와 정서와 같은 탁월하신 그분의 영혼의 작용이 이를 증거 합니다. 강력한 진리를 선포하시고 놀라운 능력과 사랑을 베푸신 그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안 후에는 이성으로 계속 추론해서 그분의 영광이 어떠한가를 알고 여기에 부합하는 의무를 찾아 행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인 것입니다. 이것이 본 교재를 공부하는 목적이며 핵심입니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 1: 그리스도의 창조의 중보와 구속 중보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
두 중보의 위치는 우월성이라는 의미로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창조의 중보보다 구속의 중보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체성이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8).구속의 중보에 있어서 주체는 성부이시지만 그리스도가 자원하여 이 구속사역에 참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질문 2: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을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그것 의 완성은 마지막 날에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맞는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미 다시 머리되셨지만, 이 세상이 실제적으로 아직 연합되지 않았기에 시간 속에서 이를 성취해 나가는 것이 구원과정과 동일하게 보면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것은 시간의 전개에 따라 성취되어가는 것이지만,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이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되심도 already, but not yet 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머리를 삼으셨으나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가는 몸이다.
질문 3: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마귀의 외침과는 달리 늘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제자들은 왜 이런 고백을 하지 못했는가?
마귀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기보다는 자신들을 심판할 그분의 우월한 특징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영적 존재들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질문 4: 그리스도의 몸 안에 창조 세계가 들어갈 수 있나?
오웬의 설명을 참고로 들겠다. 오웬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①유기체적 생명, 또 하나는 ②유기체적 통치이다. 먼저, 유기체적 생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의 의미를 살펴보자.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고 거기에 교회의 지체들이 연합되는데 이를 유기체적 생명의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가 이뤄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이를 보고 하나님 자신이 이 속에 흐른다고 보면 안 된다. 생명적 교통이 이뤄지는 것이다. ‘교회의 필요한 모든 자원의 보고로서의 그리스도’라는 장에도 기술되고 있듯 창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 한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이를 위탁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성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생명적 교통을 통해 주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혜, 사랑, 용서와 같은 영적/정신적 특성들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양심 가책에 찔려 괴로워하는 이들, 용서받지 못하여 고통하는 자들을 용서해주시는 것은 물질의 확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유하시는 은총을 어느 한순간에 주셔서 그것을 확신케 하시고 다시 은혜를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이뤄진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하는 이의 뜻에 맞게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통치하셔서 흩어졌던 사물들을 이 한 사람이 사용하기에 편하도록 배치시켜주시는 것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머리에 접붙여진 성도들 사이에 이런 유기체적 생명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런 교제가 바로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교제이다.
그렇다면 유기체적 통치의 의미는 무엇인가? 유기체적 생명의 연합이 불가견적 교회와 관련된다면 유기체적 통치는 가견적 교회와 관련이 된다. 유기체적 통치는 가견적 교회 안에서 법률을 가지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이다. 교회가 잘못된 자를 치리할 때에는 그 사람이 거듭난 자인가 아니냐는 상관없이 교회에 가입된 일원으로서 치리한다. 회심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가시적 교회의 회원의 자격을 갖고 그 유업에 참여할 뿐인 것이다. 여기서 바로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질서가 나온다. 그래서 오웬이나 칼빈은 유기체적 통치에 불복하는 인간은 유기체적 생명이 없는 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까지 논한다.
어느 정도 가톨릭의 정신을 이어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유기체적 통치에 불복하면 하나님과의 생명적 교제를 하지 못하도록 끊어버리는 권한까지 교회가 갖고 있다는 가톨릭의 입장과는 달리한다. 어째든 모든 가시적 교회 안에 있는 신자는 유기체적 존재로서 유기체적 통치 아래 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기서도 그리스도는 머리되신다. 머리라는 개념은 모든 지체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생명과 유기체적 질서를 잡아주는 근원이라는 점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생각하라.
그렇다면 이 세계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가는 것인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세계가 다시 머리되심에 들어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물질세계에 찾아온 고통이라는 것은 인간 타락으로 인한 단순한 결과이었듯, 다시 머리되심으로 구속이 완성될 때에 생명과 기쁨에 참여하는 것도 그것에 대한 단순한 결과로서 참여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라. 인간의 영혼 상태와 그것들이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나, 물질세계가 영혼을 가진 인간세계와 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깊은 교통을 누린다고, 나아가 물질과 인간이 구별이 없이 일체가 되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사용하라고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 둘의 밀접성을 너무나 크게 강조하게 되면 아주 위험한 사상에 빠지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와도 맞닥뜨리게 된다. 차후 설명하겠다. 완전한 구속의 성취가 이뤄지면 모든 것들에 대해 머리가 되어 주시나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누리는 영적 연합과 같은 것이 물질세계에도 있다고 생각지 말라. 물질세계와 도덕적 세계의 일치라는 스피노자, 헤겔과 같은 물활론의 도식이 나오게 된다. 요약하자면,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의 완전한 구속의 성취가 이뤄질 때에는 피조된 모든 세계는 회복하게 되고 창조 목적에 이바지하는 교통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영혼을 가진 인간세계에 해당되는 생명과 통치라는 개념을 물질세계까지는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질문 5: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를 요약해 주십시오.
개신교 스콜라주의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층차가 다양했다. 앞선 종교개혁자들이 견지했던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 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긴 하다. 이는 시대적 문맥을 고려해야 한다. 반면 찰지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신학의 원전이 된 사람인 프랜시스 튜레틴(Franscois Turretin, 1623-87), 아니면 B. B. 워필드나 하이데거(개혁신학자)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도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역시 시대적 문맥이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후기 신비주의(神我一致적인 주장)의 도전, 곧 만물 안에 신이 있다는 것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개신교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계몽주의와 이신론적 사상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을 마치 왕이 먼 나라에 있고 사신들을 보내어 식민 통치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진실한 통치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진정한 내재성의 강조점은 만물 안에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신 안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 하나 하나에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만물이 하나님 밖에 있다고 한다면 그분의 무한한 능력에 흠집을 내는 것이 되고 만물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물질 사이의 구별을 막는 것이 된다. 이것을 더듬어 가려면 너무나 많은 참고도서가 필요하다. 찰스 핫지, John Cooper(칼빈 신학교, 철학을 전공한 신학자, 철학적 신학을 가르치는 자)의『panentheism』(특히, the other God of philosophers와 panentheism from plato through christian neoplatonism 을 참고할 것)를 공부해 보라. 개혁신학에서 이야기하는 내재성이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범신론과 어떻게 다른지 추후 좀 더 알아보자.
질문 6: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하실 때에 하늘의 보좌는 비어 있었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 하늘에 제 2위는 비어있지 않다. 만약 그분이 위격을 취하셔서 오셨다고 한다면 삼위를 이탈하여 그 자리를 비우고 사람을 입고 오셨다는 말이 되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그리스도는 유다에 계실 때에는 갈릴리에 있을 수 없으셨다. 그렇다고 해서 갈릴리에 계셨기에 하늘에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이는 인성 아래 신적 본질을 감추신 것이다.
질문 7: 어떻게 이 교리를 깊이 묵상할 수 있을까?
“괴로운 이 세상 가는 동안~♩♬” 이 찬양을 초등학생이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다면 그 아이는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아이다. 하지만 목회의 쓰디 쓴 맛을 이미 맛본 사역자가 그렇게 한다면 이는 매우 정상적이다. 예전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내가 지금 그럴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나갈수록 자신 속에 쌓여가는 수많은 사상, 경험 등이 성경을 볼 때 그것을 이해하게 하는 차이를 가져다준다. - 물론 나이만 먹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성경 자체는 변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변해가고, 그때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르기에 그렇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빛을 받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받아들이는 내가 계속해서 변화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상에 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비교가 좋은 실례일 것이다. 동일하게 예수를 만나고 펴낸 신앙의 진술들이 층차를 가지게 된 이유인 것이다. 말씀은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깨닫는 것이나 그것들을 잘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자신 속의 있는 총체적인 이해의 틀을 확장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질문 8: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아닌 ‘결합’이라는 용어를 쓰신 이유?
연합이란 말을 쓰지 않는 이유는 신성과 인성이 섞인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어서이다. 신성과 인성은 잉크와 물이 섞인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공기 속의 빛이 섞인 것(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과 같다. 즉 신성의 본질이 인성의 본질을 해치지 않고, 인성의 본질이 신성의 본질을 해치지 않으면서 섞여 있는 것이다.
질문 9: 범신론(pantheism)과 범재신론(혹은 내재신론, panentheism)의 차이는?
범신론이란, 우주를 하나의 전체로 보고 그것을 신으로 보는 교리이다. 즉 신이란 없고 그 대신 현존하는 우주 안에 나타나 있는 실재·힘·이법(理法)들의 총합이 있을 뿐이라는 교리이다. 이와 유사한 교리인 범재신론은 신이 비록 자기 존재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일부에 해당하는 우주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범재신론은 신과 우주를 동일시하는 내재적인 범신론과도 다르고, 초월적인 유신론과도 다르다. 범신론은 세계 안에서의 사물의 다양성을 무시한다. 그 다양성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범재신론은 다양성을 인정한다. 다양성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 안에 일자가 침투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전자는 윤회설처럼 모든 사물이 다 똑같다고 보는 것이나 후자는 하나의 신이 그 안에 있음으로써 그것들을 교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범신론의 강조점은 일자에서 다양성 쪽으로 전개되어 가고, 범재신론은 다양성에서 일자 쪽으로 전개되어 간다고 볼 수 있겠다.
질문 10: 목사님의 저서 ‘만물의 상호교통’의 내용과 범재신론과 혼동하지 않으려면?
‘만물의 상호교통’에서의 논한 하나님의 내재성은 이렇게 이해하라. 기존 범재신론은 만물 자체가 일자를 나누어가지기에 그것들이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하지만 성경적인 내재성은 만물은 어떤 식으로든지 초월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만약 초월성의 성격을 띈 뭔가를 - 예, 영혼의 불멸성 - 가지고 있다면 이것들은 만물 안에 있는 일자의 특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의지(will)라고 본다. 하나님의 의지로써 인간 영혼이 불멸하도록 지정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뚜렷히 구별된다. 또 다른 하나는, 전자는 신이 물질화되었다고 보지만 후자는 이 모든 사물들이 신의 일부라는 뜻도 아니고 모든 것들이 신 안에 있어서 신이 가지고 있는 신성으로서의 질이 개개 사물 안에 침투했다는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 주권, 영향 등을 모든 사물들이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사물의 질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증거이고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내재성을 하나님의 존재의 질이 그 속에 침투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피조하신 물질들(인간 영혼포함)과 하나님 자신이 서로 질화를 이루면서 혼연일치가 되어 어떤 존재가 되어간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에드워즈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부주의한 면이 있다. 하지만 당대 이신론에 대해 하나님의 내재성 교리를 수호하고자 하는 그의 열심히 있었기에 그리 비춰질 수도 있다. 18세기 유럽 대륙을 강타했던 사상은 하나님은 법칙만 창조하셨고 하늘로 퇴각하셔서 모든 것은 법칙대로 움직인다고 주장하는 이신론이다. 그 법칙은 하나님께서 불변하게 만드셨기에 인간이 그 법칙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면 그것은 판명하고 명백한 법칙으로 인정할 수 있으며,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창조할 때의 하나님은 이야기하나,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법칙대로 저절로 굴러간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반문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홀로 굴러가게 하는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당대 사람들은 법칙이라고 보았으나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동떨어진 사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매순간 그것을 창조하시는 것이라 보았다. 물론 이런 설명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창조된 것들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이런 용어로 설명한 것 같다. 만물은 법칙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법칙이 하나님의 일관된 힘인 것이다. 이신론 시대에 외롭게 싸웠던 그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강조할 것은 이것이다. ‘만물 속에 신이 있다’가 아니라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질문 11: 하나님의 내재성과 편재성과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편재성은 무변성과도 같은 말인데, 시공간이 개입되면 이 무변성은 편재성으로도 언급될 수 있다. 즉 편재성은 시공간이 생겨야 인식될 수 있는 개념이다. 에드워즈만큼 하나님의 초월성을 헌신적으로 주장한 자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내재성도 동시에 얘기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이 둘의 공격을 동시에 받고 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이신론과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겠다는 신비주의…. 이 둘은 올바르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질문 12: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나님 없이도 그분 스스로 능력 행함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성령과 구분하여 그렇게 언급할 수 있을까?
인간의 능력 행함은 성령의 힘이나, 예수님의 능력 행함은 그분이 가지고 계신 신성의 힘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성령을 의존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성령을 의지해서 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간 순간 성령을 의지하시는 것은 그분의 인성 아래 신성을 감추셨기 때문이다. 하실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선택하신 것이란 말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이러한 예는 너무나 많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세례 받으실 때에 아들이라 인정받으셨으나, 광야에서 성령을 받고나서야 사역을 시작하신다. 이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필연성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신성을 인성 아래 감추시고 모든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앞으로 행할 본을 보이신 것이다.
질문 13: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담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더 많이 깨닫게 되었다. 에드워즈의 설교 가운데 “구원의 방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The Wisdom of God displayed in the way of Salvation” 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이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때에도 그리스도는 아담의 머리였고, 지금도 우리의 머리이시지만 연합의 정도는 비교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 분과의 연합 안에서 우리가 결코 범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절절하게, 매일매일 공급해주시는 은혜와 자비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melting heart, 구속받은 자만이 아는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알았다. 사도 바울도 죄가 들어온 것에 대해, 죄 자체 때문이 아닌 그것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높이 찬양한다.
결론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에 엎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위대함이 나와 관계한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아들을 보내시고 비천하게 낮아지신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엎드려질 수밖에 없다. 깊이 묵상해 보라. 깊이. 하나님의 심판과 당위성에 대한 설명을 실은 최근 책 “선하신 하나님 손에 붙들린 죄인들”도 참고하라.
지식에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지식과 유용지용(有用之用)의 지식이 있다. 전자는 쓸 데가 없는 지식, 후자는 쓸 데가 있는 지식이다. 하지만 후자는 소용(小用)이 되고 전자는 대용(大用)이 된다. 금방 써 먹을 수 있는 지식은 작은 가치가 있는 데에 비해 금방 써 먹을 수 없는 지식은 큰 가치가 있다. 존재란 무엇인가과 같은 형이상학적 담론들은 아무 데도 쓰일 데가 없으나 대용될 수 있는 중요한 지식이다. 전자를 쌓아가라. 2008-08-02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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