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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0-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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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2011년 2월 6일 설교 |
2011년 2월 6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11)
“내 안에 있는 두 사람”(Two Selves Within Me)
--요한복음 1:40-42
1.
우리 교회에서는 매 년 두 세 차례 영성 수양회를 가지는데, 첫 날 첫 시간에는 참석자들이 자기소개를 합니다. 자기소개를 하는 과정에 “당신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어 주십시오”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매 번 개명한 이야기를 털어 놓는 분들이 계십니다. 부모님이 지어 주신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중에 새 이름으로 바꾼 것입니다. 남성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라도 굳이 바꾸려 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여성들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낯 선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마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웃음을 참는 기색을 본다면 견디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문제입니다.
이와는 전혀 다른 동기로 개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작명가에게 찾아가 새로운 이름을 부탁합니다. 큰돈을 들여 개명했는데도 운수가 풀리지 않자, 세 번째로 개명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이름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의 고향인 충청도에서 70년대에 가장 인기 있던 남자 이름이 ‘종필’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가지면 출세할 운명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는 어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실은 사람이 이름을 만들지 이름이 사람을 만들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다짐으로 개명하기도 합니다. 제 고향 어른 중, 뇌출혈로 인해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에서 쫓겨나다 시피 퇴원한 후, 어느 기도원에 가서 기도와 요양으로 회복된 분이 계십니다. 그 사고를 당하기 전에는 믿지 않던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의 문턱에서 깨어난 그 어른은 고향에 돌아올 때 ‘진성’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의의 표현이었습니다.
성경에도 개명의 이야기가 여러 개 나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람과 사래 부부입니다. 히브리 이름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exalted father)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는 그와 계약을 맺으신 다음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이들의 아버지’(father of many)라는 뜻입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사래’였는데, 그 뜻은 ‘나의 공주’(my princess)입니다. 여자로서는 탐낼만한 이름입니다. 남편이 늘 이 이름으로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주십니다. ‘많은 이들의 어머니’(mother of many)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의 뜻 그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후에 많은 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통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육신적으로 그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조상이지만, 영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결국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 그것 보십시오. 이름이 운명을 지배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새 이름이 그들의 삶과 운명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통해 그들에게 부여하신 새로운 부름을 그들이 받아들이고 그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이름을 주시는 이유는 그 이름으로 운수대통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몰랐던 새로운 정체와 새로운 소명에 깨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브람은 자신의 이름대로 높아지기 위해서 분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 부자 되는 것, 더 많은 사람들 위에 올라서는 것, 더 유명해지는 것, 그래서 ‘존귀한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위해 인생을 투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래는 공주처럼 대접받고 누리며 사는 것에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을 위해 살던 아브람과 사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그들의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들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삶으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에도 개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을 따라 다니던 안드레가 선생인 세례 요한의 증언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는 요한의 증언대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거하시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낸 안드레는 아침이 밝아오자 형을 찾아갑니다. 41절에 “이 사람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서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인한 안드레는 날이 밝자 만사를 제쳐 두고 형을 찾아갔다는 뜻입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다는 사실을 혼자서만 마음에 품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첫 번째 대상으로 안드레는 형 시몬을 생각했습니다. 형 시몬도 역시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 시몬을 만나서 안드레는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소.”
시몬은 안드레의 말에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기다렸는데, 막상 그것이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잘 믿어지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동생을 믿기에 속는 셈치고 따라갔을 것입니다. 안드레에게 인도되어 온 시몬을 보시고 예수님은 반가이 맞으십니다. 그분은 시몬의 눈을 한 참 응시하십니다. 아마도, 시몬은 예수님이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살피는 것 같은 느낌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이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히브리 이름 ‘시몬’은 ‘듣다’ 혹은 ‘들려졌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이 아이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짓기도 하고, “너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뜻으로 그렇게 짓기도 합니다. 혹은 “너는 사람들 사이에 유명한 사람이 되어라.”는 뜻으로 그렇게 짓기도 합니다. 시몬의 아버지가 어떤 뜻으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좋은 뜻을 가진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만나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게바’는 ‘돌’ 혹은 ‘바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말로는 ‘베드로’가 됩니다. 우리 식으로 한다면 ‘돌쇠’ 혹은 ‘강석’쯤 될 것입니다. 촌스럽기로 따지면, 시몬보다는 게바라는 이름이 한 술 더 뜨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촌스러운 이름을 그에게 주신 까닭은 시몬을 새로운 정체와 소명에 깨어나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게바라는 이름을 주신 이유가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으로 가십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수양회를 가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3) 그러자 제자들이 앞 다투어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한 참을 듣고 계시던 예수님은 또 다른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16절) 이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답하십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17-18절)
여기서 예수님은 시몬에게 왜 게바 즉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는지를 밝히십니다. 그분은 시몬을 제자로 부르면서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게바 혹은 베드로, 즉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이 기초가 되어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듯, 베드로가 새로운 믿음의 조상이 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 소명으로 그를 불러내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시몬의 내면에는 그동안 존재했던 자아에 더하여 새로운 자아가 생겨났습니다. 그의 내면에 시몬과 게바가 함께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서 게바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부름은 시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부름입니다. 개명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모두에게 새 이름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이름을 가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고 과거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옛사람’과 ‘새사람’ 혹은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말로 구분했습니다. 시몬은 옛사람 즉 겉사람을 가리키고, 게바는 새사람 즉 속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서,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롬 6:3, 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고후 4:16)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 4:21-24)
이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실로 대단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높은 자존심을 가지고 살만한 충분한 조건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혈통으로 보나, 집안 배경으로 보나, 출신 지역으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누구 앞에서도 가슴을 내밀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그는 그 거대한 자아상을 버렸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어졌고, 그 속사람을 따라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경험을 통해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동안 내가 알았던 자아 곁에 또 다른 자아가 태어난다고.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안에도 두 자아 즉 시몬과 게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기 전에 우리는 시몬을 나로 알고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자아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몬이 아니라 게바가 진짜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게바로서 살아가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4.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게바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게바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옛사람 시몬의 습성은 좀처럼 살라지지 않았습니다. 때로 그는 과거의 생각과 믿음과 혈기와 주관에 이끌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복음서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라고 부르는 장면이 몇 군데 나옵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이 끝나갈 즈음,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누가 높은지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해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눅 22:31-32). 다가올 위기 앞에서 베드로가 시몬으로 행동할 것을 미리 아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호언장담을 합니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33절) 그는 게바로 살기를 원했지만, 그는 아직 그렇게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그분은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면서 마음을 준비하십니다. 그 때, 그분은 세 제자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한 후, 한적한 곳으로 홀로 가셔서 한 참을 기도하십니다. 얼마 후, 세 제자가 있는 곳으로 오니, 그들은 잠에 골아 떨어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느냐?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막 14:37-38) 자기가 모시는 스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잠에 빠져 있던 그 사람은 게바가 아니라 시몬이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 베드로는 고향으로 내려가 과거의 직업으로 돌아갑니다. 자신을 불러내어 게바가 되게 하신 그 분이 돌아가셨으니, 이제 게바의 꿈은 끝난 것입니다. 다시금, 시몬으로 돌아가 물고기나 잡아먹으며 살아갈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실망에 빠진 제자들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신 다음,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지금 베드로는 옛사람으로 돌아가 시몬으로 살고 있음을 예수께서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시몬과 게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살았습니다. 심지어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도 옛사람 시몬은 그에게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 사도가 베드로의 위선적인 행동에 대해 면박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던 베드로가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나타나자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것 때문입니다. 자신의 믿음대로 행동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행동하는 시몬을 바울이 책망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많은 이적을 행하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함으로 게바라는 새 이름에 걸 맞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가끔은 옛사람 시몬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내면에서 게바가 점점 커져갔을 것이고, 마침내는 게바로 살고 게바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복음을 위해 장렬한 순교를 당했습니다. 시몬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만났다면, 그리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 안에도 시몬과 게바가 동거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몬 그리고 그분의 성령으로 새로 지어진 게바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 시몬은 죽기를 거부하고 다시,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새사람 게바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기쁘지만, 또 때로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시몬으로 돌아가 말하고 행동하고 싶어집니다.
시몬과 게바가 서로 끄는 힘이 너무도 강하여 때로 그 사이에 끼인 우리는 찢길 듯이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게바의 편을 택하면 좋겠지만, 때로는 번번이 시몬의 편을 택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무력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낙심합니다. 아직도 옛 사람의 사고방식과 말 습관 그리고 행동 방식을 버리지 못한 것을 자각할 때마다 자신이 딱해 보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주님을 직접 만나 사귄 사람입니다. 그분의 수제자로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직접 새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의 강력한 체험도 했습니다. 수많은 이적을 행했고, 수많은 이들이 그의 설교에 감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만하면 그는 100% 게바가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시몬과 함께 살았습니다. 다만, 성령의 충만함을 힘 입었던 그는 가끔 시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지만, 더 많은 시간 동안 게바로 살았습니다. 그의 믿음이 커갈수록 게바가 더 자라갔습니다. 게바로 행동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옛사람이 완전히 죽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비현실적인 목표입니다. 대신, 옛사람이 새사람에 의해 길들여지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목표로 삼으십시다. 때로 옛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다. 주님께서도 베드로가 시몬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시고 책망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깊이 아파하시며 그 모습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실패하고 낙심하고 두려워 떠는 베드로에게 “시몬아!”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얼마나 부드럽게 들립니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시몬의 모습으로 뒷걸음질 칠 때에도 같은 음성으로 불러 주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그런 거려니!”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속에서 자꾸만 고개를 내미는 시몬을 다독거리면서, 게바가 자라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말씀과 성령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써 성령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게바는 무럭무럭 자랄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장성하고 강건해지면, 우리는 시몬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게바로 살아가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낄 것입니다.
6.
때로, 그렇게 탄식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한 지가 벌써 몇 해인데, 아직도 구습을 버리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고 살아갑니다. 내가 보아도 내 모습이 싫습니다.”
그렇게 느끼고 인정하시는 것만도 큰 진보입니다. 철저히 이기적으로 살면서도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까맣게 모르고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셨던 그 부드러운 음성으로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시몬아!”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시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속사람을 자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자라나면, 어느 사이에 우리가 혐오하는 구습이 상처의 딱지가 떨어져 나가듯이 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속사람 게바가 성장해 나갈 때, 우리의 가치관도 바뀌고, 인생관도 바뀌며, 삶의 목적도 달라지고, 살아가는 방법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 때 경험하는 자유의 맛이 얼마나 대단한지요! 그 때 경험하는 삶의 보람이 얼마나 뿌듯한지요! 그 때, 우리는 “내 안에 천국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내 안에 영생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옛사람 시몬으로만 살아가지고는 결코 맛보지 못할 삶의 신비입니다. 이 신비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시몬을 불러 게바가 되게 하신 주님,
저희에게도 같은 부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를 붙드시고 인도하소서.
옛사람 시몬이 고개를 들 때마다
잘 다독거려 길들이게 하시고,
새사람 게바가 저희 속에서 자라도록
말씀과 성령을 늘 먹고 마시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새사람으로 사는 환희를
늘 맛보고 살게 하시며,
저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1년 2월 6일 설교 “강림절과 주현절을 위한 연속설교 <내 곁에 온 하늘>”(11)
“내 안에 있는 두 사람”(Two Selves Within Me)
--요한복음 1:40-42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208장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1:40-42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새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한 가지씩만 나누어 보십시오.
2) 당신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어 주십시오.
3) 당신은 당신 내면에 있는 두 자아를 느끼십니까? 요즈음 당신은 시몬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게바로 살고 있습니까?
4) 당신의 속사람 게바가 성장하기 위해 당신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5. 중보기도
1) 당신의 속사람의 성장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 이집트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6.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93장
7. 광고 후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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