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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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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하나님에게는 대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
이철환 씨가 쓴 ‘아버지의 우산’이란 글이 있다. 저자의 아버지는 고물장사였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를 매우 창피하게 여겼다. 아버지는 고물장사를 해 조금 돈을 모아 식당을 차렸다가 실패했다. 다시 부모님이 함께 우유 배달을 했는데, 아버지가 우유 배달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어느 날,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시험공부를 하는데 지붕에서 물이 새 짜증나서 도저히 공부할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깁스를 한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 1시간이 넘게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되어 골목길을 뒤지다 허탕치고 귀가하는데 지붕 위에 시커먼 물체가 보였다. 알고 보니 아버지가 지붕 위에서 우산을 들고 있었다. 그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힘이 난다고 한다.
사랑은 조용히 행동하는 것이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조용히 나를 후원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물이 나를 향해 촘촘히 쳐 있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사람에겐 희망과 대책이 없어도 하나님에겐 희망과 대책이 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요란한 큰 소리’는 없지만 조용한 중에 곳곳에 펼쳐진 주님의 사랑의 그물은 빈틈이 없다. 주님의 어느 행동, 어느 말씀을 봐도 제자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을 읽을 수 있다.
< 용서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
베드로가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고 딴청하며 잡은 고기를 다 세자 큰 고기가 153마리였다(요 21:11). 그 일이 끝나자 이제 더 이상 딴청 부릴 것이 없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그들은 베드로가 고기를 셀 때 숯불에서 불을 쬐거나 옷을 말리는 척 했을 것이다. 그런 어색한 상황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본문 12절을 보라.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얼마나 다정다감하신 말씀인가? 그 한 마디 말씀에는 제자들을 향한 사랑과 용서와 위로가 다 들어 있었다. 경상도 말로 하면 “밥 묵자!”라는 말인데, 그 무뚝뚝한 말에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용납한다.”는 뜻이 있다.
함께 식사하는 모습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식사가 없으면 왠지 인간관계도 깊어지지 않는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에는 “당신과 친하고 싶다. 당신을 좋아한다. 당신을 용납한다.”는 뜻이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 먹어!”라고 하신 것은 “너희들을 여전히 사랑한다. 너희들 잘못을 다 용서했다.”는 뜻이다.
용서를 주고받으라. 정의와 공평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람은 대개 용서를 잘 못한다. 용서 자체가 너무 불공평한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원래 사리에 맞지 않다. 사리를 따지면 용서할 수 없다. 용서는 이해도 아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은 진짜 용서가 아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을 용납하고, 큰 어려움과 실망을 시킨 사람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용서이다.
주님은 그렇게 용서하셨다. 사람들은 용서를 못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었고, 은혜의 연료가 바닥났다는 증거이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은혜가 없다는 말도 되고, 앞으로 받을 은혜가 없다는 말도 된다. 불행한 일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불행의 열매는 고스란히 내게 돌아온다.
용서는 본능적으로 힘들지만 하나님의 큰 용서를 생각하면 용서할 수 있다. 하나님이 지옥의 자식을 천국의 자녀로 삼아주신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용서가 힘든 것만은 아니다. 온전한 믿음은 불가능한 용서도 가능하게 만든다. 용서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행복과 평안은 용서하는 사람의 것이다. 용서의 영성이 흐를 때 사람은 가장 활력과 희망이 넘치고 가장 사는 맛이 나게 된다. 그 사실을 아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 먹어!”라고 말씀하시며 용서의 자리로 초청하셨다.
< 하나님에게는 대책이 있다 >
주님의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말씀에는 주님께서 사명 주실 때 먼저 내면을 채워주시려는 주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그 마음이 참 목자의 마음이다. 참 목자의 1차적 관심은 ‘먹을 것을 주는 것’에 있어야 한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는 대접만 받아야 되는 줄 안다. 그러나 목회자도 내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내는 재미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다. 마이너스 통장 생활을 해도 낼 때는 내는 것이 아름답다.
나는 1984년도에 신앙이 깊어지면서 내가 가진 돈을 대부분 교회를 위해 쓰고 교회 식구들을 대접하는데 썼다. 그때 내는 재미를 알았다. 목회자가 된 후에는 대접을 많이 받는 편인데, 그래도 여전히 내가 대접하는 경우도 많다. 내는 즐거움처럼 기쁜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그 즐거움을 스스로 박탈하지 말아야 한다. ‘대접받는 기쁨’도 크지만 ‘대접하는 기쁨’은 더 크다. 사실 남을 먹이고 대접할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목회의 제일 초점은 “어떻게 하면 성도를 잘 먹일까?”에 있어야 한다. 잘 먹이고 나서 사명을 주어야 한다. 요한복음 21장 15절을 보면 주님이 제자들에게 사명을 일깨우실 때에도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하셨다.
사명을 위해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 먹는 것이다. 요새 성도들이 참 고생한다. 요새 목사 노릇 하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성도 노릇하기가 더 힘들다. 세상에서 6일간 열심히 일하다 주일에는 교회에 와서 일한다. 그리고 대가를 조금도 바라지 않고 헌금까지 하면서 일한다. 그런 헌신적인 분들을 보면 자연히 “어떻게 하면 잘 먹일까?”하는 것에 제일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성공학에서는 사명을 잘 맡기는 목회자의 리더십(leadership)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은 목회자의 밥 짓는 마더십(mothership)을 더 중시한다. 사명만 강조해서 생긴 사명은 대개 가짜 사명이다. 밥 잘 먹고 그 사랑의 식사에 감격해서 생기는 사명이 진짜 사명이다. 세상적인 성공 리더십은 일을 조직적으로 잘 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많지만 교회는 밥 잘 먹이는 일에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한다. 밥을 잘 먹고 영혼이 풍성하게 될 때 사명의 열매도 많이 맺힌다.
결국 갈릴리 바닷가 아침의 비치파티는 제자들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 받은 시은소(施恩所)였다. 그 파티에서 제자들은 허기진 배도 채웠지만 무엇보다 허기진 마음을 채웠다. 예수님의 제일 관심은 은혜 주는 것에 있다. 그 은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부족함을 채운다. 주님은 나의 사소한 고민까지 아시고, 나의 소리 없는 신음까지 살피신다.
주님은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크게 마음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대책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다 대책이 있다. 내가 한숨을 쉬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향한 찬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할 수 있다.
환경의 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소리도 참고할 필요는 있지만 그것도 아주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훌륭한 분의 소리는 잘 들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양심의 소리이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면 의로운 것이고, 하나님께서 희망이 있다고 하면 희망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대책이 있다고 하면 대책이 있는 것이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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