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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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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8.6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초기 기독교의 ‘삐딱이들’ 6
요4:3-6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성령의 이해인 ‘보혜사 성령/파라클레토스’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것은 예수 사후에 보혜사 성령이 개개인을 지도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이것은 제도화되어 가는 교회의 직제가 주는 부정적인 면에 대한 거부감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혜사 성령에 대한 이해는, 교리적이고 제도적으로 변해버린 기독교 현실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다시,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 가운데서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장면 하나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4:1-42절의, 이른바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엔 나오지 않는데도 많은 사람들의 신앙 속에 회자 되는 것은 그만큼 줄거리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여행했다는 정보는 그 자체가 스캔들입니다. 모름지기 유대인다우려면 하지 말아야 할 게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마리아지역을 얼씬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라면 어릴 적부터 회당에서 들어온 상식중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갈등이 유대인과 사마리안 인들 사이에 생기게 된 것일까요?
BC53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의 귀족들 4800명이 되돌아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가 펴는 식민지화해정책의 일환 때문이었습니다(수요 강좌 21번에서 다루고 있습니다).그런데 사마리아에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수도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이 온갖 학대(짐승처럼 취급을 받는)를 무릎 쓰고 50여년을 버티며 야훼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두 세력, 바벨론에서 돌아온 지도층 세력과 사마리아에서 살아남은 토착세력들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잠시 이 두 그룹은 결혼을 통해 화해를 시도했지만, 느헤미아와 에스라의 고강도 배타주의가 주도되었습니다. 정치적인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레스의 녹을 먹는 이들로서는 둘 중 누구하나가 말을 잘 들으면 되는 것이지, 이 둘이 서로 힘을 합해서 새로운 견제 세력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정치적인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하찮은 문제들로 인해서 시작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은 예수시대에 이르기까지 500여 년에 걸쳐 더욱 골이 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갈릴리와 유대 지방의 지리적인 입지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갈릴리를 갈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하는 유혹과 편리를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사마리아는 곡창지대고, 예루살렘과 유대는 광야를 끼고 있어 식량이 모자랐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일 성전도시라는 미명아래 순례 객들로 부터 들어오는 기부금 때문에 도시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성전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여하간 이렇게 사마리아와 유대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적대시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이 대 놓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유대사회에서 예수의 메시지와 삶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쉽게 말씀 드리면, 이 사건은 당시의 유대인이라면 입에 꺼내고 싶지 않은 그런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사마리아를 통과했다는 것 자체로 대중들의 신뢰를 잃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들은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걸 개의치 않습니다. 뭐가 이들로 하여금 쉬쉬해야 할 그런 일을 드러내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유대사회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사회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유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직제, 제도, 관습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이 요한공동체는 사회의 가치를 좌지우지하는 유대세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면 끝장입니다. 그러나 요한공동체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요8:48을 보세요. 요한공동체는 유대인들을 향해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도처에서 ‘유대인의 법/저들의 법’과 ‘새 계명’을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서 공동체가 반유대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모두 71번의 ‘유대인들’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 강한 증오심의 표현에 해당됩니다.
이제 요한공동체는 쉬쉬하지 않고 드러내놓고 예수가 사마리아를 걸어서 갔다고 만천하에 공표를 합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거기서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를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여자와 말입니다. 가장 나쁜 상황입니다. 남이 그것을 아는 것 자체로 큰 손해를 볼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요한공동체는 얽히고설킨 편견들을 가로지릅니다. 무시합니다.
대화의 주제는 뭐였나요?
물입니다. 예수는 육신의 목이 마르고, 여인은 욕망의 목이 마릅니다. 여기서 물은 갈등과 편견의 장벽을 넘어서는 고리입니다. 이것도 퍽 상징적이죠? 물은 모든 편견, 그릇된 가치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여섯 남편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건 모릅니다. 단지 이 여인의 욕구, 욕망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고, 유대인들의 그것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도 모두 목이 마른 상태였습니다.
그러며 이들은 이런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여인을 대표로 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야훼에게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의 전통을 따라 성소를 짓고 거기서 정성껏 예배를 드림으로 행복과 욕망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의 터전 곳곳에 세워진 성소는 이런 바람들을 기초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아주 인간적이고, 소박한, 연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성소를 독점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독점하는 제사장들이 생기고, 제사장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권력자들이 생겨났습니다. 권력자들은 왜 제사장에게 잘 보이는 것일까요? 그들만의 욕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누구는 신상과 성소의 터를 대여해주고, 그곳의 기물을 대여해주고, 또 누구는 그것을 다루는 유일 배타적인 존재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제사장과 권력은 결탁을 하고, 그래서 제사장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야훼의 축복을 권력자들, 제사장이 독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야훼의 복을 받는데 줄이 생기고, 그 줄이 곧 힘이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더 많은 눈치, 더 많은 뇌물, 더 많은 기부금을 내야 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 거죠. 이런 것이 더욱 확장되면, 야훼 하나님의 축복은 지상의 지존인 통치자에게 전가가 됩니다. 통치자는 자신이 받은 축복의 부스러기를 부분적으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아니 나눠준다고 주장하게 되고,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공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권세가 나올 법한 장소는 폐쇄해야 하고, 그래서 성소간의 분쟁, 우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이렇게 되니까 진리가 독점이 되죠. 진리는 힘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특정 장소에 고정이 되죠. 이곳이 아니면 신의 축복이 없다, 이 성전 안에서만 진리가, 행복을 내려주는 축복이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들이죠? 이게 이미 초기 기독교공동체 속에 벌어진 일들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바람 같은 성령이 ‘규격화 제도화’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본시 무정형입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장소’와 ‘직위’라는 정형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통치자-제사장의 얼굴을 통해 형상화되게 되어 있죠. 그리고 사소한 사물이나 일에도 질서가 부여됩니다. 통치자와 제사장을 매개한 질서, 그들이 독점하는 성소중심의 질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무질서가 되고, 그들의 질서 외에 모든 것들은 없애버려야 하는 것들이 됩니다. 그리심산의 성소가 이렇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두 어긋난 정황이 ‘사마리아의 어느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여자의 대화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물을 공동 매개로, 여인의 개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결코 거기에 오늘의 만남의 주제가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1-12절에 나오는 여인의 이야기에는 ‘그렇게 오랜 역사동안 이 물을 마셨지만, 그리심산에서 야훼 하나님께 예배하며 행복을 구했지만 결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20절은 이런 자조적인 여자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다른 곳’과 ‘다른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는 단적으로 ‘거기에’ ‘그런’걸로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득권화 되어 있는, 질서화 되어 있는 제도적인 신앙의 거부입니다. 그런데 그 때란 다름 아닌 ‘지금’이라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 그렇게 두 성소 사이에서 배회하고 있는데, 예수는 다른 시간을 얘기 하면서, 그 때가 지금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놓여 있는 ‘지금’은 전통적으로 제도화된 ‘지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하는 ’지금‘은 질서를 교란시키는, 관성화 된 신앙질서를 거부하는 ’지금‘입니다. 벽처럼 둘러싼 제도의 법을 뛰어넘는 ’지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거기’는 어디일까요? 이것은 딱히 어떤 장소를, 어떤 예배당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어느 곳도’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성화 된 예배와 예배당 안에선 야훼를 향한 진리 수행이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곳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모든 곳’에서 야훼를 향한 진정한 수행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우리 각자의 질문은 어디서 성취는 되는 것입니까? 오늘날의 교회 안에서 진정으로 이루어집니까? 요한복음의 해답은,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권력과 질서로 채워진 공간에서 탈출하는 그 때, 그 곳에,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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