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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7:4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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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2.8.28 주일설교 /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초기 기독교의 ‘삐딱이들’9
요7:43-49
요한복음의 4장은 사마리아로 가서 여인과 대화하는 사건이었죠. 이를 통해 요한 공동체는 예수를 ‘영원한 생명수’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당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켜 보려는 인간 내면의 속셈을 지적했습니다.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었는데, 제자들은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제도화 예전화 하려고 했었고, 군중들은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 어느 것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 사건 속에 은폐되어 있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시면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호수 건너편에서 끝납니다. 7장은 다시 갈릴리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거기 예수님의 형제들이 다시 등장을 합니다. 2장에 잠깐 나왔죠. 그런데 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과 친한 모습이 아니라 갈등하는 관계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누가복음, 사도행전, 갈라디아서를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비교적 율법에 충실한 기독교 초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초기 기독교를 예전화 제도화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니 의당 제도화에 대한 강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의 7-9장에서 형제들과 갈등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형제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초막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올라가지 않은 게 아니라 같이 가지 않은 것입니다. 즉 ‘주의 형제’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5일 동안 계속되는 초막절기가 한창일 무렵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와 대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있는 군중들은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군중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던 것입니다(7:37-40). 7장43-47절을 보세요.
여기서 강조점은 예수를 체포하지 못한 상황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자와 사병들간의 단절된 대화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현장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예수는 대중을 미혹하는 자이고, 대중들은 그 사기꾼에게 잘도 넘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병사들이 예수를 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예수를 붙잡아 들이지 못한 것은 그들도(사병들도)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니고데모가 이 논쟁, 예수님이 사기꾼이라는 논쟁에 끼어듭니다. 뭐라고 니고데모가 말합니까? 들어보지도 않고, 하는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심판하는 게 율법이 아닌데 어찌 그렇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했는지, 무엇을 했는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판결해 버리는 조급한 자만심이 그들에게, 유대인들에게, 종교인들에게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이분법적인 체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오로지 두 범주로 나누는 것입니다. 내편 아니면 반대편, 틀리지 않았으면 맞는 것,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요한복음이 오늘 7장에서 문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교는 이분법적인 체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도 거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 속에 안주해 있습니다.
그러면 잠시 이분법이 왜 신앙과 삶의 유익이 되지 않는지를 생각해보고 본문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남자들이 변소에 가서 변기 앞에 서면 배꼽 높이에 있는 센서가 반짝반짝 거립니다. 마치 눈을 깜박거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 물이 찍 나오고, 볼일을 다 보고 바지를 추스르고 변기 곁을 떠나면 다시 껌벅대다가 물이 나옵니다. 만약 그 껌벅 거리는 게 눈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러나 누구하나 그걸 눈이라고 생각하고 그 앞에서 바지를 내리는 것을 망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눈은 눈이지만 ‘보는 눈’이 아니라 그저 ‘왔다’ ‘갔다’하는 것만을 감지하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달랑 그것만 할 수 있습니다. ‘왔다’ ‘갔다’말입니다. 그 눈은 오줌을 싸는 남자의 체형, 체중, 성격, 키, 옷 색깔 그런 것은 알지 못합니다. 또 그게 사람이 아니라도 그 눈은 물을 내리고 깜박 거립니다. 그 눈은 아무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현재만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도 간편하게 인간과 사건을 대할 때에 ‘동질성’과 ‘이질성’으로만 판단합니다. ‘내 맘에 맞아’ 또는 ‘내 스타일이 아냐’그러면 모든 게 끝입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인간관계에서 만이 아니라 며느리나 사위를 판단할 때도 어느 정도 근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분법이 자라나는 안성맞춤의 토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분법이라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이동에 따라 가변적을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나누어 인식하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 나누어진 범주에 따라 가장 단순하게 평가하게 하고 가장 단순하게 행위 하게 만듭니다. 세상을 그저 ‘나’와 ‘저들’로 나누며, ‘선’과 ‘악’, ‘옳음’ ‘그름’, ‘아름다움’ ‘추함’, ‘좋고’ ‘나쁘고’, ‘진리’ ‘거짓’이라는 이항 대립적이게 합니다. 이렇게 문제가 오로지 단 둘이기 때문에 하나는 생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입니다. 오로지 일대일로만 대응을 하는 거죠. 과거의 반공 이데올로기도 이분법적인 장치의 산물입니다. 이러면 모든 존재와 관계가 경직되고 공격적이게 됩니다.
자, 이렇게 이분법적인 상황이 일상화 되면 낯선 것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걸 공격하려고 하는 성향을 갖습니다. 새로운 것, 낯선 것을 배타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틀린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이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을 이렇게 설명 하는 것은 ‘유대인과 예수’의 갈등 관계를 설명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해보겠습니다.
열쇠 구멍으로 누군가를 또는 뭔가를 훔쳐 본적이 있습니까? 사실 열쇠 구멍으로 보는 건너편의 상황들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하면, 열쇠 구멍으로 뭔가를 보면서 ‘내가 이제 다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뭔가를 보고 있는데 그가 보고 있는 방문 앞으로 사람이 오는 기척이 들립니다. 그는 황급히 자시의 몸을 숨기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그제 서야 내가 조금 추하구나 하는 탄식의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누군가에 들키기 직전에는 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뭔가를 다 알아버린 그 행위가 추하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내 자신의 그행위에 대해서 수치스러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혹시 그렇게 하고 있던 자기를 발견했을 그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그는 누군지 모르지만 누간가에 의해 순식간에 ‘추한인가’이 되었고 ‘수치스런 행동’을 자각하게 됩니다.
자. 잘 들어 보세요.
앞의 이야기에서, 내게 엿 보인자는 엿본 나한데 뒷덜미가 잡혀 있는 존재입니다. 이를테면 주종관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엿본 나는 내 멋대로 사실을 지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과 허구가 교란됩니다. 이런 것들이 이를테면 증인, ‘내가 봤다’는 것입니다. 봤다는 데야 누가 당할 수 있습니까? 이것으로 끝이 나면 자신은 진리에 집착하게 됩니다.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진리는 편견의 소산이 되는 셈이죠. 그런데 이런 진리관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엿보고 있는데 누군가에게 들키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엿보던 이의 모든 행위들은 신뢰성을 잃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싸르트로의 ‘진리와 무’라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본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은 9장으로 넘어가기 이전에 왜 예수님과 형제들이 갈등하고 있는지, 유대인들은 그렇게 죽어라고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는지, 니고데모는 어쩌자고 그가 그렇게 신뢰해 왔던 종교적인 신념을 걷어차 버리고 유대인들을 향해 대들고 있는지를 원형에서 이해하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자 왜 사람들이 유대교로부터 갈등했을까요? 그동안의 진리관이 흐트러진 것은 엿봄의 행위가 누군가에게 들켜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갔을 때, 그가 용하다 어쩌다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그동안 보고 알았던 시선이나 삶의 내용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들키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그는 그 자신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암시적으로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게 혹시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갖고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의 숨겨진 행동, 사건, 상황, 감정들을 알아맞히면 기분 나빠 하는 게 아니라 되레 감동을 하면서 그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가 사는 동안 내가 신뢰하는 그 진실이라는 게 지극히 편견과 주관에 의해 설정된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여하튼, 당시대의 종교인들 소수가 그들의 행위를 예수에게 들켜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요한복음 9장이 시작됩니다.
다음 시간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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