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2:13-22 |
---|---|
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이 성전을 헐라
요한복음 2:13-22
2007. 6. 23.(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지난 주부터 청년 이상의 장년층을 대상으로 Q.T.를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으로 본문을 택했는데, 어제 Q.T.를 하신 분들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통 성전정화사건이라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사건으로, 유월절에 있있던 사건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로 유대교 3대 절기 중 가장 큰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절기가 되면 유대인 남자들은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유월절에는 2백만명이 넘는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고, 일주일간의 성대한 제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유대인들의 전례에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사진 1(3131 동영상) - 이스라엘 박물관 소장 제 2성전 모델, 동쪽 감람산 방향에서
사진 2(0605) - 성전전체
사진으로 보시는 것처럼 이 성전은 대 헤롯이 거의 재건하다시피해서 지은 것으로 헤롯성전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슨 일이었습니까?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으로 인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 등 제물로 쓰일 짐승들을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당황스럽지 않으신가요? 이미 알고 있지만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때 좀 당황스럽거나 의아해 했던 분들이 있었을 겁니다. 왤까요? 평소의 예수님의 모습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가 접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자하시고 죄인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러한 평상시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대단히 분노하신 모습으로 계십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분노하셨을까요? 그 배경을 보면 이렇습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먼 길을 소나 양을 끌고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고생도 무척 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먼 거리를 끌고 오다보면 제물로 드릴 소나 양이 병들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겁니다. 제사를 드릴 때는 흠없는 희생제물을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먼 거리를 제물을 갖고 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해 낸 것이 예루살렘에 와서 돈으로 제물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제물로 드릴 짐승을 직접 갖고 오는 것이 번거롭기도 하고, 오는 길에 짐승들이 병들어 죽기 십상이니까 성전 앞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사면 편리하기도 하고, 흠없는 제물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래서 성전 옆에 로빈슨 아치라고 불리는 아치형 계단 밑에 제물용 짐승들을 파는 상점들과 장사꾼들이 생기게 됩니다.
사진 3(0642) - 로빈슨 아치 밑 시장길
사진 4(0681) - 확대 사진
그리고 또 하나는 돈 바꾸는 사람들인데,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로마 화폐인 드라크마였습니다. 그런데 그 돈의 앞면에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돈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이사 자체가 신으로서 숭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진 돈을 드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 화폐인 드라크마를 이스라엘 화폐인 세겔이나 두로 사람들의 화폐로 바꾸어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바꾸어주는 장사꾼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나름대로 좋은 의도에서 한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하나님께 흠없는 제물, 순수한 돈을 바치려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변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먼저 제물로 드릴 짐승을 파는 경우인데, 제물이 흠이 없는지를 판결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권한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보기에는 흠이 없는 짐승을 갖고 왔어도 제사장들이 “No!”하면 제물로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로 조금 흠이 있지만 제사장이 “통과!”하면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이 금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전 사진으로 본 것처럼 시장이나 성전 밖에서 팔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이 허용된 된 것입니다.
사진 5(0714) - 성전과 성전뜰(이방인의 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 안으로까지 들어와 성전뜰에서 제물용 짐승들을 팔고 성전세를 환전해주는 장사꾼들이 장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어냐 하면 제사장들과 장사꾼들 간에 일종의 커넥션(connection)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것을 눈감아주고, 자신들에게서 사는 짐승들을 무조건 통과 시켜주는 조건으로 수입의 일부분을 제사장들에게 상납을 하기로 결탁을 한 것입니다. 돈을 바꾸는 사람들도 그 위에 얼마의 웃돈을 얹어 바꾸어 주었고, 이 중에 일부를 제사장들에게 상납을 한 것입니다. 게다가 제물로 드릴 짐승을 파는 이들은 그들의 수입을 높이기 위해 상태가 좋지 않은, 흠이 많은 짐승들을 팔았고, 사람들도 기왕이면 싼 것을 사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O.K.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서에 의하면 다리 저는 것, 병든 것이 제물로 드려졌고, 심지어 훔친 것까지 제물로 버젓이 드려졌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율법에 의하면 흠이 없고 건강한 최상의 짐승을 제물로 드려야 하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을 아무런 정성 없이 대충 준비해서 대충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자체가 목적이 된 것이 아니라 장사가 목적이고 되고 돈을 챙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배당이 아니라 시장으로 변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가 무너졌고, 영적으로 매우 타락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이것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채찍을 드셨고, 장사판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분노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람들이 말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분노하셨고,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셨을까요?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성전을 가리켜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전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즉, 내 집이란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래간만에 시골에 있는 아버지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서 허락도 없이 장사를 하고 오물을 내다버리며 집안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해’하면서 그냥 놔둘 것입니까? 아마 어느 누구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처럼 화가 나서 뒤집어엎고 내 쫓아 버릴 것입니다. 왭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집이 내 아버지 집이요 내 집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소굴로 바꾸어버린 이들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던 것입니다. 마땅히 내어쫓아 버린 것입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성경의 한 말씀을 생각해 냈습니다.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이는 시편 69:9의 말씀입니다.
‘열심’이란 원어의 뜻은 ‘끓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가슴 끓는 뜨거운 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모함이, 그 간절함이, 뜨겁게 끓어 올라 자신을 삼킬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뜨거운 열심이 있었기에 채찍을 들어 성전을 깨끗케 하실 수 있었던 것이었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해 봅니다. 나에게 이러한 열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습니까?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습니까?
이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은 우리에게 있어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따라서 내 아버지의 집이 더럽혀지는 것을 두고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상관없는 분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면 내 아버지의 집이 더럽혀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려는 열심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충격적인 행동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19절,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성전을 헐라" 대단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충격적인 말이며 동시에 신성모독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있어 대단히 중요한 장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이고 어떤 면에서는 자신들의 모든 삶을 지탱해주는 뿌리와도 같은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곳이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가면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원래는 성전을 둘러싼 벽중 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정식 이름은 서쪽벽입니다. 그 왼쪽으로 들어가면 서쪽 벽을 따라 터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특이한 장소가 나옵니다.
사진 6(2266) - 통곡의 벽
사진 7(2338) - 서쪽벽 터널
사진 8(2331) - 지성소 바로 뒤
사진 9(2332) - 지성소 바로 뒷 벽에 있는 이스라엘 땅 모양
바로 지성소 바로 뒷쪽이라고 여겨지는 장소입니다. 지성소는 성전 중에 가장 거룩한 곳입니다. 하도 거룩해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서 계셨던 장소였다고 할 정도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의 해석입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통곡의 벽에 가면 언제나 많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요?
다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제 3차 성전입니다. 제 3 성전을 지을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고 합니다. 성전에서 쓰일 집기나 물건들이 성경에 있는 그대로 만들어졌고, 심지어 제사 드리는 것까지 연습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이루어내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정당까지 있습니다. 이들이 전체 유대인들 중에는 소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전은 지금도 여전히 유대인에게는 중요한 장소로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그들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이고 참기 어려운 신성모독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성전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성전과는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전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성전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전입니까?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입니까?
21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 자신이 성전입니까? 먼저 그분 자신이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십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고 그 영광이 나타나는 장소이며, 그의 백성들을 만나주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성전에서 이루어진 이 모든 일들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그 보혈로 씼겨주시는 죄용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있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이제 더 이상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사는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됩니다. 성전이라고 할 때 우리는 대개 건물을 떠올립니다. 교회건물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에서는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묻습니다. 교회 건물이 성전입니까 아닙니까? 교회가 성전인 것은 맞지만 건물은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해도 그것은 그냥 건물일뿐입니다. 예배당입니다. 교회가 성전입니다.
조금 헷갈리죠? 교회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한 이들, 예수님을 통해 죄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건물을 성전시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래서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건물을 짓는데 경쟁적으로 몰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당 건물이지 성전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건물 자체가 성전일수는 없습니다. 만약 아직도 건물 자체를 성전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과거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고 중세 암흑기의 로마 천주교회가 가졌던 신학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배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곳이라도 해도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심지어 지하무덤 카타곰도 성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배하는 이들이 있다면 가정도 성전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건물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성전인지 아닌지를 구별짓는 기준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안에 예수님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고백이 없는 이들의 모임이라면 그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실제로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람이 주인인 그런 교회는 교회도 아니고 성전도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주인되면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있는 것처럼 장사꾼들로 난무한 시장판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여러분,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인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인된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부터 모든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들 멋대로 하다가 교회를 무너뜨리고 분열시키고 세상의 빛은 커녕 손가락질을 당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그 예를 굳이 세세히 들지는 않겠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 한분이십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되어서도 안되고 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목사가 교회를 이끌어간다 할지라도 결코 목사는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회가 교회의 정책을 결정한다해도 당회나 장로들이 교회의 주인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감당하고 있다해도 나는 교회의 주인은 아닙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주인행세를 하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교회가 성전일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님만이 교회의 주인되심을 고백하고 늘 그분의 뜻 앞에 순복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성전임을 믿습니다. 왭니까? 우리가 좋은 건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건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성전입니다. 그 안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지금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경배의 대상이심을 고백하고 있고, 앞으로도 이 신앙고백과 예배가 계속되는 한 우리 교회는 성전입니다.
저도 목사로서 가장 두려워하고 항상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행여라도 내가 주인행세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것과 내가 주인행세하는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조금 머리 굴리면 예수님 이름 내세우면서 실제적으로는 내가 주인 행세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해 카리스마나 권위를 내세워 주인 행세할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마치 자신의 왕국처럼 행세할 수 있습니다. 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글쎄 마음 먹는다고 될지는 모르겠네요.
암튼 이것은 목회자나 성도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칫하면 내가 주인행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 어떤 일을 하면서 하고나서 내가 한 것처럼 내세우는 것, 어떤 일을 할 때 나 없이는 안된다는 생각, 어떤 일을 하거나 하고나서 내가 인정받고 칭찬받아야 된다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내가 주인행세하는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우리가 항상 고백하고 확인해야 할 것은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늘 구해야할 것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늘 힘써야 할 것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늘 고백해야 하는 것이 나는 주님의 도구일뿐이며 어떠한 일을 했을 때에는 무익한 종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늘 이겨내야할 것이 내가 인정받고 내가 높임받고 내가 했다고 하는 그 마음입니다.
나의 주인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결국은요,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 앞에 복종시키고 오직 주님만을 나의 주인으로 왕으로 고백하며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내가 있을 때 그 교회는 주님만이 주인되시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성전이 될 때 비로서 우리 교회도 성전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계신 우리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성전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실 수 있고, 성령님께서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날마다 성령님을 만나 그 뜻에 순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죄와 성령님은 같이 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용서를 받아야 하고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몸이 죄를 짓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죄악에서 떠나 더욱 성령님의 임재를 구해야 합니다. 내게 오셔서 나를 다스려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내가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길 원하고, 그렇게 산다면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됩니다. 그리고 나를 더욱 더 만나주시고 깨달음의 은혜도 주시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럴 때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곧 성전임을 잊지마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내가 성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십자가 앞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특별히 우리 청년들이 청년의 때부터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성전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모인 교회는 당연히 성전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지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만져주시고 힘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의 사랑과 은혜와 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시는 은혜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해야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허울뿐인 성전을 허물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는데, 모양만 그럴뿐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면 허물어야 합니다. 나의 죄악, 나의 고집, 나의 불순종, 나의 자아가 성령님께서 거하실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면 허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목사고, 장로이고, 권사고 중직자라 해도, 아무리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내 안에 성령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나 성령님께서 거하시기에 불편해하시는 것들이 있다면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불순종이든, 나의 고집과 성격이든, 나의 경험과 위선이든, 그 무엇이든 하나님의 성령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라면 무너뜨려야 합니다. 아프더라도, 내키지 않더라도, 내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그것이 성령께서 불편해하시는 것이라며 다 내려놓고 다 무너뜨리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용서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진정한 성전으로 설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 안에 어떠한 모습으로든 남아있거나 나타나려고 하는 잘못된 성전의 모습을 허물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되려는 마음, 내가 높아지려는 마음,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가치관과 판단을 내세우는 것, 그 어떤 것이든 사람이 주인되려고 하는 것들을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오직 주님만이 주인되시는 성전으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이 있을 때 교회의 주인되시고 스스로 성전이신 우리 주님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할 것이며, 우리 교회를 더욱 더 주님께서 충만히 거하시는 성전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