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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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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목마름
요한복음 4:3-24
2007. 7. 7.(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라는 마을에서 한 여인을 만남으로 인해 시작됩니다. 이 사건은 어떤 기적이나 표적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셔서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셨는데,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6절에 보면 그 때가 제 육시 쯤이었습니다. 육시는 유대식 시간인데, 우리 시간으로는 정오를 해당되는 한낮입니다. 상당히 더운 시간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땅은 건조지역이라서 일교차가 크고 낮에는 무척이나 뜨겁고 건조한 지역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중동지방 가운데서도 그래도 덜 건조한 편이지만 낮에는 무척이나 덥고 건조합니다.
이러한 기후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과 해질녁에 일을 하고 낮에는 힘든 일은 삼가는 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마리아 여자가 물 길러 나온 때가 언제입니까? 제 육시, 즉 정오에 해당하는 뜨거운 한낮입니다. 건조지역인 이곳에서 햇빛이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에서 이 여자가 무언가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여인들이 물을 길러 오는 시간은 아침, 저녁의 서늘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가장 더운 시간에 사람들이 물길러 오지 않는 시간에 홀로 물을 길러 왔는 것입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기 싫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목마름이었습니다. 우선적으로는 고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보니까 이 여자에게는 남편이 몇 명 있었다고요? 다섯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같이 사는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첩으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의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현재 어느 남자의 첩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략 3,40대가 아닐까 싶은데, 그 나이에 벌써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어떤 남자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여자의 인생이 평범치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남자들에게 짓밟히고 버림받은 인생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는 율법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성적으로 단정치 못한 여자는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이 여자는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을 당했을 것이고, 정죄를 당했을 것이고, 따돌림을 당하고 조롱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피했고, 사람들을 피해 더운 대낮에 혼자서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이 여자는 외로웠습니다. 고독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이 있었고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내면에서부터 끝없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 여자의 내면의 상태를 아셨고 목마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시간상 그 대화의 내용을 다 살펴볼 수 없겠지만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의 목마름을 아셨던 주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생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생수는 여자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물입니다. 13-14절의 말씀처럼 이 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로 이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물이며,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인해 주어지는 생명과 기쁨과 평안을 말하며, 구원과 영생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는 죄용서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구원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진정한 평안이 주어지고, 자유함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내 안에도 주어져서 영생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생수를 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에 여자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15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분이 나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인가보다 생각하고는 ‘내게 그런 물을 주셔서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여자의 요구는 물질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목마름은 느꼈지만, 그 목마름의 해결을 여전히 물질적인 데서 찾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자신의 목마름을 물질적인데서 찾았습니다. 현실적인 것에서 찾았습니다. 성적인 쾌락에서 찾았을 겁니다. 돈에서 찾았을 겁니다. 그것만 있으면 목마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목마름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여섯 명의 남자를 거쳤지만 그 목마름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 남자들을 통해 물질적인 필요도 채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목말랐고, 더 허무함과 고독을 느꼈습니다. 오히려 농락 당하고 버림받고 상처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더러운 것이라고 손가락질 당했습니다. 조롱당했고 아마도 던지는 돌에 맞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것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깊은 상처와 고독과 허무함만을 얻었습니다. 이 여자의 목마름은 인간의 본질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목마름이 있습니다. 동물은 그저 먹을 것만 있으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을 것이 있어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목마름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탐닉을 하고 무언가를 찾습니다. 돈을 탐닉하고, 성적인 쾌락을 탐닉하고, 권력을 탐닉합니다. 돈이 인간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요? 만약 가능하다면 부자들은 목마름이 없을 겁니다.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끝이 없어요. 더 많은 돈을 탐닉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성적인 탐닉이 만족을 줄까요? 아닙니다. 성적 탐닉은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 못해요. 오히려 더 탐닉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파멸로 이끌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하셨죠?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다” 18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은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고 살았다. 그런데 그러한 탐닉이 네게 만족을 주더냐? 너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더냐?’하는 의미입니다.
여자는 이 말씀을 듣고 섬찟했을 것입니다. ‘이 분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떻게 알고 나의 치부를 묻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숨기려 했고, 숨기고 싶어했던 것인데 어떻게 아셨고 왜 이것을 묻는 것일까?’
그러면서 여자는 그제서야 깨달았을 겁니다. ‘그렇구나! 나는 남자를 통해 내 목마름을 채우려 했다. 나는 물질을 통해 내 목마름을 채우려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고, 나의 목마름은 더해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그러한 성적인 탐닉이 진정 죄라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죄의 회개없이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 깨달음이 주어지자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 말씀은 ‘당신은 나의 목마름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시오. 당신이 주실 수 있다는 생수를 내게도 주십시오.’ 이런 요청입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이 물질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영적인 목마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목마름은 물질에 관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성을 탐닉하고 돈을 탐닉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처음에는 물질적인 차원에서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물질적인 것들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문제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4장을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중요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곳에 두 군데 정도 있습니다. 첫째는 16절에서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앞에서는 영원한 샘물을 이야기하시다가 여인이 그 물을 달라 하니까 느닷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여인의 죄를 들추어내는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었고,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그 부끄러운 과거와 죄를 예수님께서는 아시고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이에 여인은 그것을 인정하고 예수님도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난데없이 예배에 대해 물어봅니다. 20절이 그 질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저는 이 대목에 대해 줄곧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왜 갑자기 예배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남편 이야기를 했으면 그 이야기를 끝을 보든지, 아니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영원한 생수 이야기를 더 하든가 해야 맞을 것 같은데, 난데없이 예배할 곳이 어딥니까 묻는 것이 잘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이 부분을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따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여인이 자신의 과거를 알고 계시는 예수님 앞에 경외심을 느끼면서 그동안 궁금해왔던 것을 물은 것으로 봐야 하는가?’ 늘 궁금했습니다.
대개의 주석가들은 여인이 궁금했던 것을 물은 것으로 봅니다. 말하지도 않았던 자기의 과거를 알고 계신 예수님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면서, 그동안 예배에 대해 궁금해 왔던 것이 생각났고 그래서 물어보았다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그곳에서 예배하였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만이 진짜 예배라고 주장했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도 이 것에 대해 알았고 누구의 말이 옳은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 궁금한 것을 예수님께 물어본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왠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그 점에 대해 계속 묵상을 하고 생각을 해보았는데, 여자가 이러한 질문을 한데에는 그 전에 무언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가 있었기에 예수님께 예배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심경의 변화는 죄용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것처럼, 16절의 예수님의 질문은 여인의 치부를 드러낸 것입니다. 여인의 고백처럼 그에게는 지금까지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어떤 남자의 첩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남자 관계가 이렇게 복잡하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간에 이 여자의 생활이 도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난잡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많은 죄를 지었을 것입니다. 죄가 많을수록 숨기고 싶어합니다. 이 여자도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사람들을 피했고 더운 낮에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죄를 들추어내셨습니다. 여자는 너무나 놀랬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17절에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한 것은 숨긴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남편답게 살았던 남자가 없었고, 지금도 남의 첩으로 살고 있으니 사실 남편이 없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비록 다는 아니지만 자신의 잘못과 치부를 인정한 것입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이 말에는 그동안 자신의 후회스럽고 죄된 삶에 대한 고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다. 네 말이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도 꾸짖거나, 간음한 죄인이라고, 더러운 죄인이라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네 말이 옳다.”인정해 주고 계십니다. 이 한마디에는 말로 담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가 험악한 인생을 살았구나. 그동안 많은 죄를 지었구나. 너의 상처들, 아픔들, 네가 지은 죄들, 내가 다 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말에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것 자체가 여인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고백하게 하시고 용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죄를 고백하는 자를 결코 꾸짖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분은 나의 치부, 나의 죄를 알고 계시는구나. 그렇다면 이분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지자로구나. 나의 죄를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네가 옳도다 하시면서 나를 인정해 주시는구나. 이것은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분이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말이 많다고 해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경우를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저의 경우도 이 여인과 같았습니다. 20대 초반에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저를 주님께서는 다시 만나주셨는데, 그때 아무런 말씀 없이 단 한 부분의 성경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저의 모든 죄는 고백되어졌고, 참회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고, 죄용서의 감격이 있었습니다. 비록 짧은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만지실 때 죄의 고백과 용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죄용서의 경험을 했습니다. 너무나 뜻하지 않게 만나게 된 예수님을 통해, 그분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고, 그 죄를 고백했을 때 용서받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치명적인 죄를 들추어내셔서 그 죄를 고백하게 만드시고, 대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느낄 때 제일 먼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름아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부어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바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자신의 치명적인 죄를 지적하셨을 때 여인은 놀라운 해방을 맛보았고, 죄용서를 경험했을 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느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예배에 대해 물어본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열망은 죄용서에서 시작됩니다. 죄용서야말로 예배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게 만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바로 영적 죽음입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죄용서가 주어질 때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7:36절 이하에 보면 한 바리새인이 자기 집에 예수님을 청했는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기사가 나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여자는 죄인인데, 이 사람이 정말 선지자라면 어떻게 죄인이 자기의 몸을 만지도록 놔둘 수 있단 말인가’
똑같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에게 진정한 감사와 존경이 없이 그저 손님 하나 치르는 식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고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부었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가 있게 했습니까? 그것은 죄용서의 경험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죄용서의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죄의 고백이 있었고, 참회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용서와 사랑이 부어졌습니다. 이 경험이 전혀 상반된 태도를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죄용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드릴 수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용서의 체험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나를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고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아닙니까? 그것이 예배인데, 죄용서의 경험이 없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알 수 있으며, 어찌 감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예배가 고문입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자를 보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찬양을 하면서 왜 눈물을 흘리는지, 왜 손을 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자에게는 가슴에서 복받쳐 오르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무릎꿇고 예배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찬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고, 경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경험할 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 충만하게 부어진 사람은 그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도 예배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다할지라도 예배만 드릴 수 있다면 행복해 할 수 있습니다.
몇년전에 한 형제를 만났었습니다. 군에 간 형제인데, 자신이 속해 있는 부대의 상황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에 갔다오면 매를 맞고 기압을 당합니다. 이 형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예배드릴 수 없는 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회개했습니다. 그동안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예배 드렸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예배를 드리게 되었을 때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자유롭게 예배드리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파서, 그래도 이렇게나마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울었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 형제에게 부어진 것 같아요. 그 후로 이 형제의 입에서는 감사라는 단어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은 너무 힘들어서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지만, 그 후로는 감사가 나오더랍니다. 좋은 곳으로 보내주신 것 감사, 좋은 사람들 만나게 해주신 것 감사, 꿈을 주시고 그 꿈을 위해 준비할 수 있도록 하신 것 감사, 내무반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해주신 것 감사, 계속해서 감사가 나오더랍니다. 아직도 마음대로 교회에 가질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너, 군대 잘 갔다.” 제가 확신하건데 이 형제는 평생 예배의 감격을 갖고 예배드릴 것입니다. 왜요? 예배가 무엇인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죄의 고백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기독교 잡지에서 본 것인데, 매일 전 세계에서 7만명의 기독교 신자가 생겨난답니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지요. 그런데, 매년 몇 명의 사람이 순교 당하는 지 아십니까? 16만명, 정확하게는 15만 9천명이 기독교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 국가에서, 중국과 북한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그해 2월달에 선교사 3명이 순교를 당했답니다. 이 사람들이 순교 당하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예배입니다. 예배드리다가 예배당이 불타 버려도 굴을 파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드리다가 붙잡혀 고문당하고, 그래도 끝까지 신앙 지키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왜 이들은 예배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죽음을 당합니까? 힘이 없어서요? 미련해서요? 합리적이지 못해서요? 아닙니다. 그들은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용서의 체험이 있었고 감격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그들의 심령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다 없어도, 다 빼앗겨도, 핍박을 받아도, 아니 죽을지라도 예배만 드릴 수 있다면 행복했고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는 예배의 감격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이런 감격과 눈물이 빠진 것은 아닙니까? 도저히 예배드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일이 되었으니까 마지못해 교회에 오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견디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시간이 좀 길어지면 지루하고 힘드십니까? 예배를 마치고나면 무슨 경찰 취조가 끝난 것 같은 기분입니까?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당신은 아직 죄용서 받지 못한 자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짐을 그대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의 출발은 죄용서입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의 사랑에 접촉하기만 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이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가 놀라와 찬양할 수밖에 없고, 기도할 수밖에 없고,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고, 예배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용서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왜 감격이 없습니까? 왜 변화가 없습니까? 예수를 믿어도 왜 이렇게 형식적으로 믿고 위선되게 믿고 왜 이렇게 가볍게 믿고 있습니까? 죄용서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예배를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용서가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의미가 없는 예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오랫동안 사마리아 산에서 드려온 예배와 같습니다. 수십번, 수백번 예배드렸지만 감격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눈물과 죄용서의 체험이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죽은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언제까지 의미없는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죄용서를 받으십시오. 새사람으로 태어나십시오. 이 메마른 눈에도 눈물이 흐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아직 한번도 죄용서의 체험이 없는 분이라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고백하는 눈물의 참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에 죄용서의 경험은 있지만, 지금은 메말라버리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다시금 죄용서의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매주일 예배드릴 때마다 자신의 죄를 진실함으로 고백하는 참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매주일 이 자리에 서기 전에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나의 모습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 때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찬양하다가 죄가 생각나거든 기도하십시오.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참회의 기도를 하십시오. 형식적이 아닌, 습관적이 아닌 진실함으로 드리는 고백을 하십시오. 그럴 때 그 심령 위에 다시금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부어지고, 그럴 때 예배의 감격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통 예배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예배의 위기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시편 51편에 보면, 그가 우리야를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죄를 범한 후에 참회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정말이지 철저하게 회개를 합니다. 진심으로 죄에 대해 아파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아파한 것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리려해도 이전처럼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눈물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주셨고, 그의 소원대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셨고, 마침내 예배가 회복되어서 51편의 마지막은 찬양과 감사와 예배로 마치게 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을 때, 죄가 해결되지 않을 때, 죄가 우리를 주장할 때,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죄의 고백이 있을 때 죄용서가 주어지고,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노래하며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모두에게 죄용서를 통한 예배의 감격이 주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물어봅니다. 사마리아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것이 맞는가 이런 질문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간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의 자세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참된 예배자의 자세는 두 가지입니다. 23-2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어떤 것이 참된 예배자의 자세입니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의 논쟁은 어떤 곳에서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제물이 있어야만 되는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예배의 시대가 왔는데, 새로운 시대의 예배의 방법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입니까? 영을 성령으로 보고, 진리를 말씀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된 예배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짐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보기도 합니다. 맞는 해석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영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곳으로, 우리 마음의 중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즉, 예배의 장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나의 마음, 나의 중심입니다. 몸만 예배당에 와 있다고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내 마음에서 이루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죄용서의 감격, 은혜의 감격이 있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외식적인 요소없이 예배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사람을 의식하며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예배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앞에 자신은 죄인임을 인식하며 죄인을 만나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찬양을 드려도 그 곡의 가사가 나의 고백이 되어지는 예배, 헌금을 드려도 나의 진실함이 담겨져 있는 예배를 말합니다.
왜 이런 예배가 참된 예배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그분은 장소에 제한받지 않으심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심령 가운데 임재하실 수 있고, 우리 중심의 태도를 정확히 알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의 중심을 다 보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과연 이 사람이, 이 교회가 영과 진실함으로 예배드리고 있는지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 진실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 교회당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고, 예배의 시설이 최신시설이고 멀티미디어를 동원한 첨단의 예배라 할지라도, 아무리 뛰어난 음악실력을 가진 성가대와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예배라 할지라도 참된 회개가 없고, 마음의 중심도 없고, 진실함도 없고, 예배에 대한 사모함도 열망도 없는 예배는 받으시지 않습니다.
23절 하반절에 보면,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예배에 대한 목마름을 갖고 계십니다. 참된 예배를목말라하시고, 참된 예배를 드릴 예배자를 찾기에 목말라하십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배의 홍수시대입니다. 예배가 없어서, 예배드릴 공간이 없어서, 교인이 없어서 예배에 대해 목말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를 찾고 계신 것입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23절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를 가리켜 “His worshipers”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예배자, 하나님의 예배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His worshiper, 하나님의 예배자였던 다윗은 시편 51:1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한 심령은 죄를 아파하며 고백하는 심령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죄용서 받는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 진실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때,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나를 만나주실 것이며 내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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