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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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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사랑은 사랑을 낳고
요한복음 21:15-17
2007년 7월 20일(금) 텔아비브 욥바 교회- 전교인 여름수련회 저녁집회
글 하나 읽어드릴까요?
"내 나이
서른 하고도 두울에
나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헤어지면
차마 보고 싶음에
가슴 저리고
만나면 하냥 즐거워
사랑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 가진 양 넉넉한,
그래서 헤어짐이 못내 싫은
그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님의 웃음으로
울음이 웃음 되어지고
님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惠明
그 이름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중간생략)
어떻습니까? 시 같아요? 정작 읽고나니까 쑥스럽군요. 저는 나름 시라고 생각하는데, 연애할 때 아내에게 써주었던 글입니다. 저는 원래 시심이 풍부한 사람은 아닌데, 사랑을 하니까 저절로 시가 나오더라고요.
사랑은 참 매혹적인 힘이 있어요.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기도 하고, 사랑을 하면 없던 힘도 생기고, 사랑을 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 가지고도 희죽희죽 웃기도 하고, 사랑을 하면 희생이라는 것도 아낌없이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하면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 인간의 본성이었던 것 아세요. 인간성은 바로 이 사랑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겁니다.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보면, 911 테러로 인명 구조를 위해 투입된 경찰관들이 건물이 무너지면서 갇히게 됩니다. 그 중에 두 명이 건물 더미에 깔린채 살아있었는데, 이 두 명이 구조되기까지의 과정을 실화를 토대로 그린 영화입니다. 흑인 경찰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죽음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뵈었고, 그 후 바로 구조가 되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런 독백이 나옵니다. "우리는 911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보았다. 인간의 악마성과 인간의 인간다움을 보았다." 무엇인 인간의 악마성입니까? 사랑하길 거절하고 오직 미움과 증오로 가득찬 마음입니다. 무엇이 인간다움입니다. 남의 고통의 상황을 이해할 줄 알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인간성의 유무는 사랑의 유무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성의 회복은 인간의 본성인 사랑의 회복에 있는 겁니다. 사랑이 온전히 회복된 사람, 그 사람은 인간성이 회복된 사람입니다. 왜 사랑이 인간의 본성이냐?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에서 주신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7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을 각기 그 종류대로 만드셨는데, 유독 사람만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회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있는 본성을 그대로 사람에게 넣어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고 사고하는 능력이 있고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것들을 찾으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여러가지 하나님의 것들을 받았는데, 그 중에 가장 특징적이고 대표적인 본성이 무엇이냐 하면 사랑입니다. 왜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특징적이고 대표적인 본성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전지 전능하신 분, 창조주, 정의로신 하나님... 그러나 단 한마디 단어로 압축해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성경도 그것을 여러번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그 형상의 중심에는 바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신적 본성을 사람에게 주셨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면 어떤 감정, 뜨겁고 묘한 감정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랑은 감정 이상의 것입니다. 사랑은 인격과 인격과의 가장 깊은 교제입니다. 사랑은 깊은 교제를 가능하게 해줍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신의 본성 중에 본성인 사랑을 주셨기에 사람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범죄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를 보세요. 하나님께 받은 순결하고 숭고한 사랑의 본성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인격을 깊이 사랑하는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벗었으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더럽혀지지 않은 사랑, 단순한 성욕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격을 깊이 이해하고 상대방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아무런 장애물 없이 마치 연인처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이고, 사람이 그 사랑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더렵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선악과 사건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궁금한 것이 많거든요. 그러나 이 선악과는 하나님과 사람간의 사랑의 관계에서 있어서 꼭 지켜야할 최소한의 약속이었습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아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이지만 꼭 지켜야할 최소한의 약속은 있습니다. 사실 사랑하면 더 상대방을 존중해 줍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했지요.
연인이나 부부의 경우라면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은 곧 사랑으로 맺어진 두 사람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으로 맺어진 계약의 파기입니다. 그 대가는 파기한 사람이 져야 하지만 그 상처는 파기한 사람보다 배우자가 더 큽니다. 선악과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꼭 지켜야할 계약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그것을 깨뜨린 것이 바로 사람이었고, 그 대가를 치뤄야만 했습니다. 그 대가는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1:17)
사랑의 계약을 파기한 대가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약을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은 실언치 않는 분이시고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도 그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키지 못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앞에서는 그 엄격하신 정의가 약해집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약해지십니다. 그 엄격하신 하나님의 정의도 힘이 잃게 됩니다. 사랑의 계약을 파기한 대가는 죽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그 파기로 인해 인간에게 육체적인 죽음이 찾아왔지만, 당장 죽는 형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쫒겨내시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3:21)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입혔다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을 파기한, 즉 죄를 범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는 같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 곁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사람을 향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벌거벗은 사람을 위해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손수 말입니다. 마치 부모의 품을 떠나 살겠다고 나에게 해당되는 유산 달라고 하면서 집을 나가는 철없는 자녀에게 가는 길에 먹을 음식과 옷가지를 손수 준비해서 보내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파기한 사람은 그 후로 하나님의 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미 사랑이 더럽혀졌고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더욱 더 사람은 죄의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생기게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계속해서 사람에게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채워보려고 거대한 문명을 만들기도 합니다. 권력을 탐해보기도 하고 재물을 모아보기도 하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해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보려고도 합니다. 그런데 채워지질 않습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까닭은 그 부족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본성, 즉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할 때 이 부족함이 그나마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일뿐입니다. 사람의 영원한 갈증과 부족함은 결국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 채워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다시금 채워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그 갈증과 공허감이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방적으로 사랑의 계약을 파기하고 죄의 길로 들어섰지만 하나님은 그 뜨거운 사랑을 그 이후로도 한번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왠지 아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포기합니까? 사랑하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데 어떻게 미워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그 이후로 하나님을 떠났어요. 하나님을 잊고 살았어요. 하나님을 미워했어요. 늘 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뿐이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한시도 사람을 잊은 적도 없었고, 포기한 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해서 다시금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열망이었고 한결같은 소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것 아십니까? 아주 오래전부터, 아니 당신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셨다는 것 아십니까?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알고 계셨고, 나는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나를 잊으신 적이 없으셨고, 나는 하나님을 거절했지만 하나님은 늘 나를 바라보고 계셨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셨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아직 믿음이 생기지 않을 때, 혹은 죄를 범했을 때나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을 때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자녀가 성미가 까다롭고 늘 불순종하고 사고만 치고 늘 부모 속을 썩인다고 해서 그를 내 자녀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그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자녀 때문에 늘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서 가끔 미울 때가 있지만 그렇다고 그 자녀를 내 자녀가 아니라고 버릴 수 있냐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모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아니예요. 정상적인 부모라면 절대 그렇게 못해요. 아무리 속을 썩이는 자녀라 해도 그는 여전히 내 자녀이고 나는 여전히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완전하지 않은 부모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여러분들이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고 해서, 죄 가운데 있다고 해서,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으실까요?
이사야 49:14-16에서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부부는 때로 헤어지기도 합니다. 아버지도 자기 자녀들로부터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또한 형제들도 원수지간이 될 수 있고, 남편이 자기 아내를 버리거나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이 모든 것과 다릅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놀던 아이의 움직임을 기억합니다. 죽을 것 같은 산고의 고통 후에 품에 안은 그 눈물겨운 기쁨을 기억합니다. 자기 자녀의 어릴 적의 웃음소리와 울음을 기억합니다. 자기 자녀의 유년기의 해맑은 웃음과 청년기의 꿈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머니는 단 한번도, 단 한순간도 자기 자녀를 무가치한 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 자녀를 버릴 수 없고 포기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고,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미국 뉴욕 시에 성격이 아주 나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성격이 나빠서 자녀들에게 상처도 많이 주었고, 자녀들에게 악영향을 끼쳐서 그릇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한편 어머니는 자녀들이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너무 강한 탓이었는지 결국 그의 아들이 전과자가 되고 맙니다. 살인죄를 저질러서 감옥에서 형 언도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는 죽고 재판이 열리는 동안 그 어머니는 법정에 늘 앉아 있었습니다. 증언들이 그 아들에게 불리하게 행해질 때마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들보다 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유죄 선고를 받고 사형언도를 받았을 때 모든 사람은 그 결과에 대해 대단히 만족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정상참작을 간청했지만 그 간청은 거절되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사형을 당했고, 사형집행 후에 어머니는 자식의 시체를 돌려 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것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관례에 따라 시체는 교도소 묘지에 매장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어머니도 곧 죽었는데, 그녀는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신의 시체를 아들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살인자의 어미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하고 숭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해도 어머니의 품 안에서는 그저 자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결코 비교할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를 잊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가장 강하고 숭고하다고 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잊을 수 없어요? 하나님의 손바닥에 나의 이름을 새겼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손바닥에 내 이름을 새겨놓았다는 겁니다. 혹시 손바닥을 바늘로 찔러 보신 적 있으신가요? 칼로 베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무척 아픕니다. 그런데 손바닥에 이름을 새겨놓았다는 겁니다. 왜요? 잊지 않으려고, 항상 기억하려고. 손바닥을 볼 때마다 내 이름이 보여요. 손바닥을 쥘 때마다 내 이름이 느껴져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손바닥에 이름을 새길 때 그 아픔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 마음이 아프셔요. 왜요? 내가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길 원하시는데 나는 그것을 믿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고, 가까이 가기를 망설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무리 어머니의 사랑이 강하다 해도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만큼 그 자녀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외아들을 죽음에 내어 놓았을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골고다 그 현장에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면서 나를 사랑하셨던 그 사랑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천국이 왜 그렇게 매력적일까요? 진주문이나 황금문이 있어 온갖 금은보화로 장식된 아름다운 곳이라서요? 아닙니다. 천국이 아름다운 것은 나를 위해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 주실만큼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대답해 줄 수 없습니다.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은 우리의 참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나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적 성품입니다. 이는 마치 태양의 본질이 빛을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이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랑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나의 사랑 안에 들어오라고 말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지지 마십시오. 또한 자신이 죄인이라고 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일이 잘 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한 자들뿐만 아니라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십니다.
죄인으로 하여금 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해결하지 못하면 고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할 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죄인'을 서로 구별해야 합니다. 죄가 사랑하는 사람을 망쳐 놓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죄를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예요. 즉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소원은 죄인들이 죄 씻음을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죄인들을 위하여 그 외아들을 죽음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른 것 아니라, 우리를 향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 증거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입니다. 죄인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죄인이 죄를 씻는 방법은 죽음입니다. 자신이 죽던가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 가운데는 그 누구도 대신 죽을 수 없습니다. 죽어도 그것은 자기의 죄를 안고 죽은 것이지 대신 죽은 것은 아닙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만 하면 나의 죄가 씻음받고 구원받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시고 만드신 방법입니다.
이것이 간단하게 보이십니까? 아니예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어요. 하나님의 전부를 나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요.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내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요.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나는 죄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으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니느라"(요일4:15-16)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렇게 고백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왜요?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그 사랑, 언제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안에 있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겠어요.
저는 행복합니다.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권력을 가져서도 아니고 명예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이기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천국으로 이끄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여러분들에게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하는 사랑과는 다릅니다. 당신을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애정이 식어져 언젠가는 당신의 곁을 떠나 버릴지도 모릅니다. 또한 사랑이 변하여 미움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류 월리스(Lew Wallace)라는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에서 명성을 날리던 장군이 있었습니다. 아주 개성이 강하고 명철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였습니다. 월리스 장군은 하나님은 없으며 성경은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극적으로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그가 후에 쓴 책이 바로 세계적인 명작인 "벤허"입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연한 바 있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었지요. 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재물도, 위안도, 소망도, 사람들도 다 사라지지만, 사랑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내 주변에 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집니다. 모두 없어지고 맙니다. 내가 믿었던 사람들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언제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요한복음 13:1에서 기록하기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체포되어 밤새 모진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형장까지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마음에는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갖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 자신의 팔아넘긴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다른 제자 하나가 주님을 부인하고 맹세하여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4월 말 갈릴리 수련회 때 마지막으로 들렸던 장소가 베드로 수위권 교회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주님을 배신한 죄책감과 자괴감을 상처를 가지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어떤 책망이나 꾸짖음이나 처벌이 아니라 손수 지으신 따뜻한 식사였고,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의 확인이었습니다. 그때 말씀 드렸던 것처럼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 것은 베드로에게 어떤 대단한 사랑고백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드로, 너는 나를 세번이나 부인했고 나를 떠났지만, 그러나 나는 베드로, 너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고, 한결같이 믿고 있다"는 확인이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지난 베드로를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사랑이 다시금 베드로를 일으켜세우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이 베드로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그 후로 베드로는 주님께서 새롭게 주신 사랑을 가지고 흔들림없이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순교 당할 때 차마 주님처럼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어 꺼꾸러 매달아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렇게 순교당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소망없는 자에게 꿈을 주는 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무가치하다고 형편없는 놈이라고 여기던 자를 가장 가치있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 사랑입니다. 급한 성격에 좌충우돌하던 사람을 깊은 사랑의 사람,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사랑이 우리를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고 사랑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심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랑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채워질 때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던 사람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배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고백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이나 처지에 무관심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섬기려고 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 가운데 예배의 감격이 식어졌습니까? 형식이 되어버렸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것이 싫습니까? 아깝습니까? 여전히 나의 필요, 나의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입니까?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음에도 전혀 마음의 짐이 없습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사랑의 위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메말라 있습니다.
다시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고 다시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금 채우십시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지배할 때 나는 다윗처럼 예배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할 때 나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게 되고, 이웃을 향해 사랑의 섬김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훈련이나 맹세가 아닙니다. 사랑은 단순히 훈련이나 맹세에서 생기는 결과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사랑이 메말라 있다면 아무리 맹세를 하고 노력을 해봐도 줄 수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평상시 내 안에 얼마만큼의 사랑이 있는가와 상관없이 사랑은 항상 부족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의 사랑을 닮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무엇입니까? 방언하고 능력을 행하면 그것이 성령충만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중에 본성인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했고,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십시오. 십자가에 나타난 그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심령을 채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아무런 조건없이 한결같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당신을 닮아 사랑으로 가득찬 사람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가진 손양원 목사님은 1939년 8월 22일에 여수 애양원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애양원은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눈썹과 머리가 빠져 나가고, 손가락 발가락이 잘려 나가고, 온 몸이 고름투성이로 문드런채 가족과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영혼들이 모여 사는 곳이 바로 애양원입니다. 그들에겐 친구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들 곁으로 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작고 왜소해 보이는 한 목사가 '문둥이의 벗'을 자처하며 찾아왔습니다. 애양원에서 손양원 목사님과 함께 했던 분의 증언입니다.
"손목사님은 우리와 조금도 거리를 두지 않으셨지요. 스스럼없이 우리와 같이 먹고 자고 했으니까요. 심지어 사랑의 선교사라던 윌슨 선교사마저도 감염을 우려해 소독을 한 뒤 마스크를 쓰고 장화를 신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던 14호 중환자실도 손목사님은 거리낌 없이 드나들곤 했죠. 그것도 모자라 손수 중환자의 발에서 나오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기도 했습니다. 진실로 우리의 아버지요, 형님 어빠가 되어 주셨지요. 그야말로 성자였습니다. 성자!"
이렇게 나병환자들을 자기 몸처럼 돌보던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비난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1945년 8월 광복되기 전까지 5년간 옥고를 치루게 됩니다. 그리고 해방후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 순천반란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손목사님에게는 3남 3녀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때 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이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 두 형제는 아버지를 닮아 믿음이 좋았고 누구에게나 사랑과 친절로 대해주어서 대부분의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좌익 학생으로부터는 질시의 대상이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이 터지자 그 질시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폭도로 변해버린 좌익학생들로 인해 이들 형제는 소위 인민 재판대에 서게 됩니다. 죄목은 예수쟁이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장남 동인이 미국 유학을 꿈꾸왔기 때문입니다. 무자비한 주먹질이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장남 동인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 믿는 사상, 예수 믿는 정신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 내 목을 뽑을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내 신앙은 내게서 뽑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도 그러지 말고 어서 예수를 믿어라!"
악에 바친 좌익학생들은 동인에게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 때 동생 동신이가 형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형은 장남이니 부모님을 모셔야 하니까 차남인 내가 대신 죽겠으니 형은 살려 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형대로 자기가 죽겠다고 하고요. 결국 격분한 폭도들은 두 형제에게 총기를 난사했고, 두 형제는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이 두 형제의 장례식이 치뤄졌습니다. 애양원 가족들의 애끓는 애도 속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모든 눈물을 속으로 삼킨 채 장례식 답사를 통해 감사의 신앙고백을 드렸습니다.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내게 맡겨 주셨는지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다섯째, 예수 믿다가 병들어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여섯째,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심을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속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쁨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영결식 후, 그의 답사에서 밝힌 대로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폭도들 중 하나인 안재선을 사형 직전에 구제해 줍니다. 그리고 그 안재선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예수를 믿게 한 뒤 부산의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해 전도자로 키워 내는 놀라운 사랑의 역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피난을 가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떠나면 천백명의 애양원 식구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며 끝까지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체포되어 결국 9월 28일 공산군의 따발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두 손은 이미 총알이 관통되어 있었는데 기도하다가 맞으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처럼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고귀한 사랑의 삶을 살다가신 손양원 목사님을 우리는 사랑의 원자탄이라 부릅니다. 더 이상 사랑을 믿을 수 없다거나 복음이 정말 기쁨 소식이냐고 묻는 분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고 그분의 사랑이 녹아져 있는 애양원입니다.
무엇이 손양원 목사님의 그 숨막히는 사랑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무엇이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는 그 순간에 아홉 가지의 감사를 하게 만들고, 무엇이 아들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무엇이 모든 이들이 더럽다며 천형이라며 돌을 던지고 외면하는 나병환자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아버지가 되어주고 발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는 섬김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그의 천성일까요? 그의 남다른 의지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단 한가지 이유는 바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안에 충만하게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그러한 그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십시오. 그 사랑을 마음을 열어 맞아들으십시오. 그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심령을 가득 채우십시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그 사랑으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사십시오. 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금보다 더 큰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말씀 후 찬양 – 주님과 같이 /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기도 - 영접 기도 포함
찬양 –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기도 - 지체들을 위한 기도 / 청년들을 위한 기도 / 가정들을 위한 기도 / 세례자(김수정, 채원정)을 위해
축복찬양 –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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