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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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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은혜를 아는 사람
요한복음 12:1-8
2007. 8. 11.(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본문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귀한 장면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베다니 마을 나사로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거의 대부분의 잔치는 예수님이 손님으로 참석한 것인데, 오늘 이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러하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잔치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잔치이며, 또한 보답의 성격을 띤 잔치입니다.
복음서 다른 곳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셨는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탄식의 어조로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병 나은 자가 많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성경에 보면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잔치는 바로 며칠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너무 고마워서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서 마련한 것입니다.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 마련된 잔치로서, 어느 잔치보다도 사랑과 정성이 담겨져 있는,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잔치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가장 인상깊고 아름다운 장면은 마리아의 행동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씻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충격적이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건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교회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장면이라고도 합니다.
사실상 마리아의 행동은 대단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매우 비싼 향유로서 그 값이 삼백 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그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써, 삼백 데나리온이란 한 사람이 한 푼도 쓰지 않는 상태에서 약 일년을 벌어야 모을 수 있는 큰 돈입니다. 요즘식으로 계산하면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오만원이라고 할 때 천오백만원짜리 향유입니다. 매우 비싼 향유이지요. 그런데 이 비싼 향유를 전부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은 마리아가 어떻게 그와 같이 비싼 향유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아의 집안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였습니다. 부모없이 삼남매가 어렵게 살고 있는 집입니다. 그런 형편에 이렇게 비싼 향유를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성서학자들은 이 향유는 유대 여자들이 결혼할 때 준비하는 일종의 혼수품이고, 이 향유를 마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딸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고 짐작합니다. 넉넉지 않았던 마리아의 집에서는 가장 비싸고 유일한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자기가 가진 여러 재물 중에서 하나를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발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대단히 충격적인 행동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그 발을 씻겼다는 것입니다. 유대 여자들에게 머리털은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에는 머리털을 매우 소중히 다루었는데, 유대인들 역시 머리털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남자 앞에서 머리털을 풀고 매는 것은 결혼한 후에나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기의 소중한 머리털로 사람의 지체 중에서 가장 더럽고 하찮게 여기는 발을 씻은 것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노예나 하는 행동인데 마리아는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를 붓고 소중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입니다. 대단히 충격적이지만 정말 아름답고 헌신적인 장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목사님들과 교회가 이 장면을 통해서 헌신을 강조를 합니다. “마리아의 헌신을 본받읍시다, 마리아처럼 내게 있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바칩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교인들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치고 강조를 해도 마리아처럼 헌신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리아처럼 헌신하는 사람이 백 명에 하나나 나올까 말까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마리아와 우리는 어떤 차이가 있길래 마리아의 헌신이 우리에게서는 나타나질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의 뿌리입니다. 마리아의 헌신을 가능하게 한 그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이 엄청난 헌신을 할 수 있었던 뿌리가 무엇입니까?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평소 베다니에 자주 오셨던 예수님에게서 말씀을 경청해 들었습니다. 깊은 말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자기 오빠인 나사로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마리아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차고 넘치는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고 나니까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엄청나게 비싼 것으로 보였지만, 마리아는 은혜를 충만히 받았기 때문에 그 삼백 데나리온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아깝게 여기지고 낭비같이 여겨졌지만, 마리아에게는 그것은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이 섬기는 것과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섬기는 것은 다릅니다. 은혜를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작정 기도를 하거나 금식기도 등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저렇게까지 기도할 필요가 있나’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헌신된 봉사나 열심을 보면서도 ‘뭐하러 저렇게까지 하나’생각합니다. 그저 적당히 믿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헌금도 적지 않은 헌금을 하는 사람들을 보거나 혹은 어려운 형편임에도 헌금을 많이 드리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자기 형편에 비해서 지나치게 헌금을 많이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된 까닭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모르면 모든 것이 아까워보이고, 지나치게 보이고,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으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섬김의 봉사, 시간 낭비라도 생각되지 않습니다. 헌금 드리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은혜 받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고 기쁨 가운데 헌신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받지 않은 사람들이 일을 하면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그저 일일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문제를 일으키고, 자신도 불평불만을 하면서 하거나, 그 일이 자기 자랑이 되버리고 맙니다. 은혜받지 않고 헌금을 하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헌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속이려고 합니다. 인색하게 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아깝게만 여겨집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헌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백날 “헌신합시다”라고 떠들어봤자 헛것입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문제는 헌신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헌신은 은혜없이 안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다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은혜 받아야 합니다. 많이 은혜받으면 받을수록 마리아와 같이 귀한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춘천에 가면 댐이 여러 개 있습니다. 그 중에 소양강 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댐중에서 가장 높은 댐인데, 그 댐을 만들고 물을 채우는데 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7년 동안 물 한방울도 내보내지 않고 계속 받아들이기만 한 것입니다. 엄청난 양의 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물이 다 찬 다음에 그제서야 비로소 그 물을 내보내면서 가뭄에 있는 지역에 물을 댈 수 있었고, 그 물로 전기를 만들게 되었고, 경제 성장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먼저 받고 난 다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먼저 은혜 받아야 비로소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내 심령이 메마른 저수지 바닥 같은데 무슨 헌신을 할 수 있습니까? 먼저 채워야 합니다.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헌신도 할 수 있고 능력도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은혜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 받기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은혜를 충만히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헌신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마리아처럼 향기를 뿜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그런 사람입니다. 리빙스턴이 모든 것 다 버려두고 아프리카에 가서 헌신하고 거기서 생명을 바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받은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리빙스턴은 부흥회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를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하와이 제도의 모라카이 섬에서 나병환자들과 함께 생활했던 다미안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하와이에서 나병환자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 견딜 수가 없어 나환자촌에 가서 그 은혜를 쏟아 부은 것입니다.
지난 수련회 때 말씀드렸던 손양원 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고 나니 나병환자들이 천하보다 귀한 영혼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들의 친구로 섬겼고, 후에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는 거룩한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사역자로 나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으니까 자신의 모든 것 다 버려두고서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나 자서전을 읽어보십시오. 세상의 위인전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위인전은 온통 그 사람의 업적과 치적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는 3분의 2가 은혜받은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원래는 이러이러한 죄인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혜로 불러주시고 죄 용서해주시고 큰 은혜로 채워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결국 신앙의 위인들의 전기는 “은혜 받은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하와이에서, 이슬람에서, 공산권에서, 조국 땅에서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고자 이렇게 헌신했다”는 내용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만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은혜받은 사람이 가는 곳에 향기가 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은혜 충만히 받음으로 인해서 이 악취나는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합니다. 5절을 보면,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 하였느냐”고 비난합니다. 언듯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속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가룟 유대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면 이처럼 헌신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낭비가 뒤따릅니다. 사랑은 논리적으로나 합리적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일을 계산해서 할 수 있습니까? 나이 많은 부모님께 좋은 옷을 해드리는 것이 낭비입니까? 곧 돌아가실 분에게 간단하게 해드리지 뭐하러 좋은 옷 해드리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부모를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정말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이라면 부모님이 단 며칠을 입으시더라도 좋은 것으로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에게 들어가는 돈과 정성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모든 것 다 주고 싶고,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제적으로 따지면 낭비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낭비성을 동반합니다. 그 낭비는 아까운 낭비가 아닙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 드리는 시간과 정성과 물질이 아깝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교회들의 대부분은 교인들이 손수 벽돌을 날아 올리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금해서 지어졌습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드리는 것이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을 굳이 낭비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은 헛된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아직은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습니다. 물론 넉넉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재정적인 이유때문에 어떠한 일들을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기도 하지만 우리 교회 교인 모두가 즐거움으로 드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교회 규모에서 이미 선교센터를 운영하고, 자매들 숙소도 보조하고, 계절마다 수련회를 갖는 교회도 드뭅니다. 앞으로 유대인 선교를 위한 선교비를 매달 적립하고 유대인 선교에 힘을 쓰려고 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아깝다거나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년들을 위해 선교센터를 얻고 적지않은 운영비가 지출되지만 누구 하나도 그것을 낭비라고 아깝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습니다. 매주 집사님들께서 정성껏 음식을 해오십니다. 그러면서 힘들다고 돈이 많이 든다고 불평하거나 그만 하자고 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즐겁게 정성껏 맛있게 준비해 오십니다.
또한 매주 키부츠 청년들을 데리고 오기 위해 그리 짧지 않은 거리를 운전합니다. 한번도 힘들다거나 그만 두었으면 하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같아서는 스타렉스같은 승합차가 있어서 더 많은 청년들을 데리고 오고 싶은 것이 집사님의 마음입니다.
거리상으로 결코 가깝지 않은 예루살렘에서 오가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한국같으면 한시간 정도의 거리면 그리 먼 거리가 아니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조그만 땅에 살다보니 한시간도 멀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오가는 길을 사랑하는 교우들을 만나는 기쁨과 예배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즐겁게 내려오시고 있습니다. 오늘도 홀로 예루살렘에서 쉐룻을 타고 온 자매가 있습니다. 억지로 한 것 아닙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방 봉사로, 설겆이로, 예배 반주로, 주보 제작으로, 파워포인트 담당으로, 또한 예배 준비와 안내 등등으로 섬깁니다. 모두가 기쁨으로 모든 것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고 기쁨으로 자신의 것을 드리는 이것이야 말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모습니다. 우리는 조금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굳이 낭비라고 한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거룩한 낭비입니다. 은혜를 알기에,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에 드린 것이기에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은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했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넘기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가룟 유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7절에서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향유의 용도 중에 하나가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에 바르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까지 생각하고 한 일은 전혀 아닙니다. 그저 순수한 뜻으로 은혜에 보답하고자 마음의 최고의 표현으로 향유를 부었는데, 받으시는 예수님은 그것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크게 받으신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 주님께 드릴 때 생각밖의 결과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항상 내가 생각한 만큼의 열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열매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수하고 아름다운 헌신으로 드릴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크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지 않은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그 향유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이고 그 말씀에 감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 크게 받으시고 알아주셨다는 데 대해 아마도 그 감격과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헌신이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헌신의 하나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 역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받은 은혜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기억 나는 것만도 이렇게 많은데, 제가 기억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은혜까지 센다면 정말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받은 가장 큰 은혜는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때 받은 은혜는 정말 엄청난 것이어서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물붓듯이 부어주신 은혜를 받고 나서 저는 제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전에도 교회를 다녔고 나름대로 열심히 봉사를 했지만 그것은 봉사가 아니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받고 나서는 진정한 봉사를 했고, 나 자신밖에 몰랐던 사람이 헌신이 무엇인지 희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께 드리는 시간, 정성, 물질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제가 지금 목사가 되어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하게 된 것도 청년 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찬송가 중에 이런 곡이 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141장)
한국에 있을 때 제자훈련을 하면서 다같이 이 찬송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거의 대부분의 청년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입니까? 받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찬양이 어떤 찬양인지를 압니다. 그러기에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찬송의 4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벌레 같은 날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맙고 크셔서 눈물을 흘리지만, 눈물로는 갚을 길 없어서 주님께 이 몸을 바친다는 고백입니다. 누구의 고백입니까? 은혜를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마리아의 고백이고,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입니다.
저에게는 여러분들을 향한 꿈이 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서 마리아와 같은 귀하고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지금도 아름답고 귀한 헌신으로 섬기고 있지만 더욱 더 아름답고 귀한 헌신으로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청년들을 향해서도 꿈이 있습니다. 시편 110:3의 말씀처럼 우리 사랑하는 청년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 되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꿈입니다.
저는 이것이 진정한 부흥이라고 생각하고 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꿈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은혜를 사모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사모하기에 예배의 자리를 귀하게 여기고, 더욱 더 성령충만을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려하고, 말씀으로 훈련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부터 새벽이슬 소그룹 성경공부를 시작합니다. 청년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고, 장년층도 원하시는 분들은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이전부터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청년들이 성경공부에 대한 사모함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오매불망 성경공부할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알게 하시고 더욱 은혜를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찾는 자를 내가 만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자,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는 자,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자, 하나님께서 반드시 크신 은혜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더욱 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먼저 은혜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아가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즐거이 헌신하고, 여러분들의 헌신을 통해 아름다운 향기가 세상 가득히 퍼져나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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