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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5: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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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요한복음 15:9-17
2007. 9. 8.(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지난 한 주간 잘 사셨습니까?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붙어있어야 하고,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기도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각별한 노력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의 말씀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데, 그 열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열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표적인 열매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왤까요? 왜 사랑이 우리가 맺어야할 대표적인 열매일까요?
지난 주에 예수님이 나무시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맺어야할 당연한 열매는 예수열매, 즉 예수님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는 것이 곧 우리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님의 인격과 삶입니까? 어떠한 단어로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정의할 수 있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전생애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사랑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사랑 때문에 사람들과 함께 사셨고,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전 생애와 인격은 곧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에게서 당연히 나타나야 할 대표적인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오는 열매는 갈리디아서 5:22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와도 같은 내용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잘 보십시오. 성령의 열매가 모두 누구에게서 나타납니까? 예수님에게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는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은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충만한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 중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대표하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서도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도 중요하고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앞 내용이 성령의 은사와 관련한 내용인데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의 은사와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모합니다. 방언도 받고 싶고 예언의 은사도 받고 싶고 병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내어쫓는 은사들을 받길 원합니다.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도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은사는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모든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맺어야 할 열매 중에 가장 큰 열매가 바로 사랑입니다. 아무리 봉사 잘 하고 충성되고 절제를 잘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맺되 풍성하게 맺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앞서 본 것처럼 사랑은 성령의 은사이며 동시에 열매입니다. 은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질문합니다. 은혜가 먼저입니까? 사랑이 먼저입니까? 쉽게 말하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 없이도 내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무엇이 먼저입니까? 은혜가 먼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은혜가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깨닫고 받으면 우리에게 저절로 생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은혜 받으면 생기는 마음이 무엇입니까? 은혜 받으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받은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깨달은 은혜로 인해서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고 해주고 싶고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가 주는 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힘을 공급받지 못하면 우리는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게는 할 수 있습니다. 친절하게 대할 수 있고 잘 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힘들거나 마음이 어긋나거나 관계가 틀어지거나 상처를 받으면 금방 식어버리고 사라지고 맙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은혜가 먼저입니다.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하는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가 너무나도 귀하게 보이게 됩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단점이 있고 성격이 모나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내가 사랑해야 하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힘이고, 그 은혜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 은혜가 충만하면 기꺼이 형제 자매를 위해 희생할 수 있고 남을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사랑할 수 있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해를 끼쳤던 사람도 용서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날마다 확인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 사랑이 내 안에 충만히 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엄청난 은혜의 에너지에 떠밀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은혜가 부족한 것을 놓고 고민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사랑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혹시라도 섬기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십니까? 불평이 나옵니까? 아까운 생각이 듭니까?
내 안에 은혜가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고민하셔야 합니다. 지금 내게 부족한 것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은혜받은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형제 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에 불을 지를 때 형제 자매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슴에 불을 질러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과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미움과 원망, 앙갚음의 감정들을 다 태워 버리셔서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교회의 힘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이고 교회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인정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랑의 섬김을 보여줄 때, 사랑의 희생을 보여줄 때 세상은 우리를 인정합니다.
세상이 언제 우리에게 손가락질 합니까? 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이 사랑을 잃어버리면 뻔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교회내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기는 커녕 서로 질시하고 미워하고 분쟁합니다. 그러니 세상에 대해서도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힘이 있어서 세상에 대해서 사랑의 섬김을 하겠습니까? 오늘날 왜 교회가 세상에 손가락질 당합니까? 왜 땅에 버려진 소금처럼 짓밟힙니까?
세상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그것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온갖 비방과 욕을 해댑니다. 이번에 아프간 피랍사태를 통해 우리를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세상의 바탕이 반 기독교적인 정서이지만 그동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여준 모습들이 부정적인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을 치유할 수 있고 세상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능력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냐 라고 했을 때, 그리고 우리 교회가 무엇이냐라고 했을 때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사랑의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고,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보면서 참으로 감사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우리에게서 사랑을 봅니다. 우리 교회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사랑의 교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수 있고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섬김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거쳐간 분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친절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교인들 붙잡기 위해 잘해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섬김과 교제가 가능한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이 정도면 되지 하는 상한선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상한선을 긋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여기까지만, 이 정도까지만 하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는 그분의 모든 것을 다 주시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우리 역시 지금의 사랑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의 기준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의 목표점입니다.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사랑의 갈증이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사랑에 대해서 목마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마르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싶은 목마름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은 사랑입니다. 우리 텔아비브 욥바 교회의 능력은 사랑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순종과 동일하게 여기시고 그것을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여기십니다.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곧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즉 사랑이 순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혔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우리에게 요구하신 계명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계명의 요약이고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주님의 명령이기에 사랑하는 것이 곧 순종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서로를 사랑하면 그것을 주님께서는 곧 자신에게 대한 사랑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면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께 드리는 사랑과 섬김으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받아주시기도 하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이 새로워집니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더 깨닫게 되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님의 사랑 안에 흠뻑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20은 더욱 기가 막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하나님, 사랑해요.”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형제, 심지어는 나의 원수까지도 사랑해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감정도 아닙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 안에 거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 특별한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예수님과 비밀이 없는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 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우리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듯이 사랑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가 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상식적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친구’란 서로 비밀이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속에 있는 이야기를 다 털어놓는 사이가 친구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과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내가 알 수 있고, 내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이 다 알아주십니다. 그래서 서로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어도 다 통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와 이와 같은 우정을 나누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 약속하신 또 한가지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15:11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불과 몇 시간 후면 십자가 형을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공포가 예수님을 온통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것이 게세마네 기도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속에는 이와 같은 공포가 빼앗아 가지 못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랑하면 내가 이 기쁨을 너희에게 충만하게 채워주겠다!”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그런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기쁨이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수년 믿어도 이 기쁨이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면, 여러분은 어딘가 사랑의 감격이 막혀 있는 사람입니다. 기쁨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나, 안 하나를 증명하는 시금석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거짓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그와 같은 기쁨을 주신다고 했는데 나에게 그 기쁨이 없다면 그 잘못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이와 같이 주님과의 깊은 우정을 누리고, 주님이 주시는 그 놀라운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렇게 놓고 볼 때 우리는 사랑하기를 싫어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이와 같은 축복들을 우리가 제대로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엄청난 손해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정한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진정한 우정이 어디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사랑 안에만 그와 같은 진정한 우정과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면 지금 너무나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이와 같이 손해 막심한 신앙 생활을 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의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주님의 말씀처럼 정말 형제 자매를 예수님이 우리 사랑하듯이 사랑하고, 그럼으로 인해서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엄청난 은혜를 주고 계시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김요석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김요석 목사님은 70년대 초에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독일에서 처음에는 헤겔과 맑스를 공부하다가 전공을 바꾸어 신학을 하신 분입니다. 김목사님이 공부한 곳은 자유주의 신학이 지배적인 곳이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 웃음거리가 될 정도의 학풍이었습니다. 그러한 삭막한 신학 풍토 속에서 10년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아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돌아와 가지고 어느 신학교에서 교수들과 학생들, 목사님들을 앉혀 놓고 특강을 했는데, 그 강의가 다 끝난 다음에 한 노 목사님이 그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목사, 내가 당신 강의를 들으니까 머리로는 하나님을 조금 아는 것 같은데, 아직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것 같네요. 하나님을 한번 만나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려면 목회를 해 봐야 됩니다. 내가 주소 하나를 줄 테니까 이 주소를 가지고 찾아가서 목회를 좀 하시오.”
그 주소를 보니까 전라도 어느 지역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 보았더니 그곳은 나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소록도였고, 그 안에 있는 조그마한 나환자 교회였습니다. 아무도 반기는 사람도 없고, 집에 가서 이틀, 사흘이 되어도 밥을 해 주는 사람도 없고, 정말 어려운 목회 지역이었습니다.
그는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첫 시간에 제일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쇼크를 받았습니다. 얼굴에 구멍만 5개가 딱 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코도 없고, 입술도 없고, 눈도 한쪽이 이그러지고, 손도 다 잘려가고 남아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앉아서 은혜를 받겠다고 쳐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충격이 되었겠습니까? 한참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무슨 설교를 했는지도 모르게 황망하게 끝냈습니다. 그리고 광고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에 부임했으니까 여러분들하고 인사할 수 있도록 기다리십시오.”
축도를 하고 눈을 떠보니 예배당 안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잘 됐네. 잘 못하면 손도 잡아 봐야 되는데, 다 가고 없으니 너무 잘 됐네.’하고 안도의 숨을 쉬며 교회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전부 일렬종대로 서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맨 처음에 악수한 사람은 얼굴에 구멍만 다섯 개 나 있는 바로 그 남자분이었습니다. 그와 손을 잡고 인사했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악수한 사람은 어떤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 역시 손이 없어서 손목을 가지고 악수를 하는데, 거기에는 만지면 터질 것 같은 고름 주머니 같은 것이 달려있었습니다. 무척 망설여졌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할머니의 손을 안 잡아주면 얼마나 섭섭해하실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 손을 잡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는 얼마나 좋으셨던지, “내가 16살 때에 문둥병이 걸려 가지고 수용소에 와서 여기서 60년을 사는 동안 내가 한번도 성한 사람 손을 잡고 악수해 본 일이 없는데, 목사님이 오셔서 이렇게 손을 잡으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하고 감격하면서 손을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김목사님의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불이 내린 것처럼 가슴이 달아올랐습니다. 그 때 그에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손이 바로 예수님의 손이구나! 독일에서 공부할 때 어떤 교수가 날 보고 ’너 하나님 봤냐? 하나님이 황인종이더냐? 백인종이더냐? 하나님의 손을 잡아 봤냐? 차더냐? 덥더냐?’하고 질문할 때 한마디도 대답을 못했는데, 하나님의 손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바로 이 할머니가 예수님이시구나.’
그만 불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 동안 일하기로 하고 그곳에 갔는데, 하루에 한끼 먹는 일이 허다한데도 지금까지 나병환자들을 돌보는 사역을 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독일에서 그의 주임교수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내가 은퇴할 날이 가까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후임으로 너밖에 없다. 빨리 들어와라.” 독일에서 교수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그것도 동양인 목사를 후임으로 세우겠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러나 김목사님은 그 편지를 받고 아무리 기도해 봐도 자기 한 몸 호강하겠다고 양떼들을 버리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못 갑니다. 교수님”하고 편지를 써 보냈는데, 또 편지가 왔습니다. 아무 말 하지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 떼를 버려 두고 갈 수 없노라고 또 다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얼마 후에 그 교수가 직접 그를 찾아 왔습니다. 와 가지고는 그가 목회하는 것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고 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김목사는 한국에서 예수님 손잡고 목회하고 있더라”하고 소문을 냈습니다.
김요석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참으로 목숨 걸고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그 목사님처럼 자유함이 있어. 남이 모르는 기쁨이 있어. 무엇에든지 매이지 아니하는, 또 뭔가 주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경지가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그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한순간도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중국에 나환자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김목사님은 중국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80년대 초반이라 아직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국교가 맺어지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나환자촌이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공무원들은 그저 입에 발린 대답만 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상 천국인데 무슨 나환자가 있소?”하면서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기도하면서 수소문했는데, 마침내 나환자촌의 업무를 감당하고 있는 고위층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그곳으로 안내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그곳에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국 공무원은 조금 이상한데가 있었습니다. “당신, 정 그게 그렇게 소원이라면 나하고 내기 하나 합시다.”
“무슨 내기를 할 까요?”, “주량이 누가 센지 한번 내기합시다. 그래서 술을 놓고 당신하고 나하고 내기해서 당신이 지면 못 가는 거고, 내가 지면 안내하지요.”
그래 가지고 어느 방에 앉아서 누가 주량이 센가를 내기하기로 했습니다. 빼갈이라는 술을 잘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독한 술인지 큼직한 잔에다 가득 부어 놓고 성냥불을 탁 대니까 불꽃이 확 붙었습니다. 목사가 언제 이런 술을 입에 대보기라도 했습니까? 그는 술잔을 놓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 잔을 마셔야 되는지 아시지요? 도와 주세요.”
그리고는 잔에다 입을 댔는데, 잔 속에 든 것이 술이 아니고 물이었습니다. 그냥 쭉 들이켰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의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와, 대단하시네요. 한잔 더 합시다.” 그 다음에 또 한 잔을 마셨습니다. 역시 그가 마시는 것은 물이었습니다. 지기 싫었는지 상대방은 또 한 잔을 더 하자고 했습니다. 세잔 째도 동일하게 물이었습니다.
상대방은 이미 세 잔도 채 마시지 못해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기적적으로 내기에 이겨 결국 그는 나환자촌에 찾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중국의 변방 신강성에 사는 몽고·터키 계 위구르 족 나병 환자들을 10년 가까이 돌보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만 소개합니다.
하루는 김목사님이 하두 배가 고파 흙을 파 연한 모래로 만두를 빚어 먹었답니다. 너무 배고프니까 연한 모래는 괜찮겠지 싶어 그리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것 때문에 맹장염에 걸렸습니다. 동네에 병원이 하나도 없어 할 수 없이 가축 방역실을 찾아 칼을 빌려 직접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저 덧나 급기야 사경을 헤매게 됐습니다.
온 몸에 종기가 돋고 퉁퉁 부어오른 김목사님의 주위에 위구르족 환자 신도들이 모여들어 떨어져나간 팔과 입으로 밤새껏 주무르고 핥으며 안마를 했습니다. 김목사님의 몸뚱이는 환자들의 팔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으로 범벅이 됐고, 그 고름이 굳어져 마치 온 몸에 장화를 신겨 놓은 형국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굳어진 고름을 벗기고 보니 종기가 싹 가셔있었답니다. 나병 환자들의 고름이 김목사님의 종기를 치유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김요석 목사님의 간증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감동적인지 정말 살아있는 성자, 살아있는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김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야, 진정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생명 걸고 형제를 사랑하기를 원하는 자는 주님이 꽉 붙들고 한순간도 놓지 않으시고 어떤 상황에서도 도와주시는구나. 필요하면 이런 놀라운 이적도 베푸시고 은혜를 주시는구나.’하고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은 이상적인 사랑을 하지는 못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옆에 있는 형제자매 하나라도 주님이 명령한 대로 사랑하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과 우정을 나누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아 누리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어떤 문제가 있지 않니? 네가 하는 섬김에 문제가 있지 않니? 인간 관계의 문제도 있을 거고, 경제적인 문제도 있을 것이고, 여러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 어려울수록 더 사랑하라. 고통이 있을수록 더 사랑하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두려움을 걷어버릴 것이다. 그 사랑이 아픔을 덮어 줄 것이다. 그 사랑이 마음속의 근심을 덜어 줄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명령하시는 것을 우리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주님의 이 음성을 듣고 돌아갈 때 우리 가슴을 성령께서 뜨겁게 하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더욱 사랑할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사랑하지 못하던 자들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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