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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없다

요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130 추천 수 0 2013.03.15 21:5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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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19-29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실패는 없다
요한복음 20:19-29
2007년 9월 15일(토) 텔아비브 욥바 교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부활주일에 하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예수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인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과의 차이를 아십니까? 그 말이 그 말 같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외치는 신앙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주님’은 무엇이냐? 예수 부활을 외칠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만남으로 부활의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부활주일만 되면 일년에 한번 “예수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예수 부활 신앙’입니다. 그 삶 속에서 부활 신앙의 모습이 없다면 그것은 입으로만 말하는 ‘예수 부활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부활절이 하나의 연례적인 행사이고, 부활 역시 부활절 때나 한번 이야기하는 소재에 불과합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도, 부활주일에는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말씀도 듣고 하지만 나머지 기간 동안은 예수 부활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시대가 있었는데, 그런 시대는 교회의 등불이 가물가물하게 꺼져 갔고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 유혹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상실한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을 외칠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고백하고 자랑하고 찬송하며 그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대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하는 체험적인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 연례 행사처럼 치르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부활’을 말하는 나의 믿음이 ‘부활의 주님’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과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여기에 비해 부활의 주님은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은 지적인 내용인 반면에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인 실존입니다. 예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지만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예수 부활은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을 주목하게 만들지만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는 주님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수 부활만 믿고 예수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칫 입술만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부활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와 아무 교제도 나누지 않으며, 자기 삶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간섭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에게 어떤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무덤에 누어있는 시체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진정한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따라 와야 합니다. 그분을 날마다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안 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아니 가깝게 우리 교회 안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벤허’라는 영화를 아시죠? 벤허, 그 뜻은 ‘허씨 집안의 아들’이란 뜻인데, 제가 지금까지 보았던 영화 중에 가장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요즘 흥행하는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감동의 차원이 다릅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그 긴 시간과 큰 화면과 마차 경기를 하는 장면 때문에 감동을 받았는데, 몇 번 그 영화를 보다 보니까 이 영화의 포인트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월러스(Wallace)라는 사람이 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월러스가 그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자였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구가 들려준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벤허’를 쓰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시대를 알아야 했기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고스란히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게 투영시켰습니다.

벤허라는 사람은 원래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벤허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벤허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영화의 포인트이자 중심 메시지이자 피날레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치고 변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의 신앙을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저 입으로만, 부활절 때만 ‘예수 부활’을 말하는 신앙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만나고 느끼고 경험하고 그 은혜와 능력을 공급받는 신앙으로 변화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은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변화되는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 첫째는 두려움에서의 해방과 더불어 참된 평화를 주셨습니다.

  19절에 보면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모여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고, 무서워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왭니까?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과 로마 정부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잡아들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입니다. 문을 닫았다고 표현했습니다만 이것은 문을 이중삼중 겹겹이 걸어 잠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걸어 잠근 것은 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의 문까지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쇠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있으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겠습니까? 꽁꽁 얼어붙은 것은 그들의 마음뿐이 아니었습니다. 온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이지요. 그러니 제자들 오죽이나 놀랬겠습니까?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24장 37절에 보면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했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귀신 아닌가? 하면서 질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럴만도 하지요. 주님은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때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 안심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못박힌 손을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한편 기쁘기도 했지만 더욱 두려웠습니다. 주님을 뵐 면목 없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겁이나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모진 고통을 다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건져보겠다고 숨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현장에 얼굴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주님 뵐 면목이 없었고, 주님의 책망이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반역자들, 배신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19절과 21절에 두 번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한마디에는 제자들의 주님을 배반했던 모든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신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한마디에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되어졌고, 그들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와 두려움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청년 사역을 하시는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20대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포입니다. 겁없이 인생을 살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 제일 큰 문제, 많은 젊은이들이 가장 고심하는 문제가 공포,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말을 따르면 젊은이들은 장래 문제를 놓고 은근히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취직을 해야 되는데 앞으로 어떤 직장에 취직을 해야 되는가?’하고 걱정하다 보면 불안이 쌓이고 공포가 된다고 합니다.

‘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암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같이 공부하고 다 졸업을 하지만 나중에 2,30년 후에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밀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가지각색의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불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세계 건강 식품 업계의 황금시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에 좋다 하면 개똥을 들고 나와도 떼돈 벌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나라가 건강 식품을 수입하는데 쓴 돈이 1조 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에 공포와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몸이 약해서 내가 하던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하는데 대한 불안과 공포가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그 모든 공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나 공포를 극복하고 담대하게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 할 수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그 모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발로 밟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분이 된 이상,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샬롬. 평안이 있을 지어다.”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고, 무릎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들을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 있는 두려움과 공포는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사건이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셨을 뿐만 아니라 t사명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21절 후반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여러분들은 복음속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믿습니까? 복음 속에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역사가 사는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자랑은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무슨 말입니까? 배신자들을, 반역자들을 다시 불러 중용해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물투성이, 문제투성이, 여전히 부족한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불러 신뢰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지만 다시 불러 쓰시겠답니다. 책망을 받고 매를 맞아 마땅한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높여 사용하시겠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러나 제자들을 보내실 때 한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자들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삶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라” 그 얘기 아니겠습니까? 이제 제자들의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마늘 한쪽을 먹어도 냄새가 납니다. 하물며 부활의 능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데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겠습니까? 입을 벌리고 살아가는데 예수가 증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 엄청난 부활의 능력을 간직하고 살아가는데 우리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부족하니 주님이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전에 한번 두 번 실패했다고 주님이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수하고 죄를 지었다고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헛된 곳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요나의 인생이 끝났다 할지라도 요나는 할 말 없는 존재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다시 불러 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도망가던 자리에서 내 인생이 끝장났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다시 우리를 들어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주님을 날마다 만남으로 여러분들의 사명이 늘 확인되길 바랍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오늘 본문은 평강과 성령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와 성령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 능력있는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슬픈 자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냉혈적인 사람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비겁하게 도망가던 반역자들을 다시 불러 영광스러운 천국의 사도로 삼아주시고 순교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주님의 숨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까?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바로 그 생기를 말합니다. 주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니 Living Soul -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창세기에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몸은 흙의 요소가 있고 생기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기의 요소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향하여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체가 됨이라”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호흡을 빼버리고 나면 우리는 흙덩이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간들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악의 짐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육체만 남은 생기가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창조주의 숨결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말씀은 에스겔 골짜기를 연상케 해 줍니다. 말라빠진 뼈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부활하신 주님의 호흡이 불어닥치면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에게 우리 영혼에 숨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코를 그분의 가슴에 들이박고 그분이 숨을 내쉬며 성령의 호흡을 우리에게 불어주실 때 성령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받지 못하면, 예수의 숨을 받지 못하면, 하늘 호흡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땅에 아무리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할지라도, 아무리 권세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힘있는 사람이 된다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헛바람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을 숨쉴 때에 헛바람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네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죄의 능력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23절입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사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요. 사람이 누구의 죄를 사한다고 그 죄가 용서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때문에 이 말은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성도들은 이제 정죄하던 삶에서 벗어나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미움의 삶에서 이제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도 미워할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할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미워할 권세가 우리가 없습니다. 이제는 용서할 권세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용서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믿음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람이 바로 도마입니다. 본문을 통해 보는 것처럼 그는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아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믿지를 못했습니다. 더 그는 자기가 만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잣대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자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잣대가 무엇입니까?  25절,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믿겠다”

  그는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못자국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심하겠다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몇 년 전에 뉴스위크지에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한 어느 과학자의 죽음에 대 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는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입니다. 그는 골수암에 걸려서 투병하다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그리고 그가 주는 영생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더 알기를 원해서 여러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병상에 있을 동안에도 여러 교회에서 그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본 입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없는 한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요,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지론이 그의 입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국의 큰 기독교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목사님과 믿음에 관해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 중에 그는 그 목사님께 너무나 답답하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자 목사님은 그의 말을 받아 거꾸로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가?”

  계속 대화를 나누는 중에 목사님이 그에게 또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사랑을 믿는가?”

  그러자 그는 아내를 몹시 사랑하던 사람인지라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또 질문을 했습니다. “사랑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가?”

  그는 처음에는 당연히 입증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양심이 있는 지라 결국 사랑에는 입증하지 못할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사랑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사랑을 부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사고일 것입니다.

그는 대화를 주고받는 가운데 신앙에 관해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입증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부인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다음에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믿음을 갖고자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알고자 했을 뿐이다.”

  알고자 하는 사람과 믿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습니다.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사람은 만사를 자기 잣대를 가지고 재어보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칼 세이건 박사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8절)

  예수님은 도마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이 예수님을 만나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듭니다. 소망이 없는 자가 소망을 갖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가 분명한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믿음을 가진 자의 세계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보는 자의 눈에는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날마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 날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시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때는 의심 때문에 흔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나를 꽉 붙들어 주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은혜를 우리가 체험합니다.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꾸 변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 에 변화가 분명 일어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아리조나나 유타주에 가면 거대한 협곡들이 많습니다. 빗물이 모여 가지고 시내를 이루고, 시내가 강을 이루어서 흘려가면서 바위들과 대지를 침식해 가다 보면 커다란 캐년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그랜드 캐년을 보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도 하도 또 한편으로는 빗물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캐년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빗물이 일년에 1mm씩만 바위를 깎아 내린다고 가정해도 만 년이면 10,000mm 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은혜를 받으며 변화되는 우리의 모습 역시 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변화는 눈에 금방 안 띌 수 있습니다. 1mm 아니 10분의 1mm 정도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보면 우리는 누구를 닮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은 부활의 주님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흠이 없고 티가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과 교제하면서 살면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슬픔이 떠나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만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실패는 없습니다. 실패한다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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