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
성경본문 : | 요16:32-33 |
---|---|
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2013.4.21 주일 |
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 16:32-33.
불교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과 인생을 고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생과 고통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 살면 살 수록 그냥 설명없이 마음과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참 사는 건 힘들고 만만치 않습니다.
고통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가벼운 감기처럼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작은 고통이 있지만 세상에는 그 고통의 정도와 깊이가 크고 깊어서 우리의 생명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큰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고난은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와 같은 환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33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환난을 당할지도 모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예 단정적으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환난을 만나고 그 때문에 고통 정도가 아닌 고난을 격는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환난과 고난을 주는 까닭은 세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와 시스템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의 책임도 있습니다.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 만든 그래서 자초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거나 숨기고 무조건 자신의 고난을 자초한 고난이 아닌 당하나 고난으로만 설명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분명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고 세상에 있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원인과 책임이 세상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당연히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 네 책임이라고, 세상 책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주장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이 그 책임을 져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세상을 바꿀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억울한 고난을 주지 않은 완벽한 세상과 세상의 고조를 만들고 바꿀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이 들어온 후부터 단 한번도 사람에 의하여 그와 같은 고난과 고통이 사라진 완벽한 세상이 세워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단 한 번의 예외를 이야기 한다면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거듭난 초대교회 공동체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세상을 향하여 그 잘못됨과 왜곡됨을 웨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싸우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그것이 정의라는데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우리의 정의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억울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서 저들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싸움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끝도 없는 지리한 싸움을 하는 동안 저들은 그 고통과 고난에 함몰되어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식과 법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하심으로 옳지 않은 세상과 싸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고통과 고난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과 싸워야 하지만 세상과 싸운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어 고난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고 왜곡된 억울한 세상에서 당하지만 않고 그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법을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는 왜곡된 세상에서도 그 세상에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승리의 웨침을 웨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이해인 수녀의 <겨울 길을 간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해인 수녀는 수녀로서의 인간적인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겨울 숲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가난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의 겨울 숲길을 홀로 가는 것과 같은 그의 삶은 당연히 불행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함 속에도 행복이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 이유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합니다.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그의 고운 별은 하나님입니다. 가슴에 묻은 그 고운 별 하나 때문에 가난하고 외로운 겨울 숲길을 행복하게 걸어갑니다.
그의 행복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봄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고운 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제자라고 지금까지 나를 따라 나와 함께 하였지만 얼마있지 않아 너희들은 다 나를 버려두고 흩어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합니다. 아마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가장 큰 이유와 원인이 이것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자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그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아멘.
저는 세상이 바뀌어야만 사람들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환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이 바뀌는 신기루를 좇다가 그 세상의 사막에서 다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상과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일을 그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와 같은 일에 쓰임 받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입니다. 해인 수녀가 자신의 시에서 고백하고 있는 그 믿음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세상 바뀌기 전에도 승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세상이 혹 바뀐다고 하여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어떤 세상에서도 당하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 16:32-33.
불교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과 인생을 고해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생과 고통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 살면 살 수록 그냥 설명없이 마음과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다. 참 사는 건 힘들고 만만치 않습니다.
고통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가벼운 감기처럼 그냥 왔다가 그냥 가는 작은 고통이 있지만 세상에는 그 고통의 정도와 깊이가 크고 깊어서 우리의 생명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큰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고난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고난은 환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와 같은 환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33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환난을 당할지도 모르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예 단정적으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환난을 만나고 그 때문에 고통 정도가 아닌 고난을 격는 일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환난과 고난을 주는 까닭은 세상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조와 시스템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의 책임도 있습니다. 당하는 고난도 있지만 자기가 스스로 만든 그래서 자초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거나 숨기고 무조건 자신의 고난을 자초한 고난이 아닌 당하나 고난으로만 설명하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비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분명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고 세상에 있는 억울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의 원인과 책임이 세상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당연히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니라 네 책임이라고, 세상 책임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주장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이 그 책임을 져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세상을 바꿀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억울한 고난을 주지 않은 완벽한 세상과 세상의 고조를 만들고 바꿀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이 들어온 후부터 단 한번도 사람에 의하여 그와 같은 고난과 고통이 사라진 완벽한 세상이 세워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단 한 번의 예외를 이야기 한다면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거듭난 초대교회 공동체 정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되고 왜곡된 세상을 향하여 그 잘못됨과 왜곡됨을 웨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싸우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그것이 정의라는데 백 퍼센트 동의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우리의 정의 때문에 세상이 바뀌어지고 그로 말미암아 억울한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의 편에서서 저들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 세상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 싸움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난당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같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끝도 없는 지리한 싸움을 하는 동안 저들은 그 고통과 고난에 함몰되어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고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하나님의 식과 법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하심으로 옳지 않은 세상과 싸우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 그 고통과 고난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과 싸워야 하지만 세상과 싸운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어 고난의 문제가 다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고 왜곡된 억울한 세상에서 당하지만 않고 그 싸움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법을 하나님을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는 왜곡된 세상에서도 그 세상에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되고 어그러진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승리의 웨침을 웨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에 이해인 수녀의 <겨울 길을 간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해인 수녀는 수녀로서의 인간적인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겨울 숲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가난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러므로 그의 겨울 숲길을 홀로 가는 것과 같은 그의 삶은 당연히 불행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는 놀랍게도 '행복'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난함 속에도 행복이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 이유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근사하게 표현합니다.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그의 고운 별은 하나님입니다. 가슴에 묻은 그 고운 별 하나 때문에 가난하고 외로운 겨울 숲길을 행복하게 걸어갑니다.
그의 행복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봄이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가슴에 품고 있는 '고운 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제자라고 지금까지 나를 따라 나와 함께 하였지만 얼마있지 않아 너희들은 다 나를 버려두고 흩어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고통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을 때 가장 고통스러워합니다. 아마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가장 큰 이유와 원인이 이것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때문에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자신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그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 아멘.
저는 세상이 바뀌어야만 사람들의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 믿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말 환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이 바뀌는 신기루를 좇다가 그 세상의 사막에서 다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세상과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일을 그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와 같은 일에 쓰임 받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기쁩니다.
그러나 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로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입니다. 해인 수녀가 자신의 시에서 고백하고 있는 그 믿음입니다.
그것이 있다면 세상 바뀌기 전에도 승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세상이 혹 바뀐다고 하여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세상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 어떤 세상에서도 당하지 않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