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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도는 없다 (There Are No Such Prayers)
요한복음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063 추천 수 0 2013.06.21 21:56:53성경본문 : | 요6:4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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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요한복음 6:47-51
1.
요즈음 많은 분들이 올림픽 경기를 즐기고 계십니다. 저도 틈틈이 인터넷을 통해 주요 경기 장면을 따라 잡고 있습니다. 우사인 볼트의 질주 모습은 보고 또 보아도 경탄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어쩌면 그렇게 멋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는 모습도 참 보기에 좋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기독교인 선수들이 우승 후에 하는 '기도 세리머니'에 대해 말이 많은가 봅니다. 축구의 박주영 선수가 골을 넣을 때마다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는 유도의 김재범 선수가 결승에서 상대방을 이긴 다음 매트에 무릎을 꿇고 "주여!"라고 외치며 기도하는 모습이 방송을 타고 나가면서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고 합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 중 하나가 풋볼 선수 팀 티보(Tim Tebow)였습니다. 당시 덴버 소속 풋볼 팀의 쿼터백이었던 티보는 햇빛의 반사를 막기 위헤 눈 밑에 칠하는 검정에 <John 3:16>이라고 적고 경기를 할 정도로 자신의 신앙 고백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터치다운을 할 때마다 한쪽 무릎을 바닦에 꿇고 기도하는 세리머니를 했습니다.
이렇게 신앙 고백에 적극적인 티보가 프로 풋볼에서는 통하기 어려운 실력으로 몇 게임을 승리로 이끌자, 그의 기도 세리머니는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미숙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그가 승승장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기도 세리머니에 열광했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의 기도 세리머니가 십자군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몇 달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티보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티보가 하는 기도 세리머니의 독특한 포즈는'Tebowing'이라는 고유 명사가 되었고, 좋은 뜻으로 혹은 빈정대는 뜻으로 그것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2.
만일 티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기도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끌어들이는 수단이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기도가 아닙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신의 힘을 끌어 들여서 자신의 적을 이기려고 용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들은 자신에게 와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옳게 행동하고 있는지 어떤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믿는다는 잡신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강한 놈이 무조건 이기는 것이 잡신의 세계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은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에게 잘 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잘 해 주는 분별없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은 절대 진리(perfect truth)의 하나님이요, 절대 정의(perfect justice)의 하나님이며, 절대 선(perfect goodness)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분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내 편이시니, 무조건 내 편을 들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보다 내가 더 쎄게 기도하여 이기리라"는 말도 하나님 앞에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원리를 말하자면, 기독교에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실제를 말하자면 불행히도 기독교에 그런 기도가 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당이나 점쟁이들이 섬기는 잡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을 잡신의 차원으로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해도 분수 없이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기도를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이 실은 하나님을 더 심하게 모독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운동 선수들의 기도 세리머니에 대해 트집잡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 인생의 최고의 순간에 그 영광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에게 돌린다는 것은 대견한 일입니다. 시합 전에 겸손히 기도하면서, 자신이 믿는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최선을 다하도록 마음을 다잡는다면, 그것은 매우 성숙한 믿음입니다. 식당에서 다른 사람의 눈길이 부담되어 늘 하던 식사 기도를 빼 먹는 사람들의 수준에서 본다면, 수만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다만,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공개적인 신앙고백은 언제나 절제되어야 합니다. 과시하는 신앙고백은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절제된 신앙 고백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반면, 승리의 순간에 "저와 함께 해 주셔서 저 선수를 이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는 잘못입니다. 시합 전에 기도하면서 "주님이 저의 편이시니 제게 힘을 주셔서 제 상대를 이기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도 잘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일뿐 아니라 내 상대의 하나님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지게도 하시고 이기게도 하십니다.
아브라함 링컨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북 전쟁이 한창일 때, 어느 목사가 링컨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지요. "주님께서 각하와 북군의 편에 서시도록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링컨 대통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누구의 편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직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옳으시기 때문입니다."( Sir, my concern is not whether God is on our side; my greatest concern is to be on God's side, for God is always right.)
3.
오늘 저는 교회력에 따라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며,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51절)
오늘 읽은 본문에 이어지는 부분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심한 혼란에 빠집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유행하는 말로 '멘붕'이 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52절)라고 수군거리자, 예수님은 한 술 더 뜨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53절)
"내 살을 먹으라"는 말에 혼란스러워하자 한 술 더 뜨십니다. "내 살을 먹으라는 말에 놀라느냐? 더 놀라운 말을 해 주랴? 내 살만이 아니라, 내 피도 마셔야 너희가 산다." 이런 상황에서 요즈음 아이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헐~"
'살을 먹으라'는 말도 듣는 사람에게 혐오감을 던져 주지만, '피를 마시라'는 말은 더 더욱 혐오스러운 말입니다. 구약에 의하면,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그 어떤 짐승의 피도 마시면 안 됩니다. 하물며,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운 일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결국 예수님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혼란을 겪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고개를 흔들며 떠나간 후,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립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0절)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62-63절)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참 어렵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한 사실이 하나 보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고 '살'은 인간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피'는 몸 속을 순환하고 있는 붉은 액체가 아니고, 그분이 말씀하는 '생명'은 '목숨'과는 다르며, 그분의 말씀에서 '죽음'은 검시관이 판단하는 '사망'이 아니며, 그분이 말씀하시는 '영생'은 이 땅에서 한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물질과 육신과 땅에 국한된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관'(worldview)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삽니다. 말로 정연하게 표현하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믿는 세계관에 따라 행동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과 예수님의 세계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죽고 사는 것이 전부인, 오직 물질로만 되어 있는 세계를 믿었던 반면, 예수님은 그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더 큰 세계를 보셨고 믿으셨습니다. 그것을 그분은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셨지만 이 땅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광활하고 신비한 하나님 나라를 알고 그 나라를 사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었기에 그분은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 나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죽고 사는 차원을 넘어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당신의 영을 마시고 당신의 가르침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4.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아, 허무 맹랑한 소리 좀 그만 하십시오. 맑은 하늘에 어디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단정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현대 과학이 더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있어 보십시다. (멈춤) 제가 말을 멈추자 갑자기 조용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지구가 자전하고 공전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굉음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도 이상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우리의 귀를 고안하셨기 때문에 듣지 못할 뿐입니다. 듣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깥에 나가 텅 빈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낮에는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밤이 되면 별이 보입니다. 대낮에 텅 빈 하늘을 보면서 "저 하늘에 뭐가 있다고 그러느냐?"고 장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밤이 되어 멋적어질 것입니다. 천문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 가운데 수 많은 별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별에서 발산한 빛이 지구까지 여행해 오는 수백, 수천 광년 동안에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밤에 우리 눈에 보이는 별들조차 다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이렇다면,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전부라고 과신하고 단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창조 세계를 관찰하면서 그곳에서 문득 문득 창조주의 손길을 발견하고 무릎 꿇어야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신비로운 영적 존재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세계관에 대해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신 일들과 그분에게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분의 세계관이 옳은 것은 아닌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던 그 세상이 진실이라면, 그 세상에 눈 뜨고 그 세상을 살도록 손을 써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그 세상, 즉 하나님 나라에 접속하는 일입니다. 기도할 때 눈을 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눈 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눈 뜨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컴퓨터를 통해 새로운 세상에 접속하여 가상 공간을 헤엄쳐 다니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즐기는 것처럼,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접속하여 그 나라 안에서 헤엄쳐 다니며 그 나라를 즐기는 일입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다시 눈을 떠 현실을 보면, 그 현실이 달라져 보입니다. 눈 앞에 있는 현실이 전부인 것처럼 보였는데, 기도하고 눈을 뜨면 그 현실이 축소되어 있음을 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에 접속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래도록 아주 깊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심각하게 기도하셨을까요? 죽음이 두려워서 그랬을까요? 물론,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분은 이미 살고 죽는 차원을 넘어 살고 계셨습니다.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보는 것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에 조화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여 적들을 이기기 위해서 그랬을까요? 그럴 수는 있었지만 그러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 기도를 마치고 성전 경비병들이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가 칼을 빼어들어 공격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류하며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 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52-54절)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심각하게 기도하셨을까요? 그분은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당신이 거쳐야 할 과정을 미리 내다 보시고, 그 모든 과정을 거치기에 충분한 영적 능력을 얻으려는 기도가 아니었겠습니까?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믿음은 결코 흔들 수 없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그 이후의 길에서 아무 말 없이 모든 모욕과 고난을 그대로 끌어 안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걸으셨습니다. 살고 죽는 것을 넘어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눅 23:34)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만이 자신을 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진실로 용서하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고 믿게 하는 통로는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5.
오늘 오후 5시에 우리는 조영진 목사님께서 감독으로 선임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배를 올립니다.
이미 목회 칼럼을 통해 말씀드린 것처럼, 조 목사님의 감독 선출 과정은 참으로 드라마틱했습니다. 아마 누군가가 드라마를 이런 식으로 썼다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비판했을 것입니다.
모두 다섯 명의 감독을 뽑는 과정에서 네 명은 순조로이 선출되었습니다. 문제는 다섯 번째 감독을 뽑는 과정에서 생겼습니다. 전체 투표자 440명 중에서 60% 즉 260표는 얻어야 당선이 되는데, 몇 번을 해도 그만한 표를 얻는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첫 날, 다섯 번을 거듭해도 당선자가 나오지 않았고, 108표로 시작한 조 목사님의 득표수는 점점 떨어져 15표까지 내려갔습니다.
첫 날을 지내고 다음 날 다시 투표를 시작했습니다. 또 다시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투표를 계속했습니다. 조 목사님의 득표수는 여전히 바닦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투표를 반복할수록 조 목사님의 득표수가 조금씩 높아지더니, 아홉 번째 투표 때에는 선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열 두 번째 투표에서, 처음부터 따지면 스물 아홉번째 투표에서 287표를 얻어 감독에 선출되셨습니다. 이 드라마틱한 과정을 그래프로 그려 보았습니다.
'바닥을 친다'라는 말의 뜻을 이 그래프처럼 잘 보여주는 그림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총 29회의 투표 과정에서 조 목사님은 서서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내려갔다가 바닥을 치고 부활하여 승천하셨습니다.
감독 성별 예배를 위해 현지에 도착했을 때, 버지니아 연회의 대표들 중 여러 명이 제게 다가와 흥분한 어조로 말합니다. "한인 교회가 능력 있는 기도로 유명한 줄은 알았지만, 이번에 그 기도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 말에 저는 겉으로 고맙다고 반응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잠깐, 잠깐! 그건 아닌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의 기도가 다른 후보자들을 위한 기도보다 더 강해서 조 목사님이 이겼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우 중에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없었습니다. 그런 분이 한 분이라도 있었다면, 저는 그분에게 상처를 줄 수 없기에 이런 설교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더 쎘기 때문에 조 목사님이 전세를 역전시켰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시합을 앞두고 "주님, 주님의 능력으로 제 상대를 거꾸러뜨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운동 선수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에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조 목사님을 바닦에서 끌어 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영향을 미쳤다면, 대표들로 하여금 거듭 투표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여러 번 투표를 반복한 것입니다. 그들은 무려 열 일곱 번이나 투표를 거듭하면서 그 뜻을 찾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가 영향을 미쳤다면,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조 목사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잠잠히 그분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도록 영적인 힘을 불어 넣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 날, 동행했던 David Ryu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제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젊은 목회자 한 사람이 David 목사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조 목사님이 기도의 사람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David 목사님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느꼈느냐?"고 되물었더니, 대답이 이렇습니다. 29회나 반복된 그 지루한 투표 과정에서, 또한 열 다섯 표로 떨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드라마틱하게 솟아오르는 과정에서 조 목사님의 표정과 태도가 변함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태도와 자세를 지키도록 만든 것이 그분의 기도의 힘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상대방과 싸워서 이길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끌어다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접속하여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보게 해 주는 힘입니다. 경기에 앞 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큰 시각으로 당면한 경기에 임하는 것입니다. 승패를 떠나 진정한 승리를 위해 마음을 쏟게 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고는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감사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승리했을 때 패자를 위로해 줄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고, 패했을 때 승자를 축하하며 자신의 몫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조영진 감독님은 이번 감독 선거 과정에서 바비 리차드슨(Bobby Richardson)의 기도를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뉴욕 양키즈의 전설로 남아 있는 그는 기도를 통해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바비 리차드슨은 늘 상대편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승리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오직 당신의 뜻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멘.
Dear God,
Your Will,
Nothing More,
Nothing Less,
Nothing Else.
Amen.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더욱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나라에 접속하십시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내어 그 나라에 접속하고 그 나라에서 거니십시다. 오직 물질, 오직 육신, 오직 목숨에만 묶여 있는 우리의 좁다란 세계관을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그 광활한 세계를 보십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육신의 눈을 감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그 나라를 상상해 보십시다. 그렇게 그 나라를 사모하고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보여 주기도 하십니다. 눈을 뜨고 살아가면서 순간 순간 드러났다 사라지는 하나님의 옷자락에 주목하십시다.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 나라가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서 우리의 현실을 다시 대면할 때면, 그 현실은 전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던 고난의 짐은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 어떤 풍파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성공과 번영으로 인해 마음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차분해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번영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님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면 어떤 상황에서도 은은한 하늘의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올릴 기도이며, 바로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나를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마음으로 짐작하고 '아멘!'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그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늘을 향해 눈길을 두고 빙긋이 웃는 것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영원에 관한 소식을 어찌 말로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삶으로만 경험하고 삶으로만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 땅에서 영원을 사셨던 주님,
이 세상에 갇힌 저희에게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신 주님,
저희에게도 그 나라를 알게 하소서.
기도로써 늘 그 나라에 접속하게 하시고
그 나라를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나라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게 하시고,
견고한 걸음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게 하시며
견고한 손길로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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