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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7:20-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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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3년 5월 12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0)
"춤 추시는 하나님"(Our Dancing God)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습니다
--요한복음(John) 17:20-26
1.
우리는 그 동안 '사도신경'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성령에 대해 각각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사도신경'의 후반부에 나오는 몇 가지 신조들(articles of faith)에 대해 살펴 볼 차례인데, 그에 앞 서 '삼위일체'(the Holy Trinity)에 대해 한 번 더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실상 세 개의 신조(three articles)를 본 셈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I believe in God the Father.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I believe in Jesus Christ.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I believe in the Holy Spirit.
이 세 개의 신조를 하나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I believe in God the Father, God the Son, God the Spirit, one triune God.
'삼위일체'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 각각 다른 분인데(三位, three persons) 그 세 분이 하나가 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해 일하신다(一體, one body)는 믿음입니다. 이 교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은 4세기 경인데, 그 이후로 이 교리는 정통 신앙과 이단 신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만, 교회가 '삼위일체'라는 말로 담아낸 믿음은 분명히 성경 안에 있습니다.
이 교리는 누군가 하나님의 상태를 관찰하고 나서 제창한 교리가 아닙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들을 종합하고 분석한 결론입니다. 초월적인 존재를 경험하고 그로 인해 삶의 변화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성령을 만났습니다. 경험한 대상은 각각 달라 보이는데, 그 경험을 통해 일어난 변화는 동일했습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혼이 살아나며, 세상을 달리 보게 되고, 삶이 변화되었고,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같고, 또 어떻게 보면 셋처럼 보입니다. 초대 교회는 약 3백년이 넘도록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씨름했습니다. 그 많은 고민과 씨름과 논쟁 끝에 마침내 교회는 '삼위일체'라는 교리에 합의하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기 이전과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종류의 이단 사상(heretic doctrines)이 기독교회 안에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ity of Jesus Christ)을 부정하는 이단이 가장 자주 나타났고 또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여호와의 증인(Jehova's Witness), 몰몬교, 유니테리언교회(Unitarian Church), 크리스찬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교회, 통일교 (Unification Church), 싸이언톨로지(Scientology) 등이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신성을 부인하는 종파들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단도 있고, 성령을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에너지로 보는 오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세 가지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양태론'(modalism)도 역시 오해한 것입니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비유들은 대개 양태론의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양처럼 때론 빛으로, 때론 열로 자신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그렇고, 때론 수증기가 되기도 하고 얼음이 되기도 하며 액체가 되기도 하는 물과 같다는 비유도 그렇습니다. 한 남자가 남편도 되고 아버지도 되며 아들도 된다는 비유 역시 양태론의 오류를 담고 있습니다.
2.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이단 사상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은 이 교리가 그만큼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셋이며 하나이고, 하나이며 셋"이라니, 정말 알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합니다. 정확하게 이해하기도 어렵고, 말로 똑 부러지게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바로 이것, 즉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incomprehensibility) 그리고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unaccountability)이 삼위일체 교리를 신뢰하는 이유입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삼위일체 교리는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신 모습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삼위의 하나님(God the Trinity)은 우리의 머리로 다 파악할 수 없도록 크신 분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보았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옷자락의 일부도 못 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면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고,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당한 참혹한 재앙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하던 욥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주했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 42:3)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교리가 깔끔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고 아무 문제 없이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교리를 심각하게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쉽게 그리고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만족스럽게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을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서 있는 그대로 그분을 기다리겠다는 뜻입니다. 참된 하나님을 믿으려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깎고 다듬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욥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을 내려 놓고 그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이렇게, 욥처럼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든지 우리 자신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구약학자이자 시인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 쓴 한 기도문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의 언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저희는 할 수 있는대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주님을 부르고
저희가 필요한 대로 주님의 역할을 규정하고
저희가 선 각도에서 주님께 다가갑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저희 자신의 깊은 요구,
깊은 상처 그리고 깊은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부르는 이름은 잠시 동안만 유효할 뿐,
주님은 그 이름을 넘어 다가오시며
저희 생각을 넘어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저희가 잡을 수 없는 영광 속으로 사라지십니다.
주님의 자유와 숨으심을 목도하며
저희는 인정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저희보다 위에 계시며 저희를 위해 계시고
또한 저희를 넘어 계시다는 것을.
저희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저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우물거릴 뿐입니다.
그것을 통해
이름지을 수 없는 주님 앞에 선
저희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할 따름입니다.
주님을 설명하고 찾고 규정하려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고
주님께 찬양을 돌립니다.
육신을 입고 고통받으시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해
그리고 저희에게 주신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이렇게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대하라는 뜻입니다. 나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재단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시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이성으로 파악하려 하지 말고, 그분의 신비 앞에 겸손히 옷깃을 여미고 서라는 뜻입니다.
3.
그렇게, '세 분이면서 한 분처럼 일하시고, 한 분처럼 보이지만 세 분이신' 하나님의 신비를 대면하면서 고대 교회 지도자들이 찾아낸 단어가 있습니다. 헬라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페리'(peri)와 '코레시스'(choresis)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인데, '코레시스'의 정의에 따라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 '코레시스'를 '담다'(to contain)라는 뜻으로 보면, 서로 안에 서로를 담는 관계를 가리킵니다(mutual indwelling, mutual participation).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를 담고 있습니다. 서로를 분리할 수 없도록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의 일에 참여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의 '코레시스'를 고백하고 밝히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21절)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22절)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23절)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두 분은 분명히 다른 분입니다. 하지만 서로 안에 거하시며 함께 일하십니다. 성령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또한 서로의 일에 참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도 있고 예수님에게 기도할 수도 있으며 성령에게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체험하면 그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분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삼위 하나님의 이러한 관계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둘째, '코레시스'를 '춤추다'(to dance)라는 뜻으로 보면, 서로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을 가리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를 품고 서로의 일에 참여하여 구원을 위해 일하시는 모습이 마치 세 사람이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느끼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동양 문화에서 '춤'은 배워먹지 못한, 방자하고 타락한 사람들이나 추는 것이라는 고정 관념이 있습니다. 요즈음 가수들의 몸짓처럼, 춤은 흔히 인간의 타락한 욕망을 자극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래 전에는 무당같은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점잖은 사람들에게는 멀리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춤을 추신다"는 말에 인상을 구길 분들이 계십니다.
저에게도 춤에 대한 비슷한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벌써 20년도 넘는 것 같습니다. 신학대학에서 가르칠 때의 일입니다. 일년에 한 번씩 신학자들이 모이는 학회가 있습니다. 어느 해인가, 그 학회의 폐회 예배에서 기독교인 전문 무용수 두 사람이 나와서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를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저는 그 때 인간의 몸짓이 그렇게 거룩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춤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추는 사람에 따라 거룩한 춤도 있고 방자한 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동은 모두 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전, 탄자니아에 단기 선교를 갔을 때의 한 장면이 기억납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저 앞 길 가에 사람들이 늘어서서 멋지게 춤을 추고 있는 겁니다. 무슨 축제라도 벌이는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일렬로 늘어서서 길가에 자란 풀을 자르는 중이었습니다. 끝이 납작한 쇠막대를 하나씩 들고 박자에 맞추어 풀을 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신명이 나서 하는 모든 노동은 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즐겁게 일하는 것이 바로 '페리코레시스'입니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손에 손을 맞잡고 거룩한 춤을 추고 계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그 춤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춤으로 인해 우주는 제 갈 길을 가고 모든 생명은 매일같이 새 생명을 공급받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이 추시는 거룩한 춤 즉 '페리코레시스'를 그림으로 그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4.
"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비에 초대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 참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첫째로, 성삼위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사귐을 나누고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태에 이르기를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21절)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2절)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23절)
여기서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머무는 상태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하셨을 때, 의도하신 것이 이것일지 모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각각 다르지만 서로에게 참여함으로 하나처럼 행동하듯, 인간도 그렇게 살도록 지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어야만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이웃과 '페리코레시스'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표현하라면, 분열, 단절, 소외, 파괴, 갈등, 상처 같은 말들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진실한 관심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로의 삶에 참견하고 간섭하거나, 아니면 아예 등을 돌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누리고 있던 '페리코레시스'가 오늘 우리의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서로 믿고 의지하며 서로의 삶에 참여하고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난 주, 우리는 끔찍한 사건을 접했습니다.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조금씩 그 범죄의 내막이 드러나고 있는데, 도대체 역겨움 때문에 자세히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옵니다. 10년 동안 세 여인이 갇혀 성노예로 유린 당하는 동안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더욱 충격적입니다. 유괴되었던 그 여인들이 갇혀 있던 집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이토록 단절되고 파괴된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먼저, 성삼위 하나님을 찾고 그분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어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태를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갈 것이며,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5.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둘째, 성삼위 하나님의 거룩한 춤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우주의 중심이 하나님이며 자신의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통해 우주를 운행하시고 또한 인간의 삶을 주관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그분이 인도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아름다운 춤입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춤 추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실수와 잘못을 합니다. 상대방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지 않았기 때문에 몸짓도 어색하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몸처럼 움직이지 못합니다. 자꾸만 상대의 발을 밟고, 때로는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처럼, 믿음의 여정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에 맡기는 것도 잘 안 되고, 하나님의 마음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믿는다고는 하지만 자꾸만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에는 자신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 모습이 아름다워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점점 익숙해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자신은 그 춤사위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경험하게 되고 우리가 사는 모습은 마치 춤 추는 것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시드니 카터(Sidney Carter)가 지은 노래 '춤의 왕'(Lord of the Dance)은 이 메시지를 아주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음악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의미만 생각하여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1.
나는 세상이 창조되던 아침에 춤을 추었다
달과 별과 태양 가운데서 춤을 추었다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서도 춤을 추었다.
내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도
(후렴)
춤 춰라, 어디서든 춤 춰라
나는 춤의 왕
너희가 어디 있든지
내가 인도할 것이다.
나와 함께 춤 추도록
2.
나는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을 위해서도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들은 춤 추려 하지 않았다
나를 따라 하지 않았다
나는 어부인 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춤을 추었다
그들은 나를 따랐고 우리 춤은 계속되었다.
(후렴)
3.
나는 안식일에 춤을 추었고
장애입은 이들을 고쳐 주었다
거룩한 사람들은 나의 춤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들은 나를 찢었고 벗겼고 나무에 달았다
십자가에서 죽도록
(후렴)
4.
나는 세상이 암흑에 휩싸였던 금요일에도 춤을 추었다
악마를 등에 업고 춤을 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 시신을 매장했고 내가 사라진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춤이다
춤은 계속되었다.
(후렴)
5.
그들은 나를 죽였지만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는 결코, 결코 죽지 않은 생명이다
너희가 내 안에 살면 나는 너희 안에 살 것이다
나는 춤의 왕이다
(후렴)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라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모두가 손 잡고 춤 추는 나라입니다. 일하고 놀고 쉬고 예배하는 모든 것이 춤처럼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그 모습을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그림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하나님과 '페리코레시스'를 나눈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페리코레시스' 즉 거룩한 춤이 만드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원래 세상을 이렇게 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며 바람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이같은 세상을 회복시키려는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성령만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를 믿습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서로 하나가 되어 온 우주를 살게 하는 거룩한 춤을 추고 계심을 믿습니다. 오늘,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거하는" 그 거룩한 사귐을 사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삼위 하나님께 우리의 존재 전체를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거룩한 춤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우리 안에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춤이 우리 이웃에게로 번져나갈 것입니다. 죽음의 몸부림이 판치는 세상에 생명의 춤이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진실되게 머리 숙이기를!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이 회복되고 그분의 성품이 회복되기를!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눈이 뜨여 그분의 율동을 보고 그 율동에 참여하게 되기를! 우리의 하루 하루 삶이 고역이 아니라, 노동이 아니라, 몸부림이 아니라, 신명나는 춤이 되기를! 아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저희가 믿습니다.
이 믿음을 참되게 하셔서
저희로 하여금
성삼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춤에 참여하게 하소서.
저희의 춤으로 인해
싸움판이 되어버린 이 세상에
거룩한 춤이 회복되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5월12일 주일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20)
"춤 추시는 하나님"(Our Dancing God)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습니다.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30장(통 456)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요한복음 17장 20절부터 26절까지를 읽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올린 기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2)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당신이 알고 있던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설교를 통해 교정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상태를 경험하고 사십니까? 더 깊은 내주를 위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4) 하나님의 춤에 참여한다는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일상 생활은 얼마나 춤에 가깝습니까?
5. 기도
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추구하십시오.
2) 하나님의 춤에 참여하도록 기도하십시오.
6.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42장(통 499)
8.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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