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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17~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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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1-01-30 http://www.yullin.org |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7~19)
I. 본문해설
본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셔서 고기 잡던 제자들과 만나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구성으로 보자면 20장에서 끝나면 꼭 좋을 성경입니다. 그래서 21장은 많은 주석가들이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기보다는 네 복음서의 마지막 부록이라고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록이 중요한 것은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금 지도자로 회복 시켜주시는 사건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개인적인 것처럼 보이는 21장 부록이 달려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매우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 전체에서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반하고 미끄러진 사람이었는데, 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에서는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 21장은 네 복음서 속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미끄러지고 실패한 베드로가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유일한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II.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
그는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때가 가까워 옴을 보시고 당신의 고난을 예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목자를 치리니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한 예언의 말씀을 주시면서 당신이 고난당할 것과 제자들이 모두 당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들을 팔면서 ‘이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려도 나는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라고 호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을 버리고 배반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네가 돌이킨 후에는 네 형제를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의 사명까지도 확인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앙과 충성심은 올곧고 바르며 사람의 충동에서 난 열정은 항상 불안하고 모순됩니다.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이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실 때에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습니다. 이런 열정에 충돌질을 받는가 하면 잠시 후에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끌려갈 때에 두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당해 가는 광경을 관망하며 따라갔고,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이 종교 재판을 받으실 때에는 예수님과 한패냐고 묻는 무리들에게 자신은 예수를 모른다고 대답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저주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맹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닭이 울자 그는 담장 밖에 나아가서 통곡하며 울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정당한 회개라고 받아들일 근거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갔지만 차라리 그 제자들이 더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들은 예수님이 바라보는 면전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III.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때가 첫 번째가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였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개인적인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에도 이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러 나아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이 행동을 세상으로 돌아간 행동이라고 해석하지만 요한 칼빈 선생은 자신의 주석에서 이들이 고기 잡으러 나간 것은 예수의 부활은 목격했지만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때에 그저 일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고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마치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와 그 일행이 예수께 부름을 받던 그때 고기를 잡다가 실패한 광경과 꼭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때처럼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의 명령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들은 이 광경이 언젠가 자신들이 경험한 상황임을 깨달았고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급한 마음에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고 해변으로 나아왔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배신했던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에서 마련하셨는지 숯불을 피우고 고기와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물 묻은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오셨을 때 예수님은 마치 그 옛날 자신들과 함께 다니시던 그때처럼 종의 모습으로 자신들의 아침 식탁을 차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수줍음과 두려움 속에서 거리감이 있어 하는 제자들에게 그 거리감을 좁히시려는 듯 ‘너희 중에 물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그들에게 고기를 청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풀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아침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감히 누구도 예수시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A.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탁은 한 가족이 되었음을 의미하고 한 형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버리고 주님이 가장 쓰라리게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 예수님을 홀로 버려두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한 번도 이들을 버린 적이 없이 당신의 가족으로 여기셨다는 사실을 아침 식탁을 차리는 종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으니 이는 희랍어 본문에 의하면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도 번역이 될 수 있는 지시대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사물로 해석하면 ‘너희가 잡아온 이 물고기보다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물음이 될 것이고, 사람으로 친다면 ‘네가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어느 해석이 꼭 적합할지 마음에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보다 그리고 피붙이처럼 여길 동료, 사도들인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질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두 해석 모두를 취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질문을 하셨지만 이것은 베드로 개인을 향한 질문이기도 했고, 또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에게 주신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세 번 반복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느냐’라고 쓰여진 이 질문에 사용된 동사가 희랍어에서는 각각 다른 동사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예수님이 사랑의 차원을 점점 낮추어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그 해석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희랍의 문학에서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이고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세 가지로 반복하신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것처럼 한 번의 질문에 한 과오를 지워주시려는 듯이 예수님은 세 번 동일한 질문을 반복하셨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대답을 받아내셨습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렇게 진심으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인간이 왜 며칠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신하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느냐고 묻는다면 베드로는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도 사실이었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잠시 그 분께로부터 미끄러졌지만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오늘 베드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모순된 두 사실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를 위선자로 몰았을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 고백을 진실하게 받으시고 그의 과거를 용서하셨으니 이는 용서를 통해 그로 하여금 다시 섬기도록 소명으로 돌아가도록 부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일생에 단 한 번도 주님을 배반하는 적이 없이 십자가에 그 붉은 피 사랑을 가슴에 간직하고 주님 앞에 올곧게 충성스럽게 사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에 오늘도 주님께서는 찾아오셔서 다시 한 번 소명으로 부르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위대한 인물들, 자신의 목숨을 버려 주님을 위해 철저하게 섬겼던 거의 대부분의 모든 인물들은 이렇게 한때는 미끄러졌던 사람들이었고, 죄인이었던 사람들이었고, 주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죄의 깊이와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가 함께 만나면서 그들의 깊은 죄와 배반은 오히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값없이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그 큰 용서의 사랑은 그들을 잃어버렸던 소명으로 데려가 그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B. 베드로의 응답과 부르심
그러므로 오늘 은혜에서 미끄러진 사람들, 잠시 주님을 배반하고 거짓된 길을 따랐던 성도들은 오늘 깊이 돌이키고 이렇게 다시 불러 섬기게 하시는 그 소명으로 돌아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는 응답하였고, 주님은 불러 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부르셨을 때 이 부르심은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지도자로서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고, 영혼을 구원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길 소명이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소명과 구별되는 소명이기는 하지만 분리되는 소명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이후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다양한 모양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도대체 무슨 섬김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지도 않고도 섬길 수 있는 봉사가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에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에 충동되고 자신의 인생의 비전에 의해서 휘몰아지는 꿈이라면 그것은 자기 보람을 우상으로 삼은 사람의 꿈이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모든 사도들을 대표한 사람이 아니라 한 때 실패하고 미끄러졌던 모든 죄인의 대표자로서 주님께 이 질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이 거듭 물으시자 그는 주님이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 같아서 괴로워하면서 고민하며 근심어린 표정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도 아십니다’ 라고 힘들게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은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누가 보든지 간에 순교를 예고하는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진심으로 네가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나만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렇다면 너는 나를 위해 죽거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유행하는 거짓되고, 쓰레기 같은 번영의 복음과 성공의 복음이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눈물로 고백하는 이 베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렇다면 ‘너는 이제 나를 위해 죽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는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예수님은 당신에게 인격적인 사랑을 진정성 있게 고백한 사람에게 순교를 명령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요한의 해설을 읽어보면 우리의 관점을 이동할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고 말입니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우리의 행복과 자랑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의 영광에 있고, 당신의 영광은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 이루어질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순교를 예고하셨지만, 이것은 사랑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죽이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들풀 같은 베드로의 생명이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의 계획이 이루어지는데 이바지할 인생을 살게 될 베드로의 영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III.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
베드로는 일평생 이날 이 이른 아침 갈릴리 바닷가에서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불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사무친 일생을 살았습니다. 오히려 맨 처음 죄인인 자기를 불러주시던 그때는 잊혀졌어도 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그렇게 사랑해 주신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한 실패한 자기를 찾아오셔서 떡과 물고기를 구워 주린 배를 채워 주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가족처럼 물어주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큰 사랑, 모든 실패한 제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실패한 자신을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아주시고, 이후 성령 강림하신 후 교회의 역사를 이끌어갈 위대한 지도자로 삼아주신 그 용서의 순간을 일생 마음에 빚진 자처럼 간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증거를 베드로전서와 후서에서 발견합니다. 커다란 로마의 핍박을 앞두고 두려움 속에 떨고 있는 흩어진 성도들에게 그는 편지를 써 내려 갔습니다.
그리고 환란과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하라고 외쳤습니다. 소망을 굳게 붙들고 주님을 배반하지 말라고 외쳤으니 그는 주님을 배반한 자신이 어떠한 실수를 했는지를 알고 있었고, 거기서 주님이 자기를 건져 주셨을 때에 그는 주님께만 헌신된 삶을 살도록 맹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베드로전후서는 한 때 그 핍박이 두려워 배신했던 베드로의 쓰라린 눈물로 기록된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렵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을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베드로를 불러주셨고, 그는 잠시 주님을 버렸고, 모질고 악하게 자기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못을 박았지만, 주님의 무한한 사랑은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고, 다시 그 자리로 불러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의 이 놀라운 은혜에 보답하며 충성으로 주님의 이 용서에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IV. 결 론
우리 주님은 다시 섬기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정말 더 좋았을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것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고, 미끄러졌고, 넘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미끄러질 때에 사람들을 잡아당기고, 넘어질 때에 밟아버리고, 쓰러졌을 때에 눕혀 버리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쓰러진 자들을 하나씩 피 묻은 손으로 일으켜 세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당신을 섬기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위해 자신을 다 버려 섬겼던 그 누구도 자신이 그렇게 미끄러졌던 사람들이요, 주님을 배반했던 사람들이라는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자기의 자기된 것이 우리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밖에 고백할 수 없게 만드심으로 주님은 완전한 사람들을 통해서보다 불완전한 인간들을 통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때는 베드로와 같이 실패했고, 미끄러진 사람들이었지만 변함없으신 주님은 우리를 다시 불러 용서하시고 다시 섬길 기회를 주님이 주셨습니다. 우리는 미끄러졌다는 이유 때문에 인생의 계획을 수없이 바꿔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주님은 우리가 미끄러졌어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그 자리에 세워 놓으실 때 미끄러지지 않았더라면 살게 하셨을 그 삶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시면서 다시 한 번 주님을 위해 충성스럽게 살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우리의 목숨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것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잊혀졌던 이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의 남은 인생의 날들에 모든 보람이 주님을 섬김에 있음을 깨닫고 시종일관 주님을 충성되이 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201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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