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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2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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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4.4.20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복음(8) 복음은 부활입니다.
요한복음11:25-27
오늘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이 부활의 축복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지난 주 진도 해역에서 세월호가 침몰하는 대형 사고가 났습니다. 476명 중 구조는 174명만 되었습니다. 문명의 발달로 배가 만들어 졌고 배로 말미암아 편리함을 누리고 있지만 때로 큰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1953년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창경호가 침몰되어 330명이 사망하고 32명이 실종되었습니다. 1970년에는 여수 소리도에서 남영호가 침몰되어 323명이 숨졌습니다. 1993년에는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 페리호가 침몰되어 292명이 사망했습니다. 전 세계 역사상 최대 인명피해를 낸 선박사고는 1945년 독일에서 일어난 '빌헬름 구스틀로프 사고' 입니다. 9000여 명의 사망자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면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질문하며 회의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 사고에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망하거나 실종된 신앙인이 47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눅 13:4)‘이라는 충격적인 대형 사고가 있었습니다. 무려 18명이 이 사고로 돌에 깔려 죽었습니다. 지금 보면 대형사고가 아닌 것같지만 당시 팔레스타인 전역에 살던 유대 인구가 약 50만 명 내외였다고 하니까 현재 남한 전체 인구수(약 5000만 명)와 비례하여 계산하면 대략 1800명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인구비례로 보면 대형사고 중의 대형사고입니다. 이때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죄 때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징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4-5) 죄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고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꼭 죄를 지어 징계를 받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평화스럽게 사는 식구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그들의 부모님은 일찍이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리아와 마르다, 그녀들의 오빠인 나사로입니다. 이들 가족과 예수님은 각별한 사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가족과 예수님과 어떤 사이였을까요? 11:5절을 보십시오. 3절을 보십시오. 36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유대인들도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말보다 더 가까운 사이를 표현하는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병들었습니다. 여 동생들이 사람을 보내어 간절히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오병이어로 4000명을 먹이시고, 불구자를 고치시며,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베푸신 분이심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청을 들어 주지 않고 죽었습니다.
1.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지만 때로는 사고를 당할 수 있고 고통에 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 정도 사랑하는 자였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항상 행복이 넘쳐야 했을 텐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1) 주님이 사랑하는 자도 병들 수 있습니다.(2)
2) 주님께 부탁했는데도 문제가 풀리지 않고 더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6, 17)
나사로는 병은 낫기는커녕 죽었습니다.
3) 주님이 사랑하는 자도 죽습니다.(32)
주님만 계셨으면 죽지 않을 것으로 알았지만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 두고 오셔서 고쳐 주실 줄 알았지만 결국 오빠는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성도님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모세같이 고생하며 이스라엘을 이끌어 온 사람이 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라고 하나님이 칭찬하였는데 돌 한번 잘못 두드렸다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여야 합니까?
욥과 같이 하나님 마음에 꼭 맞은 사람이 왜 자식이 죽고 그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날리는 고난을 당하여야 합니까?
하나님은 욥기 1장 8절에서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셉, 다니엘, 에스겔 같은 사람이 왜 고난을 당하여야 합니까?
일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2.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왜 사고를 당하고 고난을 당합니까?
고난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런 의미 없는 고난이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고난을 당합니다. 병이 듭니다. 이유도 모르게 바라지도 않은 시기에, 나사로처럼 아직도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은데, 죽을 때가 아닌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이유를 발견하기까지는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하여야 합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그 이유를 환한 빛으로 보게 됩니다. 왜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야 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고쳐 주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제자라고 지명하여 부른 것은 별로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막 10:21에 나오는 부자에게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했고 요한을 사랑하는 제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듭하고 애뜻한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이들 가정밖에 없습니다. 12제자에게 속하지 않았지만 아주 특별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사랑하는 나사로가 왜 병들고 죽어야 합니까?
오늘 성경은 그 답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40)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병이 들 때 그 병드는 이유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병은 자신의 부주위에 의하여 생기는 병입니다. 자신이 건강관리를 잘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술과 담배로 인하여 생기는 병과 같은 것입니다. 원죄로 인하여, 부모의 죄로 인하여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에이즈나 매독과 같은 질병에 걸린 병든 부모 밑에 나은 아이가 병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이 많아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병도 있습니다. 사탄의 유혹으로 오는 병도 있습니다. 마음에서 생기는 병도 있습니다.
사고나 고난도 마찬가집니다.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야곱같이 집에서 도망가 고생하는 것은 자기의 욕심 때문입니다. 망대가 무너진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일어나는 고난과 사고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죄가 없는데도 노예로 팔려가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훈련을 위한 사고나 고난도 있습니다. 욥처럼 시험으로 다가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때로는 스데반처럼 자발적으로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피하면 되는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의 자리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자연재해처럼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가운데 당하는 사고나 고난도 있습니다. 운전 미숙과 선박 항해 미숙처럼 하나님이 제정해 운행하는 과학 법칙을 어기고 부주의함으로 당하는 사고나 고난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었습니다.
요9:3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어 봅니다. 이렇게 소경된 이유는 부모 죄 때문이냐 자기 죄 때문이냐?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나사로의 병은 바로 이런 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 주기 위한 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삶의 주인이신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병이었습니다.
3. 이런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25-26)
1) 예수님이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나사로를 살림으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은 지 4일 동안 기다렸습니다. 39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덤 앞에 가서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40). 4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나사로가 수족이 베로 동인 채로 나왔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사람의 말 한마디도 얼마나 권위가 있습니까? 말 한마디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순간적인 말 한마디로 밤잠을 자지 못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재판장의 말 한마디에 사형을 당하기도 하고 무죄로 석방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 한마디로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성 만능주의 자들, 경험 만능 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믿지 못합니다.
스피노자는 "만일 누구라도 나를 위하여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나사로의 부활 기사를 진실로 입증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내가 세운 철학을 파괴하고 크리스천이 되겠다."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합리주의 신학자 파울루스 "기절한 나사로를 무덤에서 꺼내 바같 바람 쐐어 호흡을 회복했다."고 했습니다.
예수전을 쓴 르낭 "예수에 대한 신앙이 식어 가자 베다니의 세 남매와 짜고 술책을 부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알지 못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다고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이 가짜일 수 없습니다. 소경이 태양을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귀머거리가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고 해서 바람이 없습니까?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자신의 경험으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초 논리, 초 이성의 세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님의 시체를 도적질하였다가 거짓으로 주님은 부활하였다고 속였다고 합니다. 너무나 그리워하다가 허깨비를 보았다고 합니다. 기절하였다가 서늘한 동굴에 들어 가 있다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도적질 할 수 있었겠습니까?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지 않았습니까? 환상을 보았겠습니까? 환상을 보면 한 두 사람이 보지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환상을 봅니까? 그것도 500명이 동시에 봅니까? 기절하였다가 일어났겠습니까?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옆구리를 찌르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부활하였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그 후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거짓을 위하여 순교하겠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 처절한 고난을 당하며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 부활이 얼마나 중대한 주제였는지를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도를 세울 때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 1:22)"
사도들은 무엇을 전하였습니까?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행 24:21)"
사람들은 무엇을 싫어합니까?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행4:2)"
우리 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이십니다.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바로 가지 않고 지체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15)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믿음이라는 말이 몇 번 나옵니까? 3번 나옵니다. 이 말을 듣고 마르다가 무슨 고백을 합니까?(27)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왜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씀합니까?(42)
2) 예수님은 우리가 막연한 부활신앙에서 체험적인 확고한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기서 네는 누구겠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마르다입니다.
마르다는 막연한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1절에 보십시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질병에서 고침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꼭 주님이 문제의 현장에 계셔야만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죽음에서 부활시킬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주님께서 하시면 살릴 줄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지금 살아난다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말하자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24절에 보십시오. 마지막 날에 부활할 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39절을 보십시오. 무덤 앞에 가신 예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보십시오. 죽은지 사일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에게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합니다(40).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라"합니다(43).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종말론적인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신앙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의 부활한다고 믿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에는 역사적 부활을 믿는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천년 전에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또 다른 부활 신앙은 불투만이 말한 실존적인 부활 신앙입니다. 이 사람은 성경의 이적이나 표적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신앙적인 사건으로 봅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것은 역사적으로는 있을 수 없고 신앙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부활 신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 시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절망에서 소망으로 낙심에서 낙관으로 불안에서 평안으로 부활의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의 종이 되어 절망하는 삶이 아니라 부활의 증인이 되어 소망가운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신앙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 신앙을 증거하시길 원하십니다.
나사로가 부활 체험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믿음을 가집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36절을 보십시오. 빈정대던 사람들입니다. 37절을 보십시오. 조롱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부활 사건을 통해 믿음을 가졌습니다. 12장 11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부활의 산 증인인 나사로를 보려고 몰려오자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한 사람을 통해 엄청난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제자들을 보십시오. 부활을 이론적으로 안 때 그들은 다 제 갈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그들은 부활의 산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로 하루에 3000명 5000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확실하게 부활을 체험한 나사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 보니까 죽음이 그렇게 겁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병의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까? 죽음의 문제로 번민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산 증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란 대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 점령을 할 때 아간 한 사람이 범죄하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아이성 점령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한 사람이 변하니까 소아시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눅5:17-26 중풍병자 한 사람이 고침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까(25) 모든 사람이 영광을 돌렸고(26) 눅18:35-43 소경이 눈을 떠 영광을 돌리니까 모든 사람이 영광을 돌렸습니다.(43) 나사로의 변화, 그 이후는 많은 유대인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닥터 홀의 조선회상"라는 책이 있습니다. 조선에서 선교 개척자로 일생을 바친 의사 부부였던 부모 아래 태어나, 훗날 다시 의사인 아내와 함께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16년의 세월을 보낸 닥터 셔우드 홀의 자서전입니다. 그분은 98세까지 사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는데 그분의 열정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결핵 요양소가 세워졌고 1932년 남대문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제임즈 홀은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환자를 치료하다 전염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남매 둘을 남겨 놓고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 로제타 홀은 남편 뿐 아니라 딸도 어린 나이에 조선에서 잃었습니다. 의사인 그녀는 남편을 먼저 천국에 보낸 후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평양에 병원을 세우기 위해 모금 활동을 하고, 조선의 시각 장애인을 돕기 위해 점자 공부를 하였습니다. 김 에스더를 유학시켜 한국인 최초로 의학박사가 되게 하였습니다. 다시 조선에 돌아왔지만 6개월 만에 세 살 된 딸 에스더를 천국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간 남편의 이름을 붙여 "홀 기념 병원"을 세웠고, 어린 딸을 생각하며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에디스 마거리트 어린이 병동'을 세웠습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은 이대 부속병원이 된 '동대문 부인 병원'을 세워 무지한 부인들을 치료했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 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세워 의사들을 배출시켰습니다. 시각 청각 장애인을 공부시켰습니다.
자신들을 환영한 것이 아니라 핍박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이 많은 조선 땅인데 어떻게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남편과 딸을 잃고 외아들을 기르면 조선 땅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부활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이 그녀를 죽음을 초월한 사랑을 실천하게 했습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인에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4)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이 무엇입니까? 그 고난을 주님이 다 아시고 계십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 홀로 있지 않습니다. 요 13:1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민망이 여기십니다.(33. 35)
마르다는 죽었다고 말하지만 우리 주님은 잠잔다고 말씀합니다. 죽음이란 절망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시각은 죽음은 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잠은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없습니다. 잠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잠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잠은 오히려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잠은 하루의 슬픔과 수고가 다 끝난 후 찾아오는 고마운 휴식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기 위하여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병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 오는 절망적 상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전 15:20,51절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이란 한마디로 절망 그자체입니다. 그들은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썩지 않는 하늘에 소망을 둔 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벅찬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내세에 대하여 무서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신자는 죽음이 이 세상에서 소망이 끊어지고 무서운 지옥불이 기다리므로 죽음 앞에 떨 수밖에 없지만 신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관문이므로 기쁨과 감격이 넘칠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까? 근심과 염려로 잠 못 이루는 일이 있습니까? 미래에 다가올 일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나사로를 살리신 주님, 나사로야 나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은 죽음에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믿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죽음과 삶을 주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25-26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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