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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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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4.10.27 실시간 온라인 새벽기도(1479 |
온새기(1479) 내일은 주님을 위해
(요한복음 21장 25절)
< 샛길은 더 막히는 길이다 >
인간은 다 약하다. 강하다는 사람도 다 약하다. 어떤
스턴트맨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세 번이나 떨어져 내리고 살아서 매스컴이 ‘죽음을 정복한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가 어느 날, 뉴욕 시내를 걷다가
꼬마가 먹다 버린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했다. 이 세상에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신할 사람은 없다.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도 막히는 길을 만난다. 내가 잘해도 남이 막는다. 가끔 자동차 사고 때문에 도로가 꽉 막힌다.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남이
사고를 치면 나도 길이 막힌다. 요새 나이 많은 샐러리맨들은 가끔 이런 소리를 듣는다. “아직 안 미쳤어요?” 위에서는 호시탐탐 자르려 하고,
밑에서는 밀치고 올라오니 속상한 일을 많이 당한다. 그냥 다니자니 속이 썩고, 안 다니자니 처자식이 운다. 그처럼 길이 잘 안 보이니까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머리가 빠른 사람들은 정상적인 길로 가면 안 되는 줄 알고 요령을 피우고 샛길을 찾는다.
그처럼 너도나도 샛길을 찾으니까 나중에는 샛길이 더 막힌다. 지금 곳곳에 길이 막혀 있다. 왜 길이 막히는가? 근본 원인은 죄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개발하고 좋은 사상을 발굴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사람에게는 길이 없다.
왜 예수님이 소중한가? 십자가의
피로 죄 값을 치러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이 하신 가장 위대한 일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일이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소유의
기쁨은 잠시뿐이다. 가장 어리석은 일은 세상 것으로 영혼을 채우려는 모습이다. 영혼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채워진다.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가? 착한 행위만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기독교는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다. 정성과 착한 일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으로 이미 먼저 움직이셨다. 그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고 영혼의 진정한 자유를
주신다.
<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
본문 25절을 보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도 없지만 사실상 다 알
필요도 없다. 한 가지만 분명히 알면 된다. 그것은 바로 “주님은 어떤 분인가?”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1) 다시 기회를 주시는 주님
주님은 실패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와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그것을 생각하면 실패에 놀랄 필요가 없다. 실패 없는 인생은 없다. 실패의 원인은 분석하고 반성하되 그 실패 때문에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라. 실패를 잘 요리하면 오히려 실패는 창조와 성숙의 기회가 되고,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는 기회가 된다.
2) 빈 손 인생을 찾아주시는 주님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제자들이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주님은 빈손의 제자들을 찾아주셨다. 빈손이면 사람들은 외면하지만 주님은 그때 더 가까이 오신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면 주님은 외면하시지만 내 신앙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주님은 가까이 찾아오신다.
3)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주님
요한복음 21장 전체를 보면 주님의 용서의 흔적이 곳곳에 배여 있음을 느낀다.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삶은 용서하는 삶이다.
용서와 화해를 모르면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도 결국 불행한 인생이다.
4) 조용히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요란한 큰 소리’는 없지만 조용한 가운데 곳곳에 주님의 사랑의 펼쳐져있다. 특히 갈릴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사랑의 비치파티는
제자들에게는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 받은 장소였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허기진 영혼을 채웠다. 그 주님의 사랑이 없으면 행복도
결코 없다.
< 자유는 ‘주님께 매임’에 있다 >
많은 사람들은 행복이 소유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약간은 상관이 있다. 그러나 행복과 더 상관이 있는 것은 인격과 마음이고, 가장 상관이 있는 것은 신앙이다. 행복은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다. 사람은 만사형통과 신비한 능력을 더 원하지만 하나님은 변화된 삶을 더 원하신다. 능력과 은사를 보여주어도 마음과 입술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세상에 매여 살면 그것은 허무한 신앙놀음과 같다.
사람이 “무엇에 매여 사느냐?”는 것은 행복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미신에 매여 산다.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자유를 잃고 불행해진다. 함부로 이사도 못 가고 점을 쳐서 이사 날짜를 받아야
한다. 결혼도 아무 때나 못한다. 심한 사람은 영기가 막힌다고 못도 아무 데나 박지 못한다. 미신은 믿을수록 두려움과 불안이 더 많아진다.
점쟁이들이 저주가 섞인 말로 불안과 두려움을 주는 이유는 영혼의 자유를 빼앗고 마음대로 끌고 다니기 위해서이다. 점을 치러 온
사람에게 평강과 위로의 말을 해주는 점쟁이는 없다. 그러면 복채가 나올 곳이 없다. 사람의 영혼을 얽매는 데는 많은 얘기도 필요 없다. 이런 말
한 마디면 된다. “남편 조심해! 3년이 고비야!”
인생이란 크고 작은 사건의 연속이다. 하물며 3년 동안 전혀 사건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에도 하나님이 붙들어주심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점쟁이의 말 한 마디를 즉시 물리치지 않고 받으면 믿음 다
팔아먹고 3년 동안은 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영혼의 노예처럼 살게 된다. 미신은 믿으면 믿을수록 자유를 잃고 불행해진다.
사람들이
자유를 잃고 불행해지는 이유는 진정한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엉뚱한 말에 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이면 축복 받는
인생이 되지만 저주의 말에 매이면 저주 받는 인생이 되고 세상과 사단에 매이게 된다.
야곱의 식구들이 7년 흉년을 피해서 애굽
땅에 내려갔다.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으니 먹고 사는 문제는 다 해결되었지만 7년 후에는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살기 좋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했다.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 처음에는 잘 사는 것 같았지만 요셉이 죽고 그 자손들은 다 애굽의 노예가
되었다. 그처럼 잘 살겠다고 세상을 찾으면 처음에는 잘 사는 것 같아도 곧 세상의 노예가 된다.
세상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의
종이 되라. 주의 종이기에 “주님 뜻이라면 다 잃어도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라.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욥 1:21).”라고 철저한 종의 고백을 했다. 주님이 주셨으니 주님이 마음대로 하시라는
고백이다. 그 고백을 통해 욥은 다 얻었을 때보다 다 잃었을 때 하나님께 최고로 영광을 돌렸다.
그런 청지기의 고백을 하라.
“하나님! 저의 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요리하세요. 물질도, 자녀도, 재능도, 시간도, 저의 목숨도 주님이 준 것이니 마음대로 요리해
사용하세요.” 그런 고백을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불행을 주지 않는다. 그런 고백이 없이 다 자기 것인 줄 알고 살기에 불행과 저주와 사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 내일은 주님을 위해 >
주님이 은혜 주신 목적을 분명히 알라. 본문은 주님이
보여주신 은혜와 사랑을 책에 기록하려면 지구 전체가 책꽂이라도 그 책을 다 채우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보이지 않는
책들이 되라!”는 도전이다.
사랑은 항상 사명으로 발전해야 한다. 주님이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켜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
그의 사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받고도 사명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그 은혜와 사랑과 축복은 오히려 진노로 가는 통로가
된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축복하신 목적을 결코 망각하지 말라.
일전에 우리 선교회에 누군가 한분이 선교헌금을 보내며 이런
메일을 보냈다. “목사님! 인터넷을 통해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표현할 길을 찾다가 목사님의 선교 비전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축복하신 것은 선교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지금은 적은 심부름밖에 못하지만 나중에는 더 큰 심부름을 할 날이 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는 선교를 ‘하나님의 심부름’이라고 했다. 그 글을 보며 누군지 몰라도 그가 가진 행복과 보람은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거룩한
목표가 없는 삶은 허무하다. 그런 삶은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밖에 되지 않는다.
요새 웰빙(well being, 건강한
존재되기) 열품이 분다. 어떤 사람은 오직 몸만 만들려고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낸다. 그런 모습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몸의 웰빙이 있어도
사명을 따라 사는 영혼의 웰빙이 없다면 식물인간이 산소 호흡기를 끼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별로 다름이 없다. 사명을 외면하고 뛰는 조깅은 오직
죽음을 향해 뛰는 조깅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숨이 찰 정도로 열심히 뛰지만 대부분 뚜렷한 목표도 없이 남이 하니까 같이 따라
뛰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유치원생도 바쁘게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뛴다. 열심히 사는 것은 좋지만 목표가 없으면 그만큼 빨리 망한다. 땀과
성실은 인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만이 가치가 있다. 목표 없이 뛰는 것은 죽음을 향해 뛰는 것이다.
사단의 가장 큰 유혹은 목표를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도 목표를 잃어버리게 유혹하면서 십자가를 버리고 기적과 영광을 추구하라고 했다.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성도가 자기 영광에 도취하는 일이고, 가장 싫어하는 일은 성도가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그때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를 거부하고 사단의 말대로 돌을
떡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리셨다면 당대의 화려한 스타가 되었어도 영원한 구세주는 되지 못했다.
사명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쓰라. 그것이 없이 은혜와 축복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은혜와 축복은 얼마 후에 저주의
도구로 변한다. 반면에 내게 주어진 축복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면 내 인생에 지금보다 더 많은 과실이 맺힌다.
지금까지
요한복음 21장을 통해서 ‘어제의 실패’를 덮어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오늘의 삶’을 아름답게 인도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꼈다.
어제와 오늘, 주님으로부터 이토록 사랑 받았다면 내일은 내가 주님을 위해 최선의 땀을 흘려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소중한 나’의 영적
소명을 생각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라.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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