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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8:1-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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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백소영 교수 |
참고 : | 2012년 6월 10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
‘말고’ 이야기
(요한복음 18: 1-27)
백소영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원 HK연구교수)
어려서 저는 성서 기자들이 참 불친절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등장인물의 에피소드를 전하면서 중요한 맥락들이나 주인공이 무슨 생각에서 그리 행동했는지 생략된 이야기도 많고, 그래서 등장인물이 그 사건 이후 어찌되었는지 설명해주지 않는 부분도 많고... 예를 들면 삭개오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비록 키는 작지만 나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중견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는 해프닝을 벌이면서까지 들었던 예수님의 이야기가 정작 무엇이었는지는 통째로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것뿐인가요? ‘거듭나고 싶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알려 달라’ 청하는 이들에게 늘 ‘가족을 떠나’ ‘나를 따르라’ 하셨던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고자 했던 군대귀신 들렸던 사람에게는 왜 집으로, 가족과 친지들에게로, 이웃에게로 돌아가라 하셨는지 그분의 심정을 묘사하거나 제자들에게 설명하는 장면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서기자에게는 가장 시급한, 그리고 꼭 전하고픈 다른 강조점들이 있었겠지요. 어쩌면 생략된 이야기나 이유들은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을 살던 유대인 청중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것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20세기 어린이였던 저에게는 너무나 먼 문화적 거리가 있었고, 때문에 저는 언제나 성서에 기록된 에피소드 ‘배후’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건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하여 어린 시절 성경책을 읽다 잠을 청하려 누워서는 언제나 성서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이런 저런 장면을 혼자 연출해보곤 했었지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성스럽게 받아야 한다고 배우고 믿었던 지라 그저 머릿속의 상상이었으나 그 마저도 죄스러워하고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지금, 급기야 어린 시절부터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배후와 이후 이야기를 상상해본 책[『인터뷰ON예수』(대한기독교서회, 2011)]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났던 서른 한 명의 이야기를 상상해본 것인데, 오늘 전해드릴 ‘말고’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말고’! 모태신앙이시거나 오랜 세월동안 성서를 읽고 교회생활을 해 오신 성도님들 중에서도 아마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인 경우가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예수를 잡으러 왔던 무리들 중 하필 열혈제자 베드로의 옆에 있던 관계로 귀가 잘렸던 대제사장의 종이라 하면 어떠신지요? 아하, 하실 것입니다. 기억나시죠? 사실 이 이름이 낯선 이유 중 하나는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을 묘사한 네 복음서 중에서 ‘말고’라는 이름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나오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마가복음(14장 43-50)에서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를 잡으러 왔다고 묘사됩니다. 47절에 예수 곁에 섰던 자 중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26장 47-56)에도 역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왔다는 공통의 증언을 합니다. 이 본문에서도 구체적으로 누가 칼을 썼고 누구 귀가 떨어졌는지의 언급은 없습니다. 누가복음(22장 47-53)에서는 그냥 “한 무리”라고 상당히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에피소드 자체가 상당히 간략하게, 요점만 기록되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무리에 속한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 사건은 누가복음 기자도 공통으로 증언합니다.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특히나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분명하게 등장한 본문은 요한복음뿐입니다.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친 사람은 시몬 베드로라고 나옵니다. 그에 의해 오른편 귀를 벤 사람은 ‘말고’라고 전하구요. 그러니까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베어낸 사람이 ‘베드로’라는 것도 오직 요한복음에서 딱 한 번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사건의 주인공이 베드로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유명세 때문이겠지요. 복음서에 예수님 다음으로 중요한 ‘서브주연’급 인물인데다가 이후 초대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감당했던 제자중의 제자니까요.
사실 우리는 늘 주인공과 중요한 인물들의 입장에서만 성서본문을 읽어왔지 싶습니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를 다룬 사복음서중 두 이름 다 한 번씩만 등장했음에도 ‘말고’라는 이름은 지나쳤던 겁이다. 물론 ‘말고’! 이 이름은 이 장면에서 한 번 나오고 그 이후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 이름입니다. 초대교회사 어디에도 ‘말고’라는 종교지도자나 주목할 만한 신자의 이야기는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이셨던 아버지께 여쭤보아도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지 못했고,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가 초대 교회사를 다룬 책들을 이 책 저 책 꺼내 뒤적여보아도 그 어디에도 ‘말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저는 쭉 궁금했습니다. 요즘 아이들 말로 ‘존재감 제로’인 이 이름을 요한은 왜 기록했을까? 그 사람이 ‘말고’라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요한복음을 읽던 요한공동체에서 이 이름 ‘말고’는 어떤 의미였을까? 말고’!!! 이 사건 이후에 이 사람은 어찌 되었을까?
신학을 전공하고 지금까지 공부하는 동안도 ‘말고’에 대해 역사적으로 더 알게 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제는 어린 시절과 달리 제법 근거 있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점이 나아진 것이라 할까요. 요한복음이 가장 늦게 쓰여진 복음서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Q자료와 더불어 마가복음이 가장 초기 저작이고 마태와 누가가 앞의 둘을 참조하면서 엇비슷하게 쓰여 졌고 가장 마지막에, 거의 1세기가 끝날 무렵에 혹은 몇몇 학자들의 주장으로는 그보다도 한참 뒤에 쓰여진 복음서가 요한복음입니다. 예수 사건과 그 사건 이후에 형성된 초대교회가 빠르게 성장하며 이제는 제법 신학적 성찰까지 할 수 있었던 시간 즈음에 쓰여진 것임은 요한복음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로고스 기독론’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은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리고 들불처럼 번져가던 교회 공동체가 여기저기서 기적 같은 이야기들, 감동의 역사를 만들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입니다. 누가 압니까? 이 기적 같은 이야기들, 감동의 역사를 만든 주인공들 속에 한때 유대 대제사장의 종이었고 ‘말고’라 불리던 한 사람이 있었을지... 주인의 명령이니 마지못해 미적미적 갔든, 아니면 주인을 닮아 예수가 ‘신성모독자’라 믿고 혈기에 차서 씩씩거리며 나섰든, 말고는 당시 민중들에게는 ‘메시아’로 추앙받는 인물을 잡으러 나섰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긴장되고 흥분감 혹은 두려움에 떨렸을까요? 다소 긴 본문이었습니다만, 그 날 ‘말고’가 성서에 기록된 그와 같은 사건을 겪었다면 그가 어찌 쭉 이전의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저 같으면 그 뒤의 삶이 달라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해서 ‘어려서 버릇 누구 못 준다고’ 저는 감히 말고의 심정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다음은 ‘말고’의 시각에서 재구성한 그날의 사건입니다. 다소 길이가 있지만 생생하게 읽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인칭 시점이 전해주는 생동감이 또 다를 것 같아서요.
대제사장의 종 ‘말고’가 만난 예수 (『인터뷰ON예수』 104-109쪽)
사람을 많이 부려본 사람은 척 보고도 ‘저 놈은 어디에 쓸 만하겠구나’ 혹은 ‘밥만 축낼 녀석이군’ 금세 안다 하지요? 그건 나서부터 부림만 받아본, 그러니까 저 같은 종놈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별의별 주인님을 다 모셔보다 보니 눈치가 백단입니다. ‘저 양반 앞에서는 이런 걸 조심해야겠구나’ ‘에고,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분이겠구나’ 이런 건 얼굴만 보고도 알게 됩니다.
지금 제가 섬기고 있는 대제사장 가야바님 댁은 대대로 사제직을 지내는 유대명문가입니다. 게다가 그 장인 집안도 같은 업종의 실세인지라 이 유대 땅에서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집안이죠. 늘 종교적인 언어를 쓰는 분들이라 그런지 언제나 자근자근 조용조용 행동거지나 어조가 우아하기 그지없습니다. 예의를 차린 말투는 높은 양반들은 물론 저희 같은 천한 종들에게도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다들 저를 부러워하죠. 기왕 종살이 할 바에야 이렇게 종교심 깊고 품위 있고 사람을 존중해주는 그런 주인을 만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냐, 그러면서요.
글쎄요. 그거야 겉모양만 보는 바깥사람들의 말일 뿐이지요. 과연 가야바님 댁이나 그 장인인 안나스님 댁의 종들도 그리 생각할까요? 정말 무서운 사람은 얼굴은 웃으면서 속으론 잔인하고 비열한 사람인 것을, 저는 내내 겪어봐서 잘 압니다. 말은 언제나 허울 좋은 빈껍질일 뿐이에요. “추운데 수고가 많네.” 인자하게 웃으며 그리 말을 건네면서도 굳이 날 추운 오늘 꼭 하지 않아도 될 험한 바깥일들을 시키고야 마는 건, 무슨 심보랍니까? 정말 제가 추울까 그게 걱정이 되면 “급한 일 아니네. 날 따듯할 때 하게나” 아,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구요. 끼니때가 한참 지나 밥도 못 먹고 일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런, 식사들은 제 때 하면서 일하는 겐가!” 그러고만 지나가요. 차라리 무심하면 자기 배부르다고 생각이 못 미치는 양반이라며 툴툴거리고 말 일이지만, 끼니 놓친 것 뻔히 알면서도 끝끝내 “잠시 쉬고 식사들 하고 다시 하게나!” 정작 그런 말은 결코 건네는 법이 없으니 더 얄밉고 속상한 일이죠.
유유상종이라고, 어째 모이는 사람들이 다 그리 한 족속인지. 그들의 진심을 아는 저로서는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의 제사를 기뻐 받으실까 의문이 들 정도랍니다. 요즘에 그치들이 우리 주인집에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하는 궁리인즉,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따르는 무리가 많다는 예수를 어찌 잡아넣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도 주인님의 신임을 얻은 편이라 의논하는 방안까지 이런 저런 심부름을 하며 들락거리는데, 그러면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들을 엮어보면 그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종교적 지도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나 봅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보고 외식하는 자라고, 율법의 정신은 다 잊고 껍데기만 붙들고 형식만 남은 종교의식과 교리로 사람들을 억압한다고・・・ 예수가 백주대낮에 그리 비판을 한다는데, 사실 다 맞는 말입니다. 그거야 이렇게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제가 증명합니다. 가난한 과부와 하루 벌어 하루 쓰는 일용직 품팔이들이 눈물로 헌금한 돈을 어찌 그리 제 몸 치장하고 제 식솔들 배불리는 일에 써 버리는 지.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믿기는 하는 건지 의심이 갈 정도니까요. 그들이 정녕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오늘 밤에는 기어코 그 예수라는 자를 잡기로 했나 봅니다. 예수라는 이의 제자 하나가 얼마 전부터 주인댁에 들락거리더니만, 드디어 한적한 곳에 가 있는 예수를 잡을 기회를 포착한 듯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 성전 경비대원들 얼마와 함께 저도 예수가 있다는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 올리브 나무 정원으로 향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워낙 많으니 아마도 인적이 드문 곳, 그것도 한 밤중에 예수를 잡아들이려는 게지요. 떠나는 길에 가야바 주인님이 그러셨죠. 아무래도 무력저항이 있을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라구요.
아닌 게 아니라 긴장감이 극도에 다다른 순간이었습니다. 등불과 횃불, 무기를 빼내어 들고 우리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빙 둘러 섰습니다. 그들 중 유난히 깊은 눈동자를 한, 한눈으로도 ‘저 자가 리더구나’ 알 수 있는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사람 예수를 찾는다는 말에 그는 순순히 자신이라고 응답하더니, 찾는 이가 자신이라면 자기만 데려가고 함께 한 이들은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라고 부탁하더군요. 이상한 일이죠? 여지껏 제가 만나왔던 주인들은 자신들이 위험에 처했을 때 항상 종인 우리들을 앞세웠지 저렇게 자신이 앞서는 일이 없었으니까요. 저의 오랜 경험으로도 얼른 분류가 안 되는 리더십에 잠시 당황하는 사이 제 오른쪽 귀가 갑자기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를 따르는 한 사람이 눈 깜짝할 새에 칼을 꺼내 제 오른쪽 귀를 베었던 겁니다.
어찌 해볼 사이도 없이 귀가 잘려나간 부분이 아파 움켜쥐고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제 귀에 손을 얹으며 칼을 쓴 사람을 나무라는 겁니다. “칼을 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말란 말이냐?” 하지만 전 그의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 전율처럼 흘러나와 제 온 몸을 휘감는 어떤 힘 때문이었습니다. 따듯하면서도 힘차고, 아스라이 엄마 품처럼 평화로우면서도 힘찬 심장박동처럼 팔딱이는 어떤 힘이 절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어느 덧 제 귀는 다치기 이전 상태대로 회복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행로를 따라 다녔습니다. 안나스의 집으로, 거기서 다시 가야바의 집으로. 대제사장의 무례함은 물론이고 일개 성전 경비원조차 그의 얼굴을 때리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심장은 터질 듯 뛰었습니다. 그가 진정한 주인인데, 그들은 어찌 알아보지 못하고 주인된 이에게 이런 무례를 행하는 걸까요? 그동안 돈으로 권력으로 종교적 언어로 우리를 조종하는 그런 인간들을 ‘주인님’이라 불러온 저였지만, 그거야 돈이 아쉽고 권력이 무섭고 종교적 언어에 묶여 저를 제한했을 뿐. 이렇게 온 존재로 저를, 제 영혼과 몸을 사로잡은 진정한 주인은 이제껏 없었던 것을・・・
그날 아무도 듣지 못했겠지만, 제 귀를 만지시던 내 주님은 제 귓가에 대고 그리 속삭이셨습니다. “말고야, 이젠 괜찮을 거다.” 아무도 따듯하게 불러준 적 없었던 내 이름 ‘말고.’ 그저 ‘야, 이놈아’로 불리던 내게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자신은 생사를 모를 곳으로 잡혀가면서도 내 상한 귀를 걱정하고 치유하며 괜찮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번지르르 하지도, 화려한 미사어구도 없는 그 한 마디에 저의 전 존재가 변화된 것을 저는 분명 경험했습니다. 내 이름을 아는 이, 그 이름을 불러주는 이! 울타리 하나 없이 억울하고 분한 순간순간마다 고백했던바 ‘나를 온전히 다 아시고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분은 나를 이 땅에 낳으신 창조주뿐이라’ 그리 믿었는데・・・ 저 예수는 분명 창조주의 마음을, 그의 능력을 나누어 받은 이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짧은 한 마디, 그 순간적인 만짐이 이런 큰 힘으로 저를 사로잡진 못할 테니까요. 오늘 이후, 저는 진정한 주인을 만난 듯합니다. 이후로 남은 생은, 제 진정한 주인 예수를 위해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 어느 역사서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이름이 기록될 수 있을까요? 그 작고 작은 종의 이름이・・・ 그러나 예수께서 ‘이름불러줌’으로 인해 이후 말고의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요한공동체에 있었든 아니면 초대교회의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밝힐 만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말고의 이름은 성서에 기록될 수 있었다고, 저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밤 이후 말고의 삶은 예전과 달라졌을 것 같았습니다.
이름을 불러줌! 알아보아 줌! 그리고 지금의 가장 절실한 상황을 개선하려 함! 이는 분명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칼을 들고 나를 치려하더니 당해도 싸다’ 하시지도, ‘내가 지금 심히 괴로워서 하찮은 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하시지도, ‘참 아프겠구나’ 빈 말만을 던지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구속사의 ‘주요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자칫 ‘1초 단역’으로 스쳤을지도 모를 종 ‘말고’에게 말을 걸어주시고 귀를 어루만져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그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했을 두 가지입니다. 다친 귀를 고쳐주는 것.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종의 이름을 다정히, 의미 있게 불러주는 것. 물론 후자는 저의 상상력 속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이야기의 주요한 주인공은 [베드로만큼이나] 말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칼을 집에 꽂아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교훈은 어쩌면 베드로를 향해서라기보다는 칼과 몽치를 들고 위협적으로 예수를 둘러선, 그러니까 말고가 속했던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인지도 모릅니다. 성전 경비병들과 로마 군인들, 아니, 그들에게 칼을 들게 한 종교・정치 지도자들을 향해서 말이죠. 예수의 치유 행위는 칼을 들었던 말고를 부끄럽게 했을 것입니다. 칼로 위협하던 자신을 따듯하게 치유하는 예수를 보며 말고는 요즘 아이들 말로 순간 ‘멘붕[멘탈 붕괴]’ 상태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몇 초나 걸렸을까요? 예수께서 진심 어리게 ‘말고’를 위해 길을 멈추고 할애하셨던 시간과 관심이 말고의 전 인격과 이후 생애를 바꿔놓았던 것이라고, 전 그리 상상력을 발휘해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예수따르미’로서의 삶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열 마디 체계가 꽉 찬 학문적 언어, 현학적 개념들보다 지금 만나는 한 사람과 눈을 맞추고 이름을 묻고 그가 처한 구체적 상황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 그리스도인된 삶에 더 가까운 삶일 것입니다. 그 누군가에게 아버지・어머니가 되고, 선생이 되고, 사장이 되고, 지도자가 되는 일... 그것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에 둔 극도의 긴장과 불안, 공포의 상황에서조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만’을 생각한다면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이 참 어렵고 큰일입니다만, 예수는 그렇게 크고 어려운 일만 하신 분이 아닙니다. 작고 구체적인 일들을 더 많이 행하셨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쓴다면 우리가 기억하고 따듯하게 불러줄 이름들이, 우리가 눈 맞추고 돌아보아야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겁니다. 빈말만 가득 찬 세상, 울리는 꽹과리 같은 말만 울려 퍼지는 세상에서 ‘말고야, 이제 괜찮을 거다’ 그리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시며 말을 건네신 예수!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가 일상이 되고 문화적 당연이 된 오늘날에는 특히나 주변화되고 가려지고 삭제되고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일상을 삽니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 매일 등교하는 학교, 매일 지나는 동네 길목에서, 말고처럼 작고 작은 우리의 이웃 옆을 우리는 무심히 스쳐지나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멈추어 서서 눈을 맞추고 이름을 불러주고 그의 현재를 관심하는 일, 우리가 바꾸거나 개선할 수 있다면 그리 마음과 몸을 쓰는 것! 그 작은 실천이 큰 기적을 가져올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요.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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