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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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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795144 |
정용섭 목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
요 1:10:18, 성탄절 후 둘째 주일, 2015년 1월4일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즘 저는 틈틈이 고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고 있는데, 우리나라 소설가와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말을 영어나 불어로 번역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토지>에 반복해서 나오는 지리산 인근 지역의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 그리고 용정이나 회령을 배경으로 하는 북한 사투리를 유럽 언어로 번역하기는 어렵고, 억지로 번역한다 한들 사투리의 뉘앙스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듯이, 번역된 작품을 읽을 때는 늘 이런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로고스
우리말 성경도 번역입니다. 신약은 헬라서 성경에서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를 우리말로 정확하게 번역하기가 어렵습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요 1장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 1:1절은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교회에서 ‘말씀’은 통상적으로 성경, 또는 설교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word, value, reason, grounds 등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요 1:1절을 이렇게 번역해도 됩니다. “태초에 언어가, 또는 이성이 존재했다.”
요한복음 기자는 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의 서론에 로고스라는 단어를 끌어들였을까요? 그냥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미 태초에도 존재하셨다고 해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헬라어도 잘 하고, 헬라철학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자랑하려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정확하게 전하려고 로고스를 거론한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을 읽는 우리도 이 단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고스는 헬라철학의 한 분파인 스토아학파의 중심 개념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이 세상을 조화로운 코스모스로 보았습니다. 그런 조화로운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로고스라는 겁니다. 이렇게 스토아학파가 로고스 개념을 생각한 이유는 그 방식이 아니면 세상의 질서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스물 네 시간이고, 일 년이 365일입니다. 달도 줄어들었다가 다시 커집니다. 봄이 오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나고 겨울이 오면 다 죽습니다. 코스모스의 질서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해명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그것을 도(道)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보았으며, 화이트헤드는 과정(process)라고, 하이데거는 ‘존재’(Sein)라고 보았습니다. 로고스, 도, 이데아, 과정, 존재가 개념적으로 똑같지는 않지만 이 세상의 궁극적인 토대라는 점에서 통하는 개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바로 그런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서양 철학과 부단히 대화하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 본질적인 점에서는 그런 철학과 똑같다는 말일까요? 조금 더 나가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스토아철학의 중심 개념인 로고스를 무조건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로고스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성육신(成肉身)입니다. 성육신(Incarnation) 교리는 ‘육신을 이루었다.’, 또는 ‘육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요 1:14절이 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문장은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로 바꿔도 됩니다. 육신은 헬라어 사르크스입니다. 그 단어는 살, 피, 신경, 뼈로 구성된 우리의 구체적인 육체를 가리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지닌 인간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주장을 유대교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헬라철학도 기독교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데아는 절대 존엄입니다. 이데아의 빛을 받아서 세상이 살아갈 수는 있지만 이데아가 세상과 일치될 수는 없었습니다. 스토아학파들이 말하는 로고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로고스는 신성불가침의 능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주변의 종교와 철학의 틈바구니에서 초기 기독교는 폭탄과 같은 선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데아가, 로고스가 구체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 인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게 성육신 신앙입니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될까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미 기독교 신앙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상식적으로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사람처럼 음식을 먹고 배설하면서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연민을 느끼는 존재일까요? 하나님이 병들고 웃고 울 수 있을까요?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즉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신앙이 무너지면 기독교 자체가 무너집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걸을 무조건 믿으면 결국 광신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냐, 하고 걱정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 사실의 영적인 깊이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합니다. 아이의 생각에서 어른의 생각으로 성숙해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영적으로 가장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고스가 인간이 되었다는,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의 논거를 두 가지로 제시합니다.
독생자의 영광
첫 논거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영광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하게 언급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가보트, 헬라어로 독사입니다. 시편과 이사야 등, 구약의 여러 문서들이 영광에 대해서 말합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에게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전수받은 시내산에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3)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현현을 영광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그들은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홍해를 건넌 다음에 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출 15:6) 이집트의 최첨단 무장 병력인 기마병들이 홍해에 수장된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행위를 그들은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영광이라는 단어를 낯설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상투적으로 생각합니다. 영광 개념의 망각입니다. 영광의 차원을 놓치고 삽니다. 대신 세속적인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돈벌이와 자기 안위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광 망각은 생명을, 즉 인생살이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강요하는 행복의 조건을 채우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이런 삶이 무조건 나쁜 거는 아닙니다. 이런 삶을 무시하고 세상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자기 나름의 인생을 계획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설계가 달성된다고 해서 생명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은 하지만, 그래서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전력을 다 하지만 꿈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사람이 행복하거나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백만장자가 되도 그렇고, 원수를 갚아도 그렇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서는 이런 사실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생명을 완성한다고 말입니다. 영광을 어렴풋이 알기는 알아도 설명해보라고 하면 하지 못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을 좀더 들어봅시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모세처럼 홍해를 갈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무너뜨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정도의 일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선지자이거나 독립투사에 불과했을 겁니다.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예수님에게서 보았습니다. 바울도 똑같은 경험을 말합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것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이게 초기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이런 말은 우리가 자주 들어서 익숙하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궁금증이 많이 생길 겁니다.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질문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 사실을 어떻게 경험한 것일까요? 거기에 어떤 확실한 근거가 있을까요?
대답은 다음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부자로 산다거나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것, 그리고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정도의 것이라고 한다면 굳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양을 쌓고, 힐링을 받고, 처세술을 배우면 됩니다. 세상은 그런 정도로 잘 살아가면 괜찮은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를 비롯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한 뒤로 더 이상 그런 방식의 삶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태양이 비추자 더 이상 손전등이 필요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가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삶에 대한 참된 만족과 참된 행복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에 근거해서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신앙 경험의 전통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은혜와 진리
예수님이 육체로 나타난 로고스라는 사실에 대한 두 번째의 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헬라어 카리스의 번역이고, 진리는 알레테이아의 번역입니다. 은혜와 진리는 서로 범주가 달라 보이는데, 본문은 그것을 한데 엮어서 표현했습니다. 은혜나 진리나 모두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은혜를 받았다는 말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받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관계는 늘 주고받는 식으로 일어납니다. 직장에서 노동해야만 월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순전히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따지고 보면 반대급부가 있습니다. 구제하면서 자기 위로가 주어집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요한은 바로 그런 일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알레테이아는 원어로 볼 때 탈(脫)은폐를 가리킵니다. 숨어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가리켜 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17절에서 은혜와 진리를 다시 언급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모세의 율법은 세상살이의 원리입니다. 거기에 따라 살면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건전하게 됩니다. 복지를 비롯해서 민주화가 높은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알려진 북유럽은 율법 국가, 즉 법치국가입니다. 이런 나라가 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예수님에게서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와 진리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생명과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 절인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생명 완성을 경험한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모세도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영웅호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매달리듯이 추구하고 있는 것들도 우리의 생명을 완성해주지 못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알려주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그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높은 담이 있습니다. 담의 왼쪽은 그림자가 드리웠고, 오른편은 태양 빛이 비춥니다. 그림자 안에서는 무엇을 하더라도 다 그림자의 지배를 받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도, 마음이 착한 사람도 다 그림자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들이 빛을 받으려면 담의 오른편으로 와야 합니다. 그곳에는 늘 태양 빛이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 오면 빛을 받아야겠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빛이 그 자리를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담의 오른편으로 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 1: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탄절 후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으로 오신 절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의 빛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운명으로 담아내신 분이십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로고스, 즉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온전히 믿으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운명을 맡겨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이 생산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놀라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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