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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2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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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은하 교수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index.php?mid=sermon&category=99215&document_srl=125859 |
밥상을 차리신 예수
(요한복음 21:8-19)
2012년 10월 21일 주일예배
조은하 교수
(목원대학교 기독교교육학)
완연한 가을입니다. 계절의 변화는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시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맘에 합하게 사는 삶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와 여건들안에서 최대한으로 삶을 즐기고 사는 것입니다. 삶의 행복을 최대한 즐기고 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1968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레나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두 팔이 없고 다리하나는 다른 다리의 반밖에 되지 않고 휘어져 있기까지 했습니다. 출산한지 3일만에 자신의 아기를 처음 만나 그의 엄마는 자신의 아기가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기와의 첫 만남에서 엄마의 인사는 “Beautiful" 이었습니다. 엄마는 아기의 팔이 없고 다리가 짧은 것을 주목한 것이 아니라 그의 빛나는 눈동자와 엄마를 향해 미소짓는 그 귀여운 입술과 세상을 향해 뛰는 심장의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를 온 맘을 다해 환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수영으로 운동을 시작합니다. 자신의 결점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나아가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에서 그녀는 성가지휘를 합니다. 두 팔이 없는 성가 지휘자입니다. 지휘자의 가장 큰 역할은 무엇이겠습니까? 맑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역할 일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그녀를 편견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있는 모습 그대로 환대한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그녀가 원하는 오르간을 배울 수 있도록 그녀를 위한 오르간을 제작해 줍니다. 재능을 마음껏 발휘 할 수 있도록 그녀를 배려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환대입니다.
그래서 레나 마리아는 그녀의 삶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중증 장애를 가지고 있었으나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C.C.M. 가수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우리 아이들이 아프다고 합니다.
2011년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에서 조사한 “2011년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에서 조사대상 OECD 23개국 중에 3년 연속 꼴찌를 하였습니다. 1위인 스페인 (113.6)보다 47.62 포인트 낮았고 평균(100으로 함)에서도 35점 가량이나 낮은 65. 98점수를 기록하였습니다. 치열한 입시 스트레스, 부모들과의 소통의 부재. 외모지향적 사회적 풍토 속에서의 자신에 대한 불만족 이러한 것들이 주요한 요인들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우리의 다음세대가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자신들을 세워갈 새로운 힘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었다.
“2007 대한민국 초딩으로 산다는 것은” 이라는 영상을 보면 한 평범한 초등학생의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내가 잊고 싶은 두려움은(이번에 친 시험 점수다)
우리 가족이 나에 대해서(공부 잘하는 것만 밝힌다)
나의 가장 큰 결점은(공부를 못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는(공부 제일 잘하는 아무개를 이기고 싶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했던 한 문장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
-학업 부담으로 자살한 어느 초등학생의 유서 중-
초등생 53%가 가출 충동, 27%가 자살 충동을 느낀답니다. 이유 없이 아플 때가 많았고 스트레스를 풀수 있는 해방구는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이었습니다. (‘2007 대한민국 초딩으로 산다는 것’은 중)
우리의 아이들은 외롭고 힘들고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잉연결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관계의 결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존재감조차 없는 학교, 입시전략연구소처럼 되어버린 가정, 무한한 자유경쟁에서 강자독식의 삶의 표본을 보여주는 사회현상. 그 어느 곳에서도 아이들에게 공감, 배려, 연민, 조화 등 자아정체감(self-identity)이 형성되어야 하는 시기에 배우고 익혀야 하는 삶의 가치들을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환대”가 사라진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내일의 모습입니다.
10년 20년 뒤의 우리 사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기자는 상처로 가득 찬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후 베드로는 그가 고기를 잡던 그 갈릴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도마와 다니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두사람이 한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이야기 합니다.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소.”
고기를 잡으러 가야겠다는 그 이야기를 왜 새삼스레 그들이 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서있는 갈릴리 바다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따랐던 그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3년 동안 도제관계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그들만이 남은 것입니다. 그들이 꿈도 희망도 모두 물거품이 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3년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그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상처와 아픔을 안고 돌아온 바다였습니다.
그러나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잡지 못하고 동이 틀 무렵 예수께서 바닷가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먼저 말을 거십니다.
“무엇을 좀 잡았는가?”
그들이 대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라.”
그리고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그때 한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도 비로소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그들이 땅에 올라보니 숯불이 피어 있습니다. 그 위에 생선이 놓여있고 빵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손수 생선을 구어 주시고 빵을 집어서 건네주십니다. 동트는 새벽, 함께 한 조반이었습니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 예수님이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가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그 모습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숯불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숯불을 보는 순간 그는 숯불 앞에서 행한 그의 배신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심문을 당하고 있을 때 그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그는 숯불을 쬐면서 그를 아는 척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 문지기 하녀가 물었을 때도 그는 아니라고 하였고 말고의 친척인 사람이 그를 보았다고 했을 때도 그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그가 부인하였다고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는 그 순간에 숯불을 피어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
그러자 또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날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묻자 베드로는 불안하여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
사랑했으나 두려웠고, 주님을 따르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었고, 주님을 인정하고 싶었으나 비굴했던 그 자신을 예수님은 전부 아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감출 것 없이 모두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삶의 가운데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숯불만 보면 그 기억을 지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대면하는 그 첫 순간 그 상처와 대면하십니다. 피하지 않았고 모른 척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또 세 번 물어주십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눈물 흘리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은 다시금 그의 상처에 직면하여 극복할 수있도록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을 먹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환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밥상을 준비하시고 빵을 집어서 주셨습니다. 함께 밥상을 대한다는 것은 환대의 가장 따뜻한 모습입니다. 받아들임의 모습입니다. 책망하고 따지고 이해를 구하기 전에 가장 먼저 밥상을 차리신 것입니다. 그 환대의 밥상을 통해 베드로는 주님앞에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도 같은 맥락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옆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함께 식탁을 마주하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신 이후에 그들이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한 식탁은 우리를 가리고 있던 두려움에서 그들을 자유케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전통에서 밥상을 함께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신앙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신학자 ‘루이스 쉐릴’의 책에 의하면 초대교인들에게는 두 가지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바로 Meeting for koinonia, Meeting for words 두 모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말씀을 위한 시간과 동시에 함께 음식을 나누고 교제를 나누는 코이노니아 시간은 동일하게 중요하였던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시간을 통해서 그들은 한 공동체임을 확인하고 고난의 현실을 이겨갈 수 있는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환대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함께 밥상에 마주 앉는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모두 한 식구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에서 기독교 이해를 가르치면서 기독교 영성이라는 주제를 가르치는데 한 학생의 팀이 다일 공동체를 방문하고 느낀 점을 이야기 합니다.
추운 가을 찬물에서 야채를 씻고 마늘을 까고 양파를 벗기고 하는 일을 그래도 할 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숙인들과 함께 밥을 먹으라 하였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합니다. 돈도 줄 수 있습니다. 음식도 준비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단지 시애의식일 뿐입니다. 함께 밥상을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을 사는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둘째, 밥상이 소통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라고 한 것과 같이 밥상에서는 자신의 맘을 열 수 있는 소통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밥상에서는 서로 숨길 것이 없습니다. 음식뿐 아니라 맘을 나누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밥상을 통해 환대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통해 우리를 환대하신 창조의 은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매튜 팍스는 하나님의 은총을 Red Blessing 과 Green Blessing 으로 설명합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교회는 붉은 은총을 중심으로 강조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과 속의 이분적 배타성, 교회중심의 신앙실천만을 강조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녹색은총을 기억하는 것은 창조의 더불어 사는 정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밥상에 오른 이 곡식이 어떤 경로를 통해 왔는가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사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사상가인 헨리 데이빗 소로의 일화입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면서 졸업장 받기를 거부합니다. 양피지를 만들기 위해 또 한 마리의 양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월든 호숫가에 살면서 그는 자기가 먹을 만큼의 농사를 짓고 삽니다. 어느 날 두더지가 자신의 밭을 계속 망치니 그 아이를 잡아 다른 산에 놓아주면서 이야기 합니다.
“미안하다 네가 이사를 가다오.”
이렇게 작은 동물 하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마음에서 더불어 사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밥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친히 경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하고 창조의 세계와 더불어 사는 정신을 다시 새기는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밥상을 대할 때 오늘도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10세 미만의 어린이가 5초에 한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고, 3분에 한명씩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빈공의 현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환대의 경험을 하는 자리가 밥상이 되길 바랍니다. 학교에서도 급식시간이 그저 밥 먹는 시간이 아니라 환대와 어울림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밥상이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 되고, 우리를 다시금 성찰하는 시간이 되고, 연민 공감 배려 더불어 사는 삶 등이 다시금 확인되는 그러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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