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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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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06032 |
정용섭 목사
믿음의 능력
요 3:14-21, 사순절 넷째 주일, 2015년 3월15일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도 많이 나옵니다. 몇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요 14:1,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막 9:23,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 9:22,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런 구절을 인용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구절만 본다면 믿음이라는 게 만사형통의 비법이나 주문처럼 비쳐집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해도 인생살이가 늘 잘 풀리는 게 아닙니다. 믿지 않을 때와 별로 달라지는 게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없거나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자책하기도 하고, 거꾸로 믿음을 냉소적으로 평가해버린 체 세상이 요구하는 상식대로 살아갑니다. 양쪽 모두 믿음을 오해하거나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 데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에는 실제로 능력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세상살이를 챙기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마당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믿음생활을 하는 이유는 뭘까요? 더구나 우리의 믿음과 삶이 왜 계속해서 흔들리는 걸까요?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믿음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요?
심판에 대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오늘 설교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 3:18절은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뚫어보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언급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입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발언은 협박처럼 들립니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도 주로 이런 식으로 발언합니다. 자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에 근거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말과 문자라는 게 한계가 있어서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면, 그런 태도를 우리는 성경 문자주의라고 하는데, 근본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격하게 표현된 이 발언의 배경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이 발언의 배경은 그 유명한 니고데모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어느 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자 당시 유대교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회원이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대법관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바로 그것에 대한 표적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유대 고위급 인사로서는 하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그 발언을 듣고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뒤로 거듭남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오갑니다. 니고데모의 입장은 거듭난다는 말에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입장은 성령에 의하지 않으면 거듭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신학 논쟁입니다. 논쟁이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신학 논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신학 논쟁과 직결됩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당시 요한복음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이런 이야기 형식으로 전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대략 기원후 100년 어간입니다. 당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가 더 이상 좋게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의 계기는 70년에 끝난 유대전쟁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모든 성전 체제가 무너진 것처럼 기원후 70년에는 로마에 의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대교는 이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동안 어정쩡한 관계를 맺고 있던 나사렛파를, 즉 초기 기독교를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을 회당 공동체로부터 축출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게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곳곳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반(反)유대교 정서가 강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기자는 니고데모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 11절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초기 기독교이고, ‘너희’는 유대교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경험하고 그것을 전했지만 유대교는 그걸 거부했습니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증언을 배척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축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가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처음에 인용한 요 3:18절을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며,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이미 받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심판을 단순히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나고 큰 병에 걸리는 것이라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종인 목사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서 교회를 떠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협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불행은 믿음과 관계없이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본문이 말하는 믿지 않는 자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은 더 궁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자라고 한다면,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태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지옥의 유황불과 구더기 더미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믿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실감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본문이 니고데모를 대표로 해서 거론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인격적인 결함이 있거나 종교성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시원치 않아서 믿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작은 세계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 근본 이유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름으로 고상한 종교 체계인 율법 안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개구쟁이들에게 세계 명작은 거리가 멀게 느껴집니다. 남녀 삼각관계를 다룬 신파 드라마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박경리의 <토지>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우주에 대한 이야기는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낯선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가 선의의 합의에 이를 수 없었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즉 믿지 않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최선의 길은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겁니다. 이것은 위조지폐를 식별하는 훈련이 주로 진짜 지폐를 매일 만지고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커피 맛이나 포도주 맛을 구별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정말 좋은 커피나 포도주를 자주 마셔서 그 맛의 깊이로 들어간 사람들만이 질이 떨어지는 커피와 포도주를 식별해낼 수 있습니다. 진짜가 오기 전에는 가짜가 가짜인 줄 구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원래는 유대교의 율법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 경험 이후로 율법 종교의 한계를 알게 된 것과 같습니다.
믿는 자
본문에서 요한은 ‘믿는 자’라는 표현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15절,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절,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8절,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각각의 표현이 약간씩 다릅니다. ‘영생을 얻는다. 멸망당하지 않는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 이 세 구절이 말하는 핵심은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건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는 이 세상의 무상한 삶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 역시 모든 인간이 결국 직면해야 할 심판으로부터 건짐을 받는다는, 즉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구원은 모든 인류의 염원입니다. 다른 종교도 역시 이런 구원을 추구합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정치, 또는 학문과 사회운동도 다 그것을 목표로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안인 무상급식 문제나 비정규직 문제, 빈부격차 문제 등도 다 구원 지향적인 것들입니다. 생명을 파괴하는 질서로부터 건짐을 받아야겠다는 노력들입니다. 초기부터 기독교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사실을 진리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걸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그걸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는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합니다. 자기 욕망의 실현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자기연민을 믿음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대상에 초점을 놓고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믿음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전달받았습니다.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그것의 의미를 점점 더 깊이 있고, 폭 넓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전무후무한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비롯해서 당시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절대적인 평화와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멸망당하지 않고, 심판당하지 않는다고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차원의 구원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확고했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인들은 유대교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고유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이 그들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이 부럽습니다.
비유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끼리 경쟁합니다. 세상의 기업들이 경쟁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기업에서 대박이 나듯이 교회도 대박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많은 교회는 힘들게, 최소한의 품격도 없이 운영됩니다. 그게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목사들은 이런 경쟁 논리에 빠져서 온갖 수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의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율법적 목회 방식입니다. 그런데 어느 목사는 교회 성장 논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목사는 경쟁구조와 상관없이 목회를 합니다. 그는 구원론적인 목회를 추구합니다. 목회 자체를 자기의 구원 문제로 여겨 수행하듯이 목회를 합니다. 그렇다면 그의 영혼은 해방, 평화, 기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복음적 목회 방식입니다. 이럴 때만 믿음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고 보존됩니다.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이 현실에서 드러납니다.
이런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기가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음으로 살려고 해도 세상살이가 너무 복잡하고, 힘들고, 유혹적입니다. 바로 이런 대목에서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악순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원자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죄의 용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니까 세상의 현실이 더 절절하게 다가오고, 이 세상 문제에 파묻혀 있으니까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면 세상의 것들이 작아질 것이며, 또한 세상의 문제가 작다는 사실을 알면 그때서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잘 보입니다. 어느 쪽 문제부터 해결해야 우리가 기독교인답게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서 선후를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일어나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그래도 굳이 차례를 나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 믿음의 눈이 생기면서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우선적인 이 일을 늘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수명이 늘어난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좀더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더 나가서 지금 여기서 이미 그것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유한 방식으로 능력을 허락하십니다. 믿지 못하면 능력도 없습니다.
저는 담임 목사로서 여러분들이 이런 믿음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경제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헌금을 넉넉하게 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다른 일로 바쁘거나 건강이 허락되지 않아서 교회 일에 전념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건 절대적인 겁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담아 앞에서 인용한 본문 18절 말씀을 다시 읽을 테니, 들어보십시오. 이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에 깊숙이 각인되기를 바랍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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