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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5: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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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95876219 |
2009년 12월 20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요한복음 15장 14절~15절
설교제목 : “당신은 메시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책 이야기>
며칠 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고려원)을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의 위대한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의 생애를 통해서 심혈을 기울여서 쓴 역작(力作)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짐’이 갖는 위대한 의미를 드러내 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과거 한 때 우리 한국 개신교와 카톨릭 일각에서 이 소설과 영화를 반대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무지(無智)의 소치(騷致)입니다. 어리석어서 저지른 소란이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 작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훌륭한 작품인 것입니다. 반대할 일이 아니라 적극 권장해야할 일입니다.
이 책을 읽던 중 저는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절친한 동지였던 가룟 유다는 예수와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유다는 혼잣말을 하면서 계속해서 나아갔다. 하지만 갑자기 그는 혼란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었다. ‘메시아는 누구인가?’ 그가 중얼거렸다. ‘누구일까? 어쩌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아닐까?”
다른 분들은 어떠실런지 모르지만, 저는 유다의 이 독백은 정말 깜짝놀랄만한 위대한 통찰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메시아 신앙에 대하여>
메시아 신앙에 대한 혼선은 예나 지금이나 ‘계속 중’입니다. 유대인들은 2천년 전에도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렸고,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예언자 정도로 인정하지만, “예수가 메시아다”라는 선언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그리고 기독교 내부에서도 메시아에 대한 혼선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수 신앙을 갖고 있는 분들은 ‘예수가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만이 메시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보수 신앙인들이 확신하고 있는 메시아 상입니다. 그런데 진보신앙의 사람들, 특히 민중신학을 선호하는 신앙인들은 조금 견해를 달리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메시아 성을 인정하면서도, 예수 일 개인이 메시아라기보다는 ‘예수 사건’이 메시아임을 주장합니다. 즉 2천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젊은 청년 예수만이 메시아라기보다는 그에게서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이 메시아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견해를 따라 가다 보면,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그것의 부당함을 항거해서 스스로 죽은 ‘노동자 전태일’도 메시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보수 신앙인들은 ‘예수 개인’에게 주목하는 반면, 진보 신앙인들은 ‘예수 사건’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유다는, 즉 그 소설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보내 주신 메시아”라고 했던 것입니다. 조금 더 확장해서 말씀드리면, 어느 특정 개인이나, 어느 특정 민족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이 지구상에 생존할 보편 인류 모두가 곧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 보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딸, 즉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우리와 다른 어느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이 곧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나,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아들딸, 즉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상을 ‘영성적 기독론’이라고 이름 지어 보았습니다. 보수적 기독론과 다른, 또 진보적 기독론과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기독론 쯤 되지 않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보자면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메시아이며(보수 신앙의 보완 차원), 이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사건들이 곧 메시아적 사건인 것(진보신앙의 보완 차원)입니다. 모든 인류의 모든 인생사건이 곧 모두 메시아인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다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제가 판단하기에 예수님은 자신만의 고유하고 탁월하고 차별적인 어떤 구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 너희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동시대의 인류들을 ‘친구의 시선’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모든 이가 다 친구요 동지요 형제자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온 ‘하느님의 아들’임을 말씀하시면서도, 이와 동시에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의 인류들 모두가 ‘친구임’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확장해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고, 또한 모든 인류가 다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즉 바로 당신이 메시아인 것입니다. 나,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메시아인 것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메시지이고, 요한복음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당신은 누구신가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지금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은 누구인가요? 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누구일까요? 또 지금 이런 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운 우리는 누구인가요? ………… 메시아입니다. 저 위대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이 땅으로 내려보내주신 하느님의 자녀, 메시아입니다. 당신들은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당장 ‘메시아적 소명감’을 생각하십시오. 메시아로서 당신이 해야할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메시아로서 당신이 추구해야할 삶의 가치를 떠올려 보십시오.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한 가정의 식구로서, 한 직장의 직원으로서, 한 교회의 지체로서, 한 민족의 구성원으로, 현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메시아적 소명감으로서 이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물론 저 역시 이 엄청난 질문 앞에서 무한히 큰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만, 우리는 부족한 대로 이 질문에 응답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재적 삶의 모습이 아무리 누추하고 부끄럽고 보잘 것 없어도,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누추하고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말구유의 예수’였지만, 훗날 그는 메시아적 자각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그 뜻을 다 이룬 분이었습니다. 그 점을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당신은 메시아입니다”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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