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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47 추천 수 0 2015.06.05 23: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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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20:19-3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94.91.64 http://dabia.net/xe/810106 

jys.jpg못 보고 믿는 자의 복

요20:19-31, 부활절 둘째 주일, 2015년 4월12일

 

여러분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가끔 그런 이야기를 간증 식으로 퍼뜨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천국에 다녀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도 합니다. 단테의 <신곡>처럼 문학적인 상징으로 말하면 가능하지만 실질적인 것으로 말하면 잘못입니다. 그런 이들은 뭔가 다른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든지, 또는 심리적으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기는 합니다. 구약은 접어두고 신약만 해도 다섯 군데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관계 된 것은 세 가지입니다. 1)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장), 2)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 3)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요 11장).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사 상태에 빠졌던 이들을 모두 죽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착오가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 아이가 병들거나 다른 이유로 숨도 쉬지 않고 심장이 멈춰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포대에 말아 윗목에 놓아두었는데, 하룻밤 자고 나니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흔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런 사건 중의 하나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사로도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날 정도였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까, 비슷해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사건은 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한 제자들도 미처 그 실체를 다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생명 경험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지도 종잡기 힘들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꾸미지 않고, 거칠지만 있는 그대로 증언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들의 증언 중에서 한 대목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전해드릴까 합니다.

 

도마 이야기

요한복음 20:19절에 따르면 안식 후 첫날, 요즘의 요일 계산으로 일요일 저녁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고 꽁꽁 숨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는 모든 이들이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까지 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처형당할 때 생긴 상처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앞에 나타난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전해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딱 끊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5절). 도마의 이런 발언은 초기 기독교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대표합니다. 믿음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다고 도마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고 근거로 없이 무조건 믿는다고 해서 좋은 신앙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자칫 광신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26절부터 도마에게 반전이 일어납니다. 도마가 제자들과 함께 머물러 있던 그 자리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번에도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똑같은 축복의 말씀을 주신 다음에 도마에게 당신의 손을 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27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 난 몸에 손을 댔을까요? 본문은 그것을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추정한다면, 도마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겁니다. 바로 앞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당신의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도마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의 이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본질입니다. 요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복음서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은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주시면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고백으로 큰 명예를 얻은 겁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베드로를 교회의 수장, 즉 초대 교황으로 내세웁니다. 이에 반해 도마에게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별명 아닌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그런 평가는 정확한 게 아닙니다. 도마의 신앙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준이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외경으로 ‘도마복음서’가 있을 정도로 도마는 초기 기독교에서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나의 주님’이라는 말은 원래 로마 황제에게 따라다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퀴리오스, 즉 주님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당대의 최고 권력을 손에 쥐고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퀴리오스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퀴리오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대기업의 총수가 오늘의 퀴리오스는 아닐까요? 실제로 이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보면 대답은 간단히 주어집니다. 현대인들은 세속적인 힘, 즉 경제만능주의, 승리주의, 제국주의, 황제숭배, 권력숭배라는 세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처한 상황도 실제로는 그랬습니다. 로마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의 질서가 사람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퀴리오스로 고백했습니다. 이게 옳은 주장일까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뭔가 비현실적인 몽상에 빠져 있는 건 아니었을까요?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종말론적이고 궁극적인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대한 제국을 이끌고 있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의 무게를 감당하는 이야기가 되려면 예수님의 부활이 왜 생명의 근원인지를, 왜 부활의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대답을 대다수 교인들은 압니다. 최근 설교에서 제가 몇 번 짚기도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한 죄와 죽음의 극복이 그 대답입니다. 죄는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완성시켜보려는 욕망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 전승도 아담과 이브가 눈이 밝아진다는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밝아지면 지식이 늘고, 그러면 사회 리더가 되고 선생이 될 수 있고, 존경받고, 돈도 많아집니다. 이런 걸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성취해보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을 통해서 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런 욕망들이 충돌하는 와중에서 삶을 파괴하는 악순환이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오는 목요일인 4월16일은 세월호 침몰 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 250명과 일반인 54명을 포함해서 304명이 목숨을 잃은 대재난이었습니다. 이런 대재난이야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납니다. 문제는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런 참사를 통해서 많은 걸 배우면서 구성원들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오히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만 분열되고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느 쪽일까요? 저는 사고 당시만이 아니라 지난 일 년 동안 벌어진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대한민국 정부가 이처럼 무기력하고 몰염치할 수 있는지, 화가 치밀고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또는 교묘하고 세련된 편법을 통해서 자기 성취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게 하는 시대정신에 우리가 굴복당한 겁니다. 그것을 기독교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당신이 설명하는 복잡한 교리는 손에 잘 잡히지 않으니까 모르겠고, 그냥 세상에서 남에게 욕먹지 않는 선에서 열심히 노력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충분한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 그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며, 더 나가서 그런 게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만족감에 불과합니다. 참된 행복과 참된 만족을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상대적인 것에 매달립니다. 바둑을 비유로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바둑 동호회가 두 군데 있다고 합시다. 한쪽은 모일 때마다 점심 내기나 돈내기 바둑을 둡니다.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실망하거나, 잘난 척 거들먹거립니다. 바둑 실력은 매일 그 자리고, 꼼수만 늡니다. 다른 동호회는 바둑 전문 기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석을 되풀이 배우면서 바둑의 세계 깊이로 들어갑니다. 바둑이 개인과 공동체를 기쁨으로 채웁니다. 어느 쪽이 바둑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요? 앞의 동호회에 속한 사람들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다투는 것을 바둑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경험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제국의 질서와 권위가 제공하는 삶의 안전한 토대가 허상이며, 그것의 절대화가 죄라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그래서 그 질서와 권위를 온 영혼으로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믿는 자의 복

‘나의 주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을 듣고 예수님은 본문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런 말씀은 듣기에 따라서 도마에 대한 책망처럼 들립니다. 도마의 신앙은 결국 눈과 손이라는 감각적인 수준에 떨어진 것이니, 그걸 초월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도마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도마의 믿음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베드로의 믿음과 동일한 차원입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이해해야합니다. 요한복음은 기원후 90-100년 어간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여러 증인들이 모두 세상을 뜨고 없을 때였습니다. 믿음이 흔들릴만한 상황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신앙에 비해서 자신들이 뭔가 1%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렇지 않다고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도 보고 믿은 사도들과 똑같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부활을 직접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하는 게 핵심이 아니라 ‘믿는 자’가 되는 핵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는 사도들처럼 부활의 주님을 보고 믿는 자도 있고, 요한복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처럼 보지 못했지만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으로 산 이들과 지금 우리들도 모두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영적인 권위를 우리가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앞에서 주눅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도 없고, 더 이하도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에 이미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과 확신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마를 비롯한 사도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그런 경험과 확신으로부터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 가능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신앙고백과 보지 못한 이들의 신앙고백이 다른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성찬식과 세례와 예배 등을 통한 모든 신앙의 표현에는 부활의 주님에 대한 경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의 친교도 부활 신앙을 뿌리로 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참여한다는 희망이 없다면 교회는 세상의 친목 단체 수준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부활공동체입니다. 그걸 정체성으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신앙고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사도들처럼 보고 믿는 자는 아니지만,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보지 못하고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퀴리오스’라는 사실을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 사도들과 똑같이 믿는 자로서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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