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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9:3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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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5.29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인식의 코드, 센서 혹은 [눈]
요9:35-41
남자 화장실에 가서 변기 앞에 다가서면 센서가 깜빡거립니다. 그러면 물이 주루루 흘러내리고 잠시 멈춥니다. 그리고 소변보기를 끝내고 남자가 돌아서면 다시 쏴아 물이 나와 오줌을 씻어 내립니다.
엊그제 서울로 가다가 가평 휴게소 변소에 들려 오줌을 누고 있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들어서서 오줌을 싸던 아이가 저절로 물 나오는 소변기를 보면서 이럽니다. “눈이 달렸나?”
그래서 오늘은 사람의 눈과 기계의 센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소변기에 달린 센서는 눈이 아닙니다. 소변기의 센서는 남자를 보지 못합니다. 키가 큰지 작은지, 몸무게가 얼마인지, 심지어는 짐승인지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왔다’든지 ‘갔다’는 것만을 감지합니다. 센서는 아무것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시감각 기능인 무언가 다가왔다, 멀어졌다 등의 감지는 결코 경험일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건 기계의 단순한 조건반사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센서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단지 현재의 미분된 상황 속에서 물을 내릴지 끊을지만 반복적으로 판단을 하죠.
그래서 화장실 센서는 ‘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몸이라는 건 세상살이의 흔적을 품고 있는 창고와 같습니다. 몸이 있음으로 ‘그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이 타인에게 공인되고, 타인과 더불어 일으키는 삶의 실천 흔적은 바로 몸속에 새겨집니다. 몸이 없는, 그래서 경험을 저장할 수 없는 센서는 단지 주어진 ‘코드’에 맞추어서 기계적으로 자신의 일, 단순한 판단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저는 이 화장실 센서와 인간의 몸으로서의 눈이 가지는 대비적 은유가 오늘날 하나님과 성서를 이해하는데도 작동되고 있다고 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어떤 신앙인들은 남자 변소의 소변기 센서처럼 기독교가 주입한 단순한 코드에 따라 성서를 해석하거나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변기의 센서처럼 간단히 두 가지 정도로만 작동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성서를 해석하는 게 진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요즘 수요일에 두 시간씩 성서관통이라는 걸 합니다. 어느새 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걸 왜 하는가 하면,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달린 센서처럼 입력된 코드로만 성서를 보고 이해하려는 무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사람을 보는 눈,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경험을 저장한 세상살이의 흔적을 지닌 몸의 눈으로 좀 보며 살라고 그러는 겁니다. ‘오병이어’를 읽으면 ‘축복’만 생각하는 그 단순무지의 센서로만 살지 마시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은 이런 통찰을 가능케 하는 주요 텍스트가 됩니다. 9장은 모두 세 개의 장면으로 되어 있죠.
첫 번째 장면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장면입니다(1-7).
두 번째 장면은 바리새들과 고침 받은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입니다(13-34). 대화가 긴 걸 보면 뭔가 옥신각신 하고 있는 거 같죠? 여기서 바리새들은 이 사람이 눈을 뜨게 된 사태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을 윽박지르며 말합니다. ‘너를 눈을 뜨게 한 이는 메시아가 아니라 죄인이다.’
이런 문맥에 이어지는 세 번째 장면은 예수님과 고침을 받은 사람과의 대화입니다(35-41). 거기서 예수님은 ‘봄’과 '보지 못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게 바로 남자 화장실의 센서와 사람의 눈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항상 관찰이 되지만 그는 한번 도 누구를 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항상 타인의 시선 안에 들어 있지만, 그는 한 번도 타인을 바라 볼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 방안에서 옷을 벗고 헐렁헐렁 춤을 추는데 그만 밖에서 누군가 열쇠 구멍으로 그런 그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방안에서 춤을 추는 사람은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모릅니다. 소경의 존재가 바로 그 방안에서 옷을 벗고 헐렁헐렁 춤을 추는 사람과 같은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작은 구멍을 통해 방안의 누군가를 엿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내가 이제 저 인간을 다 알았다’하게 됩니다.
여기서 방안에서 춤추는 자를 들여다보는 인간으로 등장하는 게 바리새인입니다. 이제 방안의 사람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에 의해 존재가 규정됩니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 작은 구멍으로 본 그 상황으로 그를 다 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소경은 항상 이런 식으로 바리새인의 눈에 규정당해 왔던 겁니다.
이건 뭔가 하면, 당시 사회란 바리새주의가 지배하는 문화권의 대중들은 집합적으로 이런 식으로 취급당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에게 입력된 코드 안에서만 세상과 사람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겁니다. 남자 화장실 센서처럼 살아가는 인간군의 대표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눈을 떴습니다. 방안에 갇혀 방 밖에서 열쇠 구멍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거, 그게 바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 봅시다. 방안에서 옷을 모두 벗고 헐렁헐렁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그러는 중에 갑자기 열쇠 구멍이 생각나서 획 하고 눈을 돌려보니 뭔가 까만 게 거기 박혀 있는 걸 알았습니다. 그 때 그는 ‘아, 누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구나’합니다. 자기를 관찰하고 있는 타자의 눈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이 화다닥 나겠죠? 이겁니다.
요한복음의 그는 한 번도 인식하지 못했던 타자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보게 된 것입니다. 한번 도 보지 못했던 다른 존재가 그의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몰래 들여다보던, 그러면서 이제는 내가 저놈의 진면목을 다 알았다고 하던 바리새가 수치를 덮으려고 ‘너를 고쳐준 이가 메시아가 아니라 죄인이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비겁한 수작이죠?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눈을 뜬 이 사람은 입력된 코드로 반응하는 게 아닙니다. 죄인이라든지 메시아라든지 하는 건 입력된 코드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지금 본다는 것이다.”
그는 바리새인에 의해 규정되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바리새인의 센서에 의해 규정되었던 사람입니다. 한데, 이 사건을 거치면서 그는 바리새인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는 바리새가 본 걸 자신이 본 것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바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위대한 사태인지 아십니까? 처음에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앞에 다가서자 센서가 물을 찍 내립니다. 그걸 본 아이는 깜짝 놀랍니다. 이 기계가 사람처럼 눈을 가지고 있구나! 오줌을 누면서 요리조리 변기를 살펴보던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다시 말합니다. “아, 이건 멍텅구리네! 이 기계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내가 몇 살인지 모르잖아?” 하면서 바지춤을 올리고 손으로 변기를 툭 건드리고 나갑니다. 여기서 변기가 누군지 아십니까? 센서로만 작동하고 판단하고 규정하는 바리새입니다. 물 나오는 남자 변기의 속성을 알아 챈 아이는 이제 변기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바리새인에게 규정당하며 살았다가 스스로 보게 된 이 사람에게 더 이상 바리새인들은 무섭거나 위압적인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눈 뜬 사람 앞에서는 센서 달린 소변기는 한 낱 물건일 뿐입니다. 눈 뜬 그에게 바리새인들은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달린 센서같은 존재들일 뿐입니다. 모든 걸 다 볼 줄 알았던 변기가 오히려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어두운 물체였던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바리새들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이 바로 그이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못 보는 자들, 겨우 본다고 해봤자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 같이 입력된 교리에만 작동하는 센서 같은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반면 고침 받은 이 사람은 ‘보게 된자’즉,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가 한낱 물건 그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항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눈이 멀었단 말이냐?” 그럴 때 예수님의 대답이 뭡니까? 41절을 보십시다. 그들은 여전히 입력된 코드에 갇혀 있는 겁니다. 그게 진리의 전부라고 믿는 겁니다. 그들은 자시의 엿봄, 겨우 열쇠 구멍으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한 그 수치에 대해서 성찰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세상을 인식하고, 사랑과 진리를 인식하려고 할 때 부디 입력된 교리 몇 가지로 ‘센서’처럼 인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눈을 떠서 보아야 합니다. 눈을 뜨지 않고 열쇠 구멍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다가는 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내가 열쇠 구멍에 눈을 대고 누군가를 보고 있는데 내 뒤에서 누가 나타나서 “뭐하는 거요?”하는 순간 내가 산산히 부서진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수요일에 두 시간씩, 그리고 매일매일 여러분을 이런 새로운 시각의 세계로 초대하는 이유는 눈을 떠서 스스로 좀 보라는 것입니다. 성서와 진리를 인식하는 코드를 센서에서 눈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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