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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3: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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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5.6.26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허튼 수작에 넘어가지 마시고요.
요13:1-11
예수님은 십자가에 팔려가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합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만찬이 성만찬 예식의 원형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약간 분위기가 달라서, 거사를 앞둔 피의 예식 같은 분위기로 묘사합니다. 그러고 나서 유다의 배신이 있었죠. 대중의 소요를 우려한 산헤드린의 불체포 합의를 번복하고 대제사장은 사병을 급파하여 예수 일당에 대한 소탕작전을 수행합니다. 이때 주모자 예수가 체포당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비교적 이런 정치상황적인 맥락을 그대로 전달을 하지만 마태나 누가는 이런 맥락은 생략하고 그저 마지막 만찬을 성찬례의 기원쯤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마태나 누가의 이해를 받아들였던 거 같습니다. 마가복음보다 앞선 바울의 고린도전서11:23-26절도 그런 해석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마지막 성찬을 정치적인 흐름으로서도 아니고, 종교 전례의 흐름으로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저는 예수님의 오병이어가 단순한 기적사건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서로의 것을 나눔으로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의미로 요한복음이 해석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건 다분히 성서의 예전화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공동체가 점점 예전화 되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례도 앞의 오병이어와 같은 이해의 맥락에 놓여 있는 겁니다. 종교적 의례로 정착한 오병이어와 성찬례를 해체하고 성찬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 요한 공동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만찬은 세족의 행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이때에도 세족은 예식의 분위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족을 ‘세족예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처럼 여러분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시오.”라고 권고한 것은 이 행위를 반복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참으로 느닷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가 가르치는 것은 ‘세족식’을 하라는 게 아니라 ‘이 느닷없는 행동이 교훈을 간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느닷없는 행동이 지시하는 것은 바로 ‘새 계명’입니다.
34-35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지막 만찬과 그 만찬의 끝에 일어난 세족은 바로 이걸 말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성찬 앞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사실은 ‘새 계명’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뻔 한말, ‘서로 사랑하라’가 어떻게 새로운 계명이 되는 걸까요? 유대인들이 사랑을 말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후대의 교회들이 사랑보다 다른 걸 가르칠까봐 그러신 걸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이 계명을 선포한 저변을 이해해야 합니다. 15-17장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겪었던 고초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추방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로마는 이때가 티베리우스-칼리굴라-네로-돈으로 황제 자지를 사다가-베스파시아누스로 이어지는 격변기였습니다. 정치상황이 이러니까 유대교는 살아남기 위해 비유대적인 집단을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대는 로마의 폭력보다 같은 유대사회 내에서의 폭력과 배제가 더욱 심했던 시기입니다. 그렇게 모질게 굴면서 유대인들은 그게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요16:2절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로마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같은 유대인, 그게 주류나 비주류나의 구분에 따른 폭력과 배제가 더 무서웠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종교 간의 다툼이 일어난다고 합시다. 그러면 종교 밖의 정치인이 더 무서울까요, 아니면 같은 내부인 안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이 더 무서울까요? 요한 공동체가 엮어야 했던 배제와 추방의 현실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건 동족에게 쫓겨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세계 안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당시 로마는 지방 분권사회였기 때문에 각 동네의 유대인 회당 공동체는 로마의 지발 권력과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주류 유대인과 세상 즉 로마가 결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로마세계 내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단지 쫓겨나기만 한 게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겁니다.
이런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주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새로운 계명이 되다니요? 어떻게 새로운 계명이 된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지금 처지가 그러니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라고 하는 신뢰의 권고가 아닙니다. ‘유대인-세상’의 권력연합도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서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통용되던 사랑은 왕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것과 같은 ‘하사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권력과 제도는 ‘서로의 사랑’을 장려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권력이나 제도는 ‘하사하는 사랑’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모든 백성들 특히 억눌린 사람들은 ‘서로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윗사람이 베풀어야 그게 사랑인가보다 하는 거였습니다. 뭐, ‘성은이 망극하여이다’이것만 사랑인줄 알았다 그 말입니다.
자, 방금 제가 드린 사랑의 시대적 이해를 기점으로 앞의 몇 사건들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걸 사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팔아 ‘나눠주는’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불리 먹고 난 이들이 예수를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랑’즉 ‘떡’을 ‘내려 줄’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두 내려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예수님은 이 지당할 것 같이 보이는 이 제안들을 모두 거절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은 ‘팔아 나눠주는’것도 아니고, 왕이 되어 ‘떡을 내려주는 것’도 아닌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서로 사랑’이 새 계명이 되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힘과 권력 혹은 제도나 예전으로 하사하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목사가 ‘축도해서 일어나는 사랑’이 아니라 여러분이 ‘서로’사랑하는 그게 ‘새 계명’이라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헌 계명을 신봉하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의 사랑이란 개념은 위에서 선물을 주듯 그렇게 내려줌으로 받아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내려줍니까? 조건 없이, 하늘에서 비와 눈과 햇빛을 내려주듯 내려 줍니까? 아닙니다. 사랑은커녕 폭력과 배제가 넘쳐났습니다. 예수는 이걸 가로지르는 겁니다. 그렇게 어긋난 사랑의 개념에 매달려 살면서 배제와 폭력에 놓인 요한 공동체에게 극단적인 행동 하나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동입니다. 그건 권력으로 행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낮아져서 사랑을 행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기억하라는 겁니다. 이게 세 계명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새 계명의 진수입니다. 곧 위로부터의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위에서 내려주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거, 이래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수여받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걸 말하려는 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걸 제도화에 써먹고 실제는 아직도 사랑이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끼리 하는 사랑은 조금 질이 낫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줄 때 그게 더 효력이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위에서 무슨 사랑이 내려온 게 아니라, 그래서 그가 그 사랑의 보호를 받고 안위를 얻어서가 아니라, 가장 낮은 사람들과 더불어 가슴을 트고, 삶을 트고, 호흡을 트고, 목숨을 터서 ‘서로 사랑’하는 힘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저들을 세상에서 구원하는 길임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삶과 죽음을 당당히 걸어 나가신 것은 바로 이 힘 때문이라는 겁니다. ‘서로 사랑’의 힘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지금 고난을 당하나 ‘서로 사랑’하는 그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현재의 고통을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요, 16:32을 보세요. 모든 제자들은 이 뜻밖의 예수님의 행동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습니다. 새 계명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제 갈 길로 모두 갔다는 겁니다. 오늘 기독교가 이 새로운 계명 ‘서로 사랑’하는 힘을 가볍게 여기고 자꾸 위에서 내리는 힘에 복종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권력과 제도가 그렇게 여러분을 길들입니다. 길들여 있습니다. 나는 그런 이 시대의 교회와 교우들, 우리 자신을 향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선언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세 계명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내가 여러분을 사랑했듯 여러분도 사로 사랑하세요.”(요13:34) 다른 거 말고 이걸로 세상을 이기세요. 예수님도 바로 그것으로 세상을 이기셨거든요. 허튼 수작에 넘어가지 마시고요.
요13:1-11
예수님은 십자가에 팔려가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합니다. 우리는 이 마지막 만찬이 성만찬 예식의 원형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약간 분위기가 달라서, 거사를 앞둔 피의 예식 같은 분위기로 묘사합니다. 그러고 나서 유다의 배신이 있었죠. 대중의 소요를 우려한 산헤드린의 불체포 합의를 번복하고 대제사장은 사병을 급파하여 예수 일당에 대한 소탕작전을 수행합니다. 이때 주모자 예수가 체포당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비교적 이런 정치상황적인 맥락을 그대로 전달을 하지만 마태나 누가는 이런 맥락은 생략하고 그저 마지막 만찬을 성찬례의 기원쯤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마태나 누가의 이해를 받아들였던 거 같습니다. 마가복음보다 앞선 바울의 고린도전서11:23-26절도 그런 해석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마지막 성찬을 정치적인 흐름으로서도 아니고, 종교 전례의 흐름으로도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저는 예수님의 오병이어가 단순한 기적사건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서로의 것을 나눔으로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남’이라는 의미로 요한복음이 해석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건 다분히 성서의 예전화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공동체가 점점 예전화 되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찬례도 앞의 오병이어와 같은 이해의 맥락에 놓여 있는 겁니다. 종교적 의례로 정착한 오병이어와 성찬례를 해체하고 성찬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것이 요한 공동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만찬은 세족의 행위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이때에도 세족은 예식의 분위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족을 ‘세족예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처럼 여러분도 서로의 발을 씻어주시오.”라고 권고한 것은 이 행위를 반복하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참으로 느닷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이 행위가 가르치는 것은 ‘세족식’을 하라는 게 아니라 ‘이 느닷없는 행동이 교훈을 간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느닷없는 행동이 지시하는 것은 바로 ‘새 계명’입니다.
34-35을 읽어 보겠습니다. 마지막 만찬과 그 만찬의 끝에 일어난 세족은 바로 이걸 말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성찬 앞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도 사실은 ‘새 계명’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뻔 한말, ‘서로 사랑하라’가 어떻게 새로운 계명이 되는 걸까요? 유대인들이 사랑을 말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후대의 교회들이 사랑보다 다른 걸 가르칠까봐 그러신 걸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이 계명을 선포한 저변을 이해해야 합니다. 15-17장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겪었던 고초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박해를 당하고, 추방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로마는 이때가 티베리우스-칼리굴라-네로-돈으로 황제 자지를 사다가-베스파시아누스로 이어지는 격변기였습니다. 정치상황이 이러니까 유대교는 살아남기 위해 비유대적인 집단을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대는 로마의 폭력보다 같은 유대사회 내에서의 폭력과 배제가 더욱 심했던 시기입니다. 그렇게 모질게 굴면서 유대인들은 그게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게 요16:2절입니다. 그러니까 이때는 로마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같은 유대인, 그게 주류나 비주류나의 구분에 따른 폭력과 배제가 더 무서웠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종교 간의 다툼이 일어난다고 합시다. 그러면 종교 밖의 정치인이 더 무서울까요, 아니면 같은 내부인 안에서 이해를 달리하는 집단이 더 무서울까요? 요한 공동체가 엮어야 했던 배제와 추방의 현실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도 쫓겨났습니다. 그건 동족에게 쫓겨난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세계 안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당시 로마는 지방 분권사회였기 때문에 각 동네의 유대인 회당 공동체는 로마의 지발 권력과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주류 유대인과 세상 즉 로마가 결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므로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로마세계 내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단지 쫓겨나기만 한 게 아니라 폭력의 대상이 되었던 겁니다.
이런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주의 제자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새로운 계명이 되다니요? 어떻게 새로운 계명이 된다는 것일까요? 이 말씀은 지금 처지가 그러니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라고 하는 신뢰의 권고가 아닙니다. ‘유대인-세상’의 권력연합도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서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들에게 통용되던 사랑은 왕이 아랫사람에게 내려주는 것과 같은 ‘하사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권력과 제도는 ‘서로의 사랑’을 장려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권력이나 제도는 ‘하사하는 사랑’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모든 백성들 특히 억눌린 사람들은 ‘서로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윗사람이 베풀어야 그게 사랑인가보다 하는 거였습니다. 뭐, ‘성은이 망극하여이다’이것만 사랑인줄 알았다 그 말입니다.
자, 방금 제가 드린 사랑의 시대적 이해를 기점으로 앞의 몇 사건들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걸 사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게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팔아 ‘나눠주는’그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오병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불리 먹고 난 이들이 예수를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사랑’즉 ‘떡’을 ‘내려 줄’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두 내려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예수님은 이 지당할 것 같이 보이는 이 제안들을 모두 거절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방식은 ‘팔아 나눠주는’것도 아니고, 왕이 되어 ‘떡을 내려주는 것’도 아닌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서로 사랑’이 새 계명이 되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힘과 권력 혹은 제도나 예전으로 하사하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목사가 ‘축도해서 일어나는 사랑’이 아니라 여러분이 ‘서로’사랑하는 그게 ‘새 계명’이라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헌 계명을 신봉하고 있기도 합니다.
당시의 사랑이란 개념은 위에서 선물을 주듯 그렇게 내려줌으로 받아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러면 좋습니다. 그게 사랑이라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을 내려줍니까? 조건 없이, 하늘에서 비와 눈과 햇빛을 내려주듯 내려 줍니까? 아닙니다. 사랑은커녕 폭력과 배제가 넘쳐났습니다. 예수는 이걸 가로지르는 겁니다. 그렇게 어긋난 사랑의 개념에 매달려 살면서 배제와 폭력에 놓인 요한 공동체에게 극단적인 행동 하나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동입니다. 그건 권력으로 행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낮아져서 사랑을 행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기억하라는 겁니다. 이게 세 계명이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새 계명의 진수입니다. 곧 위로부터의 사랑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입니다. 위에서 내려주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거, 이래서 새 계명인 것입니다. 누구에게서 수여받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걸 말하려는 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걸 제도화에 써먹고 실제는 아직도 사랑이 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끼리 하는 사랑은 조금 질이 낫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줄 때 그게 더 효력이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위에서 무슨 사랑이 내려온 게 아니라, 그래서 그가 그 사랑의 보호를 받고 안위를 얻어서가 아니라, 가장 낮은 사람들과 더불어 가슴을 트고, 삶을 트고, 호흡을 트고, 목숨을 터서 ‘서로 사랑’하는 힘을 경험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 말로 저들을 세상에서 구원하는 길임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삶과 죽음을 당당히 걸어 나가신 것은 바로 이 힘 때문이라는 겁니다. ‘서로 사랑’의 힘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도 지금 고난을 당하나 ‘서로 사랑’하는 그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현재의 고통을 건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요, 16:32을 보세요. 모든 제자들은 이 뜻밖의 예수님의 행동에서 아무것도 읽지 못했습니다. 새 계명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제 갈 길로 모두 갔다는 겁니다. 오늘 기독교가 이 새로운 계명 ‘서로 사랑’하는 힘을 가볍게 여기고 자꾸 위에서 내리는 힘에 복종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권력과 제도가 그렇게 여러분을 길들입니다. 길들여 있습니다. 나는 그런 이 시대의 교회와 교우들, 우리 자신을 향해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선언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세 계명을 여러분에게 줍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내가 여러분을 사랑했듯 여러분도 사로 사랑하세요.”(요13:34) 다른 거 말고 이걸로 세상을 이기세요. 예수님도 바로 그것으로 세상을 이기셨거든요. 허튼 수작에 넘어가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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