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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2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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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예배를 드리는 기쁨을 누리자
분문: 요4: 23- 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음악가 곽상수 씨는 금년에 성가대 지휘 50주년을 맞습니다. 22세부터 72세까지 교회 성가대를 지휘했습니다. 이런 일은 억지로 안됩니다. 예배드리는 기쁨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연세대 송자 총장은 박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총장이 되었으나 여전히 성가대 말석에 앉아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도 예배의 기쁨을 스스로 체험하는 자가 아니면 힘든 일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이 늘 기쁘십니까? 이삭 목사의 간증을 들어 보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80년대 말경 구 소련의 어느 도시에서 이삭 목사는 한 비밀 예배처를 탐방할 기회를 얻었다고 합니다. 예배처에 가보니 예배를 드리기 전부터 성경 통독을 하면서 울던 성도들은 예배가 시작되어서도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낡은 풍금으로 반주를 하는 단 몇 명뿐인 성가대의 송영도 울음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 않고 회중의 찬송 소리에도 울음이 섞였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나 성찬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그렇게 울면서 예배를 드린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그것이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예배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사람이 대답을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KGB에 잡혀가서 20년 혹은 30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우리는 고난 속에서 목숨을 걸고 감격적으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집니까?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122:1)
군산의 한 빵집에서는 오전 10시에 빵이 나오는데, 2시간 전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섭니다. 군산 시내에는 빵집이 정말로 많은데 사람들은 여기에만 줄을 섭니다. 어느 방송국의 한 프로그램에서 리포터가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왜 이렇게 줄을 서서까지 빵을 사려 하냐고 묻자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기 빵이 정말 맛있어요. 올 때마다 줄 서야 되긴 하는데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어요.”
연애 중인 연인들은 상대방이 늦어도 기쁘게 기다립니다. 상대방이 그만큼 소중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도 즐겁습니다. 그러나 권태기에 빠지고 사랑이 식게 되면 5분만 늦어도 표정이 굳고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생텍쥐페리의‘어린 왕자’에는 이런 명언이 나옵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야.”
매주 예배를 기다리는 나의 모습에 이런 행복한 기다림이 있어야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지만 주님이 세우신 교회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공적으로 함께 예배하는 귀한 연합의 시간을 고대하며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찬송가 42장 ‘거룩한 주님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구원주이신 것을 아는 순간,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분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분께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하고 싶은 사랑이 생깁니다. 교회에 가고 싶고, 예배를 드리고 싶은 열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 속에 임재하십니다.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배 가운데 임재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영적으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5:24절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6: 1- 11에 ‘세상법정에 송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내에 분쟁이 전혀 없을 수는 없으나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21:3절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한다고 했습니다.(시51:19, 롬1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중 하나가 예배이지만 공의와 정의가 앞섭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신령과 진정을 다해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선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토요일부터 몸을 깨끗하게 준비하고, 기도하며 준비합니다. 그리고 주일날 집에서 일찍 떠나 기도하며 기대하며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들어가면 예배 때 부를 찬송과 성경분문을 미리 찾아놓고, 기도하며 준비합니다. 예배가 시작되면, 온 정성을 다하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집중해서 설교를 듣고, 정중하게 봉헌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생활 전체를 책임져 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십니다. 준비없이 드리는 예배, 몸은 예배당에 들어와 있지만 마음은 다른데 있는 사람의 예배, 예배를 맡은 사람에 대한 비평과 비난을 하는 사람의 예배,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찬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는 사람도 아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성전 뜰만 밟고 지나간 것에 불과하고, 시간만 허비한 것이 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가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어도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드리려 성막과 지성소에 들어간 제사장이 죽은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발목에는 끈이 달려있습니다. 아무도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니 죽은 사람을 밖에서 끌어 내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역사가 시작되면서 인류는 참 예배자와 거짓 예배자로 나뉘어졌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린 아벨은 참 예배자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이 거절하신 예배를 드린 가인은 거짓 예배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 이유가 창조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배자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 않는 자가 된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그 피로 죄인들을 씻으시고 새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예배자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예배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되 마음이 없는 형식으로 드린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렵겠지요.
예배는 결코 대신 드려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예배 드리는 사람 역시 책임을 벗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예배드릴 때 형식주의에 빠지기 쉬운 위험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먼저 "예배를 본다"는 말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분위기나 형식, 사람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위험은 설교를 들으러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설교 외의 순서들은 예배의 악세사리로 생각하기에 예배에 늦더라도 설교만 들을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지요. 물론 설교를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경청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 듣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이 예배의 전부는 아닙니다. 설교가 중요한 만큼 기도와 찬양과 헌금과 교제가 모두 중요합니다.
그리고 특정한 형식에 매이는 것도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배의 절대적인 형식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어떤 형식의 종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배의 생명은 우리의 마음을 전심으로 드리는데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다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용한 것이요 아무리 오래된 전통이라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유용하지 않은 것이라면 좋은 것일 수 없는 것이지요.
본문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사람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지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그 발에 입 맞추며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귀담아 듣고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짐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구약에서 예배는 곧 제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송아지나 양과 염소, 비둘기를 제물로 잡아 바치는 희생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속하신 은혜를 찬양하는 잔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섬기고 찬양하며 섬기고 기뻐하며 섬기고 말씀을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입니다.
신학자 몰트만은 “예배를 메시야적 잔치”라고 정의했습니다. 찬송은 아주 귀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오직 찬송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새롭게 한다는 말은 질적인 새로움을 말합니다.
오늘날 예배시의 예물은 흠없고 깨끗한 예수님이십니다. 구약시대 제물은 수시로 드려졌으나 오늘날 예배는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6)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히10:2)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10: 10- 12)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이,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 4절에 보면 사도들이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기 위해 최초로 집사제도를 두었습니다. 즉 예배에 집중하기 위해 다른 일들은 집사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만큼 예배드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제사와 예배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져 희생자가 많아지자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동족끼리 싸워서 하루에도 수백 명씩 젊은이들이 죽어갑니다. 마음이 괴로운 링컨은 집무실에서 하나님 앞에 두세 시간씩 엎드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대통령이 열심히 기도하는 것을 본 장관들도 문밖에서 기도하다가 대통령이 문을 열고 나올 때에 장관들이 송구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우리도 문밖에서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대통령이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달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 편에 섰는가가 걱정하고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그것을 걱정하고 있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중 일세 참으로 귀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예배 전에 가졌던 마음 즉 소원이 많습니다. 건강도 물질도 명예도 지위도 그러나 그것은 예배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소원 성취하겠다는 마음은 예배드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가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이것이 예배드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나의 의견과 마음의 소원을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구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 바치는 제사행위였습니다. 제사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사 우리는 이미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만나실 때에는 제사를 통하여 만나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제사를 통하여 나아갑니다. 제사 드릴 때
첫째 제물이 온전해야 합니다. 흠이 있어서는 안되고 부분을 드려서도 안되고 전체를 드려야하고 건강한 것을 드려야 하고 최상의 것을 드려야합니다. 우리 생애의 일부분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을 모두 드려야하고 전체를 드리는 것이 바로 제사입니다.
말라기서 1장 6-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예배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헌물과 예물은 소중합니다. 이것을 탐내고 훔치는 자는 엄한 벌을 받습니다. 가룟유다가 바쳐진 헌물에 욕심을 내었다가, 사탄의 들어가 스승을 배반한 천추의 한을 남겼고(요12: 4-6),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한 순간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이를 거짓말로 속이는 것은 헌물을 훔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5:1-9)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 중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을 노략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간과 그의 아들들과 딸들이 아골 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여호수아 7장)
둘째 제물은 깨끗하고 정성이 담겨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올 때에는 의복에서 마음까지 다 깨끗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올 때 자세가 분명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양이 문제가 아니고 질이 문제입니다. 구약에 보면 부유한 사람은 소를 제물로 드리고 좀 못한 사람은 양을 드리고 그보다 못한 사람은 양의 새끼를 드리고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드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성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본 일인데 저의 어머니(화곡동 장로 교회 권사)는 헌금할 돈을 주일 전날 다리미로 데려서 새 돈과 같이 만들어서 헌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 1-4)
하나님은 마음을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성도의 생활 중심이 예배요 성도의 생활은 예배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일 대예배를 중요하게 여겨야만 하는 이유가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의 중심이 주일 대예배에 있기에 주일예배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다른 모든 예배도 무너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가는 자들만이 다른 예배를 진정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의 책임은 정성껏 준비하는 일입니다. 예배를 방해할 수 있는 장애물들은 미리 처리해야 할 것이고 예배를 담당한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며 왕에게 초대 받은 사람처럼 마음과 옷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을 좀 더 표현해 보기를 원합니다. 물론 어떤 예배형식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식에 관계없이 모든 예배는 본질적으로 그 대상과 목적과 본질이 동일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예배라면 수천 번 드려도 의미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는 한번을 드려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모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8장 '거룩하신 주 하나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 속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준귀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압도되어 엎드리게 됩니다. 깊이 숨겨두었던 죄를 남김없이 고백하고 회개하게 되고, 죄사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상처 입었던 것과 낙심하고 절망했던 것이 치유되고 회복됩니다. 평안을 얻고 담대하게 됩니다. 고민하고 갈등하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새로운 통찰력과 지혜를 얻게 됩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내면 깊숙한 것에서부터, 본질적으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예배 중에 영육간에 치유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영적으로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준비하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던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고, 무엇을 받으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잘 준비하고, 온전히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때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잘 준비하고 온전히 예배를 드리므로 영적으로 새로워지기를 기원합니다.
* 기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배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직장과 일터가 예배장소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신령과 진심으로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온전한 예배에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고, 예배에 성공한 삶을 살게 하소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고 더 깊은 헌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게 하소서. 예배가 진정 나의 기쁨과 의미가 되게 하시고 늘 결단과 새로움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소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은혜교회)
* 은혜교회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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