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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6:48-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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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1.1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몸의 밥상에서 영성의 식탁으로
요6:48-58
2016년 새해 설교
인간의 뇌는 정교한 기계와 같습니다. 이 기계는 색깔과 형태가 제각각인 수많은 전선들로 연결되어 있고요. 이들 전선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기계의 한 부품에서 다른 부품으로 정보를 전달해서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돕습니다. 실제 우리의 뇌는 선이 아닌 신경세포(뉴런)를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만 다릅니다.
사실 우리가 손이나 혀나 눈으로 색깔을 보고 맛을 느끼지만 그건 혀나 손이나 눈이 느끼는 게 아니라 뇌의 이런 신경들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그저 손맛이라느니, 눈으로 보니 이쁘다느니, 감칠맛이 난다느니 해서 그게 마치 손이나 혀나 눈의 주체적인 결정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의 뇌는 100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신경세포들은 대뇌피질 내에서 서로 얽혀서 약 150개조 개의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도로망을 통해 수백 억 개에 이르는 신경전달물질이라는 특별한 화학물질을 방출하고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여기서 덥고, 춥고, 짜고, 맵고, 흥분하고, 기쁘고, 슬프고, 우울하고, 웃고, 울고, 화내고, 박수치는 인생사의 모든 총화가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요. 만약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평화롭게 섞여있는 이 뇌라는 화학 수프 안에 약물이나, 음식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양식집에 가서 처음으로 수프 그릇을 받으면 거기에 후추나 소금을 더 곁들이잖아요. 그러면 대접에 담겨 나온 처음 수프와는 다른 맛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거죠. 수프의 맛이 달라지겠죠. 그러면 왜 수프의 맛을 이렇게 변화 시키느냐? 그것은 바로 몸의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동을 왜 매운 짬뽕으로 바꿔 먹느냐면, 그렇게 음식을 바꿔 먹으면 몸의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오는 사람도 있고, 기분이 쑥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흥분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커피를 마시는 거죠. 어떤 사람은 마시기도 하지만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동안 섭취하는 음식이나 약은 모두 신경세포에 작용을 일으키는 겁니다. 배를 채우려고 먹는 게 아니라 뇌를 자극하기 위해 먹는 거죠. 그 뇌의 자극이 곧 우리의 삶이고요. 이렇게 음식이나 약으로 사람의 몸, 감정이 바뀌면 의식도 바뀌고 태도도 달라지죠.
먹는 것은 단지 이런 것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죠. 환각을 일으키는 것도 있죠. 독실한 신앙심을 고취 시키는 것도 있고요. 통증을 유발하거나 완화하는 음식, 노화를 촉진 하거나 더디게 하는 음식도 있죠. 먹는 음식이나 약물이 이렇게 우리의 생명, 삶, 영성을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음식이나 약물이 우리의 신경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바르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거는 거 아니겠어요?
뭘 먹느냐 하는 게 자신의 생존과 그 생존 감정에 이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뇌 과학적으로 잘 걸 알지 못했던 때에도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알았기 때문에 새해가 되면 ‘한 살을 더 먹는다’했습니다. ‘먹는다’는 그 표현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방금 전에 드린 그런 암시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희랍신화에 의하면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자기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나 모든 생물은 시간 속에서 멸해 갑니다. 세월에 장사가 없는 것이죠. 생명이 없는 물체라 해도 시간 속에서는 그 빛과 형체가 소멸됩니다. 시간 앞에 무너지지 않는 게 없어요. 아무리 단단한 무쇠도 시간의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이겨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시간에 먹히고 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시간에 먹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먹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에 먹혔다’고 말하지 않고 ‘나이를 먹었다’고 시간이 주체가 아닌 자기 자신을 주체로 놓는 어법을 썼던 겁니다. 시간이 나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씹어 먹는 겁니다.
먹는 다는 일이 뭔지는 앞에서 잠깐 뇌과학적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요. 뭐든지 먹으려면 먼저 눈으로 보아야 해요.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적극적인 몸의 변화, 신경의 변화, 정신과 의식의 변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자동적으로 보면 꼭 만져보고 싶어지죠. 그리고는 따거나 잡아야 해요. 시각이 촉각의 세계로 진화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요. 그러나 손 안에 있는 열매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 신경계가 만족을 합니까? 아니죠. 아이들은 뭐든지 잡으면 순식간에 입으로 가져가요.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닙니다. 촉각을 미각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그런 존재적 필요가 나라는 우주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보고, 만지고, 깨물어서 내 밖에 있던 것들이 이제 내 안으로, 나의 일부가 되게 되죠. 그게 바로 ‘먹는다’입니다. 보고, 만지고, 깨물어 씹고, 삼켜서 내 안으로 들어와야 그제서 [먹는다]고 할 수 있어요.
이건 음식을 먹는 경우만이 아닙니다. 지식이나, 의식이나, 진리나, 영생이나 모두 [먹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보고, 만지고, 깨물고, 씹어서 내 몸 안으로, 의식 안으로, 지식 속으로, 영혼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게 아무리 효험이 있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영혼일지라도 내겐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겁니다. 짬뽕을 보고 있기만 한데 어찌 몸의 변화가 일어나겠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떡국을 먹듯이 새해 새날의 시간들을, 그 미지의 세계를 이로 깨물고 씹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혓바닥으로 맛보아야 합니다. 한 해가 복되다는 말은 그냥 복이 호박넝쿨처럼 굴러들어온다는 게 아닙니다. 한 해가 복 되려면 내 앞에 놓인 그 시간들을 보고, 만지고, 깨물고, 씹어서 삼켜야 해요. 그래서 그게 내게 들어와 나의 몸과 정신, 의식과 영혼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 낼 때(자양분이 되고 영향소가 될 때) 비로소 복된 한 해 살이 가 되는 겁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렇게 시간에 먹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거꾸로 시간을 적극적으로 내 삶, 내 생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슬픔이든, 고통이든, 늙음이든 한 사발의 떡국처럼 먹을 때, 씹고 맛보고 삼킬 때 비로소 내 신선한 혈관 속의 피 한 방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새해가 되면 이런 저런 소원을 갖게 되죠. 소원이란 꿈입니다. 왜 이런 꿈을 갖는 걸까요? 그건 새해의 시간들을 씹어 먹으려는 치아예요. 꿈이라는 치아로 시간을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의지라는 치아도 있죠. 그것도 새해의 날들을 먹으려는 근원적 태세죠.
그걸로 깨물고 씹어야 합니다. 그리고 삼켜야 합니다. 혀로는 그렇게 깨문 것들을 맛보는 겁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씹고, 맛보아 삼키면 몸이 반응하고 변화합니다.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시간을 꿈과 의지로 깨물고 씹어야 합니다. 슬픔이든 고통이든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씹은 삶은 맛보고 삼켜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풍요하게 됩니다. 이렇게 야생적인 이빨의 언어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그 새벽의 시간을 동해 바닷가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으로 보기만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거 어리석은 짓입니다. 새해 첫날 새벽에 쏟아지는 그 찬란한 햇빛의 시간을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새해 찬란한 햇살은 어금니로 씹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어야 하는 게 이것만은 아닙니다. 보지만 말고, 만지지만 말고, 깨물고 씹고 삼켜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음식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양반을 보고, 만지고, 깨물고, 씹고, 맛보고 삼켜야 합니다. 이게 진정한 우리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짬뽕이라는 음식이 작동하는 뉴런의 변화체계만으로 우리가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신성한 존재가 우리의 양식이 되어 끼치는 영혼과 가치의 변화체계를 따라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먹고 마시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대중들과 같이 먹고 마시지만 그걸 양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양식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신경계는 하늘에 있고, 그 신경계가 일으키는 변화를 따라 살고 죽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이 영생을 가졌다고 하는 겁니다.
보려고만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만지고, 깨물고, 씹고, 맛보고, 삼키십시오. 거기서 일어난 변화의 시간이 ‘새해’이고, 그렇게 변화된 감정이 ‘행복’이고, 마침내 변화된 의식이 ‘영생’입니다. 그러니 새해를 넘어, 행복을 넘어 영생에 이르시길....예수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이게 당신의 관건입니다, 새해에는!
요6:48-58
2016년 새해 설교
인간의 뇌는 정교한 기계와 같습니다. 이 기계는 색깔과 형태가 제각각인 수많은 전선들로 연결되어 있고요. 이들 전선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기계의 한 부품에서 다른 부품으로 정보를 전달해서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돕습니다. 실제 우리의 뇌는 선이 아닌 신경세포(뉴런)를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점만 다릅니다.
사실 우리가 손이나 혀나 눈으로 색깔을 보고 맛을 느끼지만 그건 혀나 손이나 눈이 느끼는 게 아니라 뇌의 이런 신경들이 작용을 하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그저 손맛이라느니, 눈으로 보니 이쁘다느니, 감칠맛이 난다느니 해서 그게 마치 손이나 혀나 눈의 주체적인 결정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게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우리의 뇌는 1000억 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신경세포들은 대뇌피질 내에서 서로 얽혀서 약 150개조 개의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도로망을 통해 수백 억 개에 이르는 신경전달물질이라는 특별한 화학물질을 방출하고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여기서 덥고, 춥고, 짜고, 맵고, 흥분하고, 기쁘고, 슬프고, 우울하고, 웃고, 울고, 화내고, 박수치는 인생사의 모든 총화가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요. 만약 여러 신경전달물질이 평화롭게 섞여있는 이 뇌라는 화학 수프 안에 약물이나, 음식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까 양식집에 가서 처음으로 수프 그릇을 받으면 거기에 후추나 소금을 더 곁들이잖아요. 그러면 대접에 담겨 나온 처음 수프와는 다른 맛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거죠. 수프의 맛이 달라지겠죠. 그러면 왜 수프의 맛을 이렇게 변화 시키느냐? 그것은 바로 몸의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동을 왜 매운 짬뽕으로 바꿔 먹느냐면, 그렇게 음식을 바꿔 먹으면 몸의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커피를 마시면 잠이 안 오는 사람도 있고, 기분이 쑥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흥분이 일어나기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커피를 마시는 거죠. 어떤 사람은 마시기도 하지만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동안 섭취하는 음식이나 약은 모두 신경세포에 작용을 일으키는 겁니다. 배를 채우려고 먹는 게 아니라 뇌를 자극하기 위해 먹는 거죠. 그 뇌의 자극이 곧 우리의 삶이고요. 이렇게 음식이나 약으로 사람의 몸, 감정이 바뀌면 의식도 바뀌고 태도도 달라지죠.
먹는 것은 단지 이런 것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죠. 환각을 일으키는 것도 있죠. 독실한 신앙심을 고취 시키는 것도 있고요. 통증을 유발하거나 완화하는 음식, 노화를 촉진 하거나 더디게 하는 음식도 있죠. 먹는 음식이나 약물이 이렇게 우리의 생명, 삶, 영성을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음식이나 약물이 우리의 신경계를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바르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을 거는 거 아니겠어요?
뭘 먹느냐 하는 게 자신의 생존과 그 생존 감정에 이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뇌 과학적으로 잘 걸 알지 못했던 때에도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알았기 때문에 새해가 되면 ‘한 살을 더 먹는다’했습니다. ‘먹는다’는 그 표현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방금 전에 드린 그런 암시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희랍신화에 의하면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자기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나 모든 생물은 시간 속에서 멸해 갑니다. 세월에 장사가 없는 것이죠. 생명이 없는 물체라 해도 시간 속에서는 그 빛과 형체가 소멸됩니다. 시간 앞에 무너지지 않는 게 없어요. 아무리 단단한 무쇠도 시간의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이겨내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시간에 먹히고 마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시간에 먹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먹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에 먹혔다’고 말하지 않고 ‘나이를 먹었다’고 시간이 주체가 아닌 자기 자신을 주체로 놓는 어법을 썼던 겁니다. 시간이 나를 잡아먹는 게 아니라 내가 시간을 씹어 먹는 겁니다.
먹는 다는 일이 뭔지는 앞에서 잠깐 뇌과학적으로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요. 뭐든지 먹으려면 먼저 눈으로 보아야 해요.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는 적극적인 몸의 변화, 신경의 변화, 정신과 의식의 변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자동적으로 보면 꼭 만져보고 싶어지죠. 그리고는 따거나 잡아야 해요. 시각이 촉각의 세계로 진화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요. 그러나 손 안에 있는 열매를 만지는 것만으로 그 신경계가 만족을 합니까? 아니죠. 아이들은 뭐든지 잡으면 순식간에 입으로 가져가요.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닙니다. 촉각을 미각의 세계로 이끄는 것은 그런 존재적 필요가 나라는 우주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보고, 만지고, 깨물어서 내 밖에 있던 것들이 이제 내 안으로, 나의 일부가 되게 되죠. 그게 바로 ‘먹는다’입니다. 보고, 만지고, 깨물어 씹고, 삼켜서 내 안으로 들어와야 그제서 [먹는다]고 할 수 있어요.
이건 음식을 먹는 경우만이 아닙니다. 지식이나, 의식이나, 진리나, 영생이나 모두 [먹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는 열매들인 것입니다. 보고, 만지고, 깨물고, 씹어서 내 몸 안으로, 의식 안으로, 지식 속으로, 영혼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게 아무리 효험이 있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영혼일지라도 내겐 아무런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겁니다. 짬뽕을 보고 있기만 한데 어찌 몸의 변화가 일어나겠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떡국을 먹듯이 새해 새날의 시간들을, 그 미지의 세계를 이로 깨물고 씹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혓바닥으로 맛보아야 합니다. 한 해가 복되다는 말은 그냥 복이 호박넝쿨처럼 굴러들어온다는 게 아닙니다. 한 해가 복 되려면 내 앞에 놓인 그 시간들을 보고, 만지고, 깨물고, 씹어서 삼켜야 해요. 그래서 그게 내게 들어와 나의 몸과 정신, 의식과 영혼에 어떤 변화를 일으켜 낼 때(자양분이 되고 영향소가 될 때) 비로소 복된 한 해 살이 가 되는 겁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이렇게 시간에 먹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거꾸로 시간을 적극적으로 내 삶, 내 생명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슬픔이든, 고통이든, 늙음이든 한 사발의 떡국처럼 먹을 때, 씹고 맛보고 삼킬 때 비로소 내 신선한 혈관 속의 피 한 방울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새해가 되면 이런 저런 소원을 갖게 되죠. 소원이란 꿈입니다. 왜 이런 꿈을 갖는 걸까요? 그건 새해의 시간들을 씹어 먹으려는 치아예요. 꿈이라는 치아로 시간을 먹으려고 하는 거예요. 의지라는 치아도 있죠. 그것도 새해의 날들을 먹으려는 근원적 태세죠.
그걸로 깨물고 씹어야 합니다. 그리고 삼켜야 합니다. 혀로는 그렇게 깨문 것들을 맛보는 겁니다.
맛있는 음식을 보고, 씹고, 맛보아 삼키면 몸이 반응하고 변화합니다. 삶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시간을 꿈과 의지로 깨물고 씹어야 합니다. 슬픔이든 고통이든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씹은 삶은 맛보고 삼켜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풍요하게 됩니다. 이렇게 야생적인 이빨의 언어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그 새벽의 시간을 동해 바닷가나,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으로 보기만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거 어리석은 짓입니다. 새해 첫날 새벽에 쏟아지는 그 찬란한 햇빛의 시간을 눈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새해 찬란한 햇살은 어금니로 씹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먹어야 하는 게 이것만은 아닙니다. 보지만 말고, 만지지만 말고, 깨물고 씹고 삼켜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음식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양반을 보고, 만지고, 깨물고, 씹고, 맛보고 삼켜야 합니다. 이게 진정한 우리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짬뽕이라는 음식이 작동하는 뉴런의 변화체계만으로 우리가 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신성한 존재가 우리의 양식이 되어 끼치는 영혼과 가치의 변화체계를 따라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나를 먹고 마시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대중들과 같이 먹고 마시지만 그걸 양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양식은 예수입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들의 신경계는 하늘에 있고, 그 신경계가 일으키는 변화를 따라 살고 죽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이 영생을 가졌다고 하는 겁니다.
보려고만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만지고, 깨물고, 씹고, 맛보고, 삼키십시오. 거기서 일어난 변화의 시간이 ‘새해’이고, 그렇게 변화된 감정이 ‘행복’이고, 마침내 변화된 의식이 ‘영생’입니다. 그러니 새해를 넘어, 행복을 넘어 영생에 이르시길....예수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이게 당신의 관건입니다, 새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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