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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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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6.8.16 |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믿는다.
요1:45-46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가끔 변변치 못한 것에 대한 표현을 할 때 또는 기대 밖의 사람이나 일을 말할 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습니까?”라는 문장을 인용합니다.
우리가 읽는 성서는 본시 히브리인들이 쓰고 읽었던 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히브리말이죠.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이후로 그들은 모국어인 히브리말을 잊어버리고 당시의 국제어였던 아람어를 썼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에스라가 히브리 성서를 읽을 때 이미 그들은 히브리어를 알지 못해서 아람어 통역을 세워야 했습니다(느헤미야8:5-8). 그 이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줄 곧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쓰며 살아왔기 때문에, 성서의 단어를 이해할 때도 그들이 아람어로 어떻게 말했는가를 아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문장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 성서 번역은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수 없다’로 읽히게 됩니다. 그러나 아람어 번역본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문장 중에 ‘선한’이라는 말이 ‘좋은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나사렛에서는 좋은 말씀이 날 수 없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건 뭐와 연결되어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인물은 모세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도하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중요한 인물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시온 산에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머문 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위대한 존재는 모두 산과 연관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시대의 현자들과 랍비들과 이스라엘 신앙인들의 관심은 ‘장창 오실 메시아라면 어느 산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얻고 말씀을 받느냐’가 아주 중요한 관건이었습니다. 이게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틀 박혀 있는 생각이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시작했듯, 다윗이 시온 산에 근거를 두고 있듯이 만약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도 그럴듯한 산에서 출발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초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히브리 성서 즉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교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모세-시내 산, 다윗-시온 산으로 연결된 고리를 예수에게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나사렛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나온다는 말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사렛은 시내산이나 시온산과 같은 구별된 신성한 공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메시아라는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라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즉, 나사렛 예수는 구약성서(히브리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이스라엘 전통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유대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미가서 5:1에는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런 정황 때문에 예루살렘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던 마태, 마가, 누가 공동체에서는 유대인들의 이런 시선을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세상 모두가 나사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하는데 그걸 거부하고 나사렛이라는 동네 이름을 들이대기가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의식의 전환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27:37, 막15:26, 눅23:38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의 머리맡에 명패를 붙이는데 그냥 ‘유대인의 왕 예수’이라고만 써 붙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붙이기 어려웠단 말이죠.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릅니다. 당당하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렇게 붙인 것입니다.(요19:19) 예수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걸 드러내는 곳은 이 요한복음 밖에 없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에는 기록하지 못하는 ‘나사렛’이 떳떳하게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이 사태는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까? 수 백 년 내려온 신앙전통을 이탈하는 새로운 출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존재는 산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대면하고 말씀을 받아야만 한다는 전통의 이탈입니다. 나사렛은 산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긴 사람은 없고 신만 존재하는 높은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신의 권위를 독점할 수 없는 곳입니다.
반면 나사렛은 시내산과 시온산과 완전히 반대의 자리입니다. 산과 대조해서 낮은 곳이고, 신이 아닌 사람이 사는 곳이고, 그래서 산 위처럼 거룩하지 않으며, 항상 자질구레한 인간사의 문제가 발생하는 곳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말씀이 나올 수 있느냐”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나사렛 예수’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며, 구원자로 믿는다는 말은 오랜 전통을 이탈한 새로운 가치와 이해의 근거위에 신앙의 틀을 세웠고 계승해 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신은 신만의 독단적 공간에 존재하지 않으며, 신의 현현은 제한된 공간의 독점적 존재에게만 나타나지 않으며, 신의 권위 또한 특별한 존재의 독과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약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의 낮은 곳에서, 자질구레한 인간사 속에서 그리고 별 볼일 없는 보통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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