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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시각 장애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486 추천 수 0 2017.04.12 23: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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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9:35-4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26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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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시각 장애

요 9:35-41, 사순절 넷째 주일, 2017년 3월26일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누구의 죄인가


예수님의 3년 공생애에는 난치병을 치료하거나 장애를 고치는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이야기가 요 9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다가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먼저 나서서 예수님에게 2절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이니까 그의 부모니이까.

 

제자들의 질문은 당시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임하는 재앙은 죄에 원인이 있다는 게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욥기>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나옵니다. 졸지에 자식을 잃고 재산도 잃고 자신은 악성 피부병에 걸려 돌로 자기 몸을 긁으면서 세상에 태어난 걸 저주하고 있던 욥에게 친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으면 다시 삶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충고합니다. 이런 말이 야박스럽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처럼 들릴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과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지 못하고 퇴행적으로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운명을 수렁으로 몰아가는 어떤 악한 힘을 죄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 운명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길을 가다가 졸지에 테러를 당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경우에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고대인들은 사탄과 죄가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서 오늘 우리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인간 운명의 심연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거와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셨습니다. 시각장애라는 운명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요 9:3)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재앙이 숙명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의 죄 운운은 일종의 숙명주의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끔찍한 재앙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뿐입니다. 인간이 죽을 운명인데 왜 태어났을까요? 그걸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태어났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분명한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재앙까지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기분 나쁘게 들릴 겁니다. 인간의 삶이 신의 심심풀이 놀이에 불과하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님의 말과 생각을 오해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낸다는 말은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시고 시각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일어난 날이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바리새인들이 시각장애인이었다가 치료된 이 사람을 불러다가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를 캐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자기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하기에 그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한쪽은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걸 보니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은 장애인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 걸 보니 죄인은 아니라고 옹호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단 자기들끼리의 논쟁을 뒤로 하고 이 사람과 이 사람의 부모를 불러다가 다시 다그쳤습니다. 출교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 사람의 주장은 한결 같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자기의 눈이 보게 되었으며, 이런 걸 보면 예수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는 겁니다. 모세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이 사람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말을 들으려고 한 바리새인들의 시도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쫓아냈습니다.

 

죄란 무엇인가


오늘 설교 본문인 요 9:35-41절에는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난 사람을 예수님이 찾아가서 만났다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은 두 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시각장애를 고친 사람에게 한 말씀이고, 다른 한번은 불만을 품은 바리새인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먼저 시각장애를 고친 사람에게 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39절입니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말씀을 하는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분이 나빴습니다. ‘우리도 맹인이라는 말인가?’ 하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돌려 말하지 않고 직격으로 말씀하셨습니다. 41절입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는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기가 막혔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선천성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심문하면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절). 그들이 예수를 죄인으로 규정한 이유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오히려 죄인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누가 옳을까요? 각각의 주장에 어떤 근거가 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어느 쪽 입장을 지지했을까요?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들은 오늘 본문에서 시각장애인을 회유하기 위해서 여러 번 불러서 다그쳤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여러 번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도 바리새인들이 다시 묻는 걸 보니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은가.’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28,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미를 풀어서 번역하겠습니다. ‘너는 그의 제자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게 우리의 자랑이다. 네가 말하는 이 사람 예수는 뿌리가 어딘지도 모르는 듣보잡에 불과하다.’ 모세의 율법은 이스라엘을 지탱해주는 규범입니다. 요즘으로 바꿔 말하면 헌법과 법률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한 검찰 총장이 구속 영장을 신청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법과 원칙에 따라서 처리하겠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법과 원칙이 유대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자랑하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법은 이중적입니다. 양날의 검입니다. 그게 없으면 세상은 혼란과 무질서로 떨어집니다. 사소한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사거리에 신호등이 없거나 신호등을 운전자들이 지키지 않거나 약속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빨간 신호등을 통과하는 신호로 읽고 어떤 사람은 정지 신호로 읽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간 문명은 법과 함께 발달되었습니다. 문명이 발달된 사회에는 법이 고도로 세분화되었습니다. 문명이 발달되지 않는 사회에는 법이 없거나 아주 단순합니다. 법은 세상을 합리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규범이라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소위 ‘법치’입니다. 그런데 법은 인간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모든 독재자들도 표면적으로는 합법을 내세웁니다. 히틀러의 나치즘도 독일 사람들의 선거에 의한 것입니다. 합법적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현대 국가에서 전무후무한 세습을 펼치고 있는 북한도 정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입니다. 민주주의이고 공화국이라는 뜻입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도 유신헌법의 역사가 있었으니 할 말이 없기는 합니다. 법은 필요하기는 하되 자칫 하면 삶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법은 필요악입니다. 법 없이 세상이 건강하게 작동되면 가장 좋겠지만 사람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어서 법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였습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의료행위를 한 예수를 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주제에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거냐, 하는 비판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에게는 율법을 절대화하는 것이 죄였습니다. ‘너희가 본다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본다’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죄와 의를 구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의로운 사람이고 그걸 지키지 않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죄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게 나쁜 거는 전혀 아닙니다. 문제는 실제로는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없으면서 지키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살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죽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라면, 율법은 궁극적으로 죄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로마서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기서 인간이 죄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의로움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원의 길로 여기는 율법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본질에 대해서 롬 4:15절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율법의 본질은 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일일이 규정한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율법을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에게 절망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것을 절대화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는(요 9:41)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생명의 심판


오늘 현대인들은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기준으로 예수를 죄인으로 매도한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볼 줄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판단의 주체가 되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학교 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 있습니다. 세상 경험도 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삶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게 얼마나 작은 것인지 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박사 학위를 딴 사람도 그 실력이라는 게 어린아이의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수천억 원의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각종 법률도 인간 삶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는 것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겉으로 보는 척하면서 삽니다. 학력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을 자기의 그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자신의 기준에 들지 않으면 무슨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대상을 배척합니다. 진실을 호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은 선천성 시각장애인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심리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세상을 똑바로 보지 못합니다. 이게 역설입니다. 본다고 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못 보고, 못 보는 사람은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고 아무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질 건 따져야 합니다. 성경기자들도 질문하고 비판하고 논쟁했습니다. 로마서는 교리논쟁입니다. 기독교 역사도 진리논쟁입니다. 예수님도 안식일 논쟁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잘못 보면서 보는 것처럼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 15:14절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영적인 시각장애가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누가 실제로 보는 자이고 누가 영적인 시각장애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즘은 대통령 선거철입니다. 누가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로서 시각장애인이고, 누가 아닐까요? 오늘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데, 누가 보는 자이고 누가 못 보는 자일까요?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의 모 대형 교회의 당회는 편법으로 담임 목사 세습을 시도하고 있어서 기독교계가 시끄럽습니다. 통합 계통의 신학대학교 교수들과 여러 단체가 반대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누가 영적인 시각장애인일까요? 역사가 판단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결정 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자로서 세속정치와 목회의 차원에서 영적인 시각장애가 무엇인지를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관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완전한 것이 아니기에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관점을 말씀드리는 것이 최선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옳고 그름의 기준이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시각장애인이었다가 치료받은 사람에게 ‘당신이 인자를 믿느냐?’(35절)고 물었습니다. 인자는 구약의 묵시사상에서 말하는 종말의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그 사람은 ‘인자가 누군지 알려 달라. 그를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는 인자가 바도 ‘지금 너와 말하는 자’, 즉 예수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제자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인자 개념에 근거해서 39절에서 그에게 ‘내가 심판하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심판은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고 본다고 하는 자들을 맹인이 되게 하는 겁니다. 예수가 심판의 주체라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가 심판의 주체일까요? 앞에서 한번 짚은 것처럼 예수님은 시각 장애의 책임이 그 사람이나 부모에게 있는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3절에서 말씀하셨고, 이어서 5절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은 요 1장 앞부분에서 여러 번 강조되었습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예수가 심판의 주체라는 말은 예수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율법에 따라서 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합니다.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생명 아닌 것들을 절대화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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