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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왕이시다!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01 추천 수 0 2018.12.05 23: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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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8:33-3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985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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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왕이시다!

요 18:33-37, 창조절 열셋째 주일, 2018년 11월25일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로마 법정에서


예수님은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형사재판에 넘겨졌습니다.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예수는 로마 총독이 주관하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빌라도가 피고인 예수에게 던진 첫마디는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오?’입니다. 이 질문은 물론 말이 안 됩니다. 당시 유대 지역의 왕은 헤롯이었습니다. 예수의 부모는 왕족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가 유대인의 왕 운운한 것은 그가 접수한 고발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유대의 최고 종교법정인인 산헤드린 공회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죄목으로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 조치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설교 본문의 앞 구절인 요 18:12절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에 기도하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는 이들에 의해서 체포당하여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끌려갔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를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나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숨어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회당과 성전에서 드러내놓고 말했습니다. 모두 아는 것이니 그걸 나에게 다시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 알고 싶으면 내 말을 들은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옆에서 보기에도 피고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관리인 중의 한 사람이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자신들의 상관인 안나스가 모욕당한다고 느꼈을 겁니다. 안나스는 예수에 대한 심문이 계속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예수를 결박한 채로 넘겼습니다. 가야바는 평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는 말을 하고 다닌 인물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로마의 불만을 해소시키는 것이 유대 민족에도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가야바가 예수를 어떻게 심문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빌라도 총독의 심문 이야기로 직접 넘어갑니다.


공관복음의 보도는 약간 다릅니다. 예컨대 막 14:53절 이하를 따르면 예수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에서 정식으로 심문을 당합니다. 공회원들은 당시 떠돌던 소문을 들이대면서 이실직고 하라고 예수를 다그칩니다. 예수님이 침묵하자 대제사장이 나서서 ‘당신이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대답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2).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의 발언을 신성모독이라고 여겼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목사가 자신을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거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로부터 승인을 받아낼 수 없으니 반역자라는 누명을 씌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즉 예수는 로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정치범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요 18:30)라는 진술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묻습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질문은 총독인 당신의 생각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전하는 것인가?’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실제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우리가 지금 확인할 수 없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의 행간에서 우리는 빌라도가 예수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로서는 예수에게 십자가 처형을 선고한 사람으로 사도신경에 이름이 올라 지난 2천년동안 기독교인들에게 악의 화신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 억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예수 외에 사도신경에 이름이 거론된 유일한 사람입니다. 어쨌든지 예수에 대한 심문이 끝난 뒤에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에게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자신이 보기에 예수에게서 로마법을 위반한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으나 산헤드린과 군중들이 체면을 봐서라도 일단 유죄로 판결을 내릴 테니 유월절 특사로 석방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의 사주를 받은 군중들은 예수가 아니라 정치범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의 타협안이 거부되고 예수가 로마법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 선고를 받게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의 나라와 세상


예수님의 질문을 받는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인지 아닌지 자신은 모르고 유대인들에게서 그런 죄목의 고발장을 받은 것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과 빌라도 사이에 대화가 이어집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과 연관해서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는 빌라도 총독은 당대의 엘리트 정치인입니다. 지방 장관이라 할 수 있는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대 총독은 사형집행권과 지방법원 결정권과 대제사장 임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군사와 사법과 종교의 수장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앞으로 정치 운이 좋으면 더 좋은 지역의 총독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로마 황제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근무하는 동안 유대 지역에 아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정치적인 이해득실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예수가 유대 민중을 선동해서 권력을 쟁취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확실하면 총독은 예수를 제거해야만 합니다.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반역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단지 로마 황제만이 아니라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지역의 모든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로마의 질서가 흔들리지 말아야만 자신의 삶도 평안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법과 예술과 학문과 철학과 교육과 군사 체제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이런 세상의 질서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빌라도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에게 왕은 세상의 권력을 한 손에 잡은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그에게는 중요했습니다. 자신이 일가를 이룬 세상만이 그에게는 삶의 현실(reality)이였습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왔고, 그 세상에서 멋지게 뭔가를 성취했고, 앞으로의 야망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왕권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37a절에서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인가?’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서 우리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타이틀에 관계된 두 번째 사실이 무엇인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37b절입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예수님은 빌라도가 생각하는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자신의 소명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자각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부르고 가르치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공생애를 통해서 알리려고 했던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질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나라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늘 경험하는 세상입니다. 거기서는 진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권력과 명예와 업적이 중요합니다. 힘으로 압도하는 게 선입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제도를 바꿔도 사람들은 힘과 기술과 속임수로 그걸 무력화시킵니다. 예를 들어서 대학교 시간강사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정부에서는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려고 방학 중에도 강사료를 지불하도록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대학은 재정을 문제로 삼아 강사 숫자를 대폭 줄이려고 합니다. 시간강사를 도우려고 했던 제도 개선이 오히려 역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최저 임금 문제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실상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작동되는 것일까요? 세상의 나라는 손에 잡히지만 하나님 나라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걸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서 간접적으로 그걸 찾아야 합니다. 제가 설명하기 전에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이 아니라 초월적인 저 하늘에 있다고 말하면 간단해보이겠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일단 사랑, 평화, 자유가 지배하는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히 채우면, 평화와 자유와 안식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거나 저기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휩싸이는 사건과 경험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도 뭔가 확실하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 6:19-34절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말씀하신 뒤에 이방인들처럼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며 모든 것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살이와는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하는 것에 대한 염려로 한평생을 보냅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서 사회적인 갈등도 크고 심지어는 형제자매들 사이에도 싸움이 일어납니다. 지금 카페나 식당을 새로 연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의원이나 약국이라고 해도 비슷합니다. 영업을 잘해서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인근에 같은 업종의 가게가 들어오면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사업에 실패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지 우리가 잘 압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밥 먹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기독교인은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해도 세상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몰염치하고 비굴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어떤 기독교 종파는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킨다는 의미에서 수혈을 거부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더 크고 본질적인 말씀을 부정하게 됩니다. 어떤 종파는 무저항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집총을 거부합니다. 감옥에 가더라도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니 존중해줘야 합니다. 지금 대체 복무제가 실행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성숙해진다는 하나의 증거입니다. 그게 신학적으로 얼마나 옳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칼을 든 무장 강도와 맞서서 우리도 몽둥이를 들고 저항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무조건 비폭력이 옳은 것일까요? 어쨌든지 세상의 질서 가운데서 기독교인의 신앙양심으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용기가 없기도 하지만 무엇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는 각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옳고 그른지는 차치하고 저절로 세상에서 배웁니다. 경쟁력을 키우는 게 다 그런 공부입니다. 남보다 넉넉하게 살고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습니다. 기독교인이 이런 삶의 영역에만 머문다면 제 2의 빌라도 총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세상 나라의 소리는 크게 들리고 하나님 나라의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단편적으로 아는 것도 실제 삶의 능력으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대충 기독교인이니 착하게 살아야 하는 것으로만 여깁니다.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보내다보니 신앙의 심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도대체 예수가 왕이신 그 하나님 나라는 있기나 한 걸까요? 뜬구름 잡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마지막 대목에서 빌라도에게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거꾸로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옳기도 하고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요즘 20대 젊은 사람들에게는 난민 문제가 귀찮은 걸로만 비칩니다. 난민들 때문에 자신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성폭력이 만연될 수 있다는 페이크 뉴스에 솔깃해집니다. 그게 아니라는 설명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종교 엘리트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고정된 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말하듯이 동굴 안의 삶에 길들여져서 동굴 밖을 모르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믿음도 은총입니다. 삶과 신앙에 대한 자기의 고정된 틀과 그 확신에 묶이지 않으려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자신에게는 왜 믿음의 은총을 주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지 마십시오. 본인이 거절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게 아니니까요.


예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에 우리의 세상살이와 직접 관련된 한 가지 항목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바로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삶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줄 알게 되면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할지,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 삶의 태도가 단단해질수록 여러분은 예수가 왕이신 생명의 나라에, 참된 자유의 나라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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