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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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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8.3.4 주일예배 설교 여의도순복음교회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1~6절)
광야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는 생명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앞에 비춰서 길을 잃지 않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로 22절에 보면 “야훼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1. 인생의 길에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인생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길을 찾아갈 수가 있습니까? 비행기를 조종하여 공중에 올라가면 그때부터 계기판을 보아야 됩니다. 자기의 시력이나 감각을 의지하지 말아야 됩니다. 폭우나 안개 속에 갇혔을 때 조종사의 생사는 계기판에 달렸습니다. 그 계기판을 보지 않고 자기 감각을 의지하면 사고가 납니다. 잠언서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길을 여러 가지로 계획 할지라도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언젠가 미국의 뉴욕 33가에 있는 교회 저녁예배를 인도하겠다고 혼자서 지하철을 탔다가 혼이 난적이 있었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배시간은 가까이 오고 ‘나는 이제 죽었다’ 싶었습니다. 사람이 답답하면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살려달라고 한참을 기도했는데 지나가던 흑인 한분이 도와주어서 교회를 잘 찾아갈수 있었습니다. 마침 6,25전쟁때 한국을 도왔던 분이었습니다.
길을 올바로 찾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주님의 말씀이 발에 등이되고 길에 빛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지팡이와 막대기를 말씀으로 심어 놓았으니 그것을 찾아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길을 찾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무엇을 바라보고 나갔을까요? 창세기 12장 4절에 그 답이 있는데 “이에 아브람이 야훼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말씀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 적어도 1,000 km나 되는 거리입니다. 멀고도 험한 길인데 이러한 길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걸어가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셔서 그의 백성들이 따라 살게 하셨습니다.신명기 5장 10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갈 길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면 천 대로 복을 받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요한복음 1장 17절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0절로 31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중심이 되는 십계명은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 이름을 거룩히 섬겨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을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에 와서는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이 제일이니 사랑을 해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통한 삶의 비밀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로 3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야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복이 있는 사람’에서 복은 히브리어로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신약시대에는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는 “우리를 하늘로 인도하는 길은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길을 걸어갈 때,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야 되는데 구약은 십계명 중심으로 신약은 예수님의 사랑 중심으로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3. 말씀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라
말씀이신 예수님과 동행 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보배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또한 고린도후서 4장 7절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질그릇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 속에 보배로운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막을 우리가 여행 할 때, 모래 구덩이에 빠지면 차가 못나갑니다. 모래에 빠지면 아무리 페달을 밟아도 모래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는 차바퀴에 공기를 뽑아야 합니다. 바퀴이 공기압이 높으면 모래에서 빠져나올수 없습니다. 우리도 인생사막에 빠져서 못 나가 방황을 할 때는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교만과 오만, 자만을 뽑아야 되는 것입니다. 바람을 빼는 것 같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됩니다. 내 힘으로 내 생각대로 해보겠다고 하지 말고 바람을 빼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가다가 넘어졌을 때 그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시편 기자는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라고 시편 119편 28절에 말씀합니다. 또 시편 107편 20절에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영혼이 눌려서 녹을 지라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고치시고 위험한 상황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어디에서 넘어졌든지 넘어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팡이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 끝났다, 이제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라고 생각될 때,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넘어진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을 만나면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흔히 길을 가는 것에 비유하는데 결국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사망으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의 길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해 5월에 마포대교구 조문자 권사님이 그 손녀딸을 데리고 저에게 기도를 받으러 왔습니다. 손녀딸이 아기를 못 가져서 기도하러 온 것입니다. 양쪽 나팔관이 모두 기능을 못해서 시험관 시술도 안 되고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받고 갔는데 며칠 전 권사님에게서 편지가 오기를 “우리 손녀딸이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손녀딸이 기도를 받은 후 아기를 가져서 벌써 석 달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손녀딸이 기도 받으러 왔을 때, 그림을 그려가지고서 온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어린애 가진 모습을 그림을 그렸어요. 배가 볼록하게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기도할 때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하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15년 동안 기도해도 아이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밤하늘 쳐다보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별들을 바라다보며 꿈을 갖게 하셨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십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꿈을 가지고 이미 이루어졌다고 기도하고 고백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독수리나 곰을 박제로 만들어 전시해 놓은 것을 보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습니다. 독수리는 눈이 반짝반짝 거리고 곰은 발톱을 드러내고 당장 뛰어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죽어있는 생명이 없는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박제일 뿐입니다. 자칫 누가 건들기라도 하면 힘없이 쓰러져서 부서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이 형식적이고 율법적인 믿음은 박제된 동물과 같아서 그러한 믿음은 고난과 어려움에 쉽게 무너지고 말며 살아있는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두세 사람이 있는 곳에는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신 분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와 계십니다. 우리가 막다른 골목에 쳐해 있을 때, 주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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