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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2:16 약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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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9. 성암감리교회 http://sungamch.net |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행위'
갈2:16, 약2:24
바울은 갈2:16, 롬3:28, 빌3:9에서 ‘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24에서 야고보는 ‘구원은 행위로서 가능하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를 두고 기독교역사와 신앙의 주체들은 [믿음이냐 행위냐]라는 이분화의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요즘에도 교우들은 바울과 야고보의 말이 서로 대치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바울의 ‘의인론’ 혹은 ‘칭의론’ 또는 ‘구원론’은 갈2:11-21에 등장하는 바울 자신과 게바(베드로)의 충돌 속에서 시작이 됩니다. 게바가 유대인 크리스챤을 대표한다면 바울은 이방인 크리스챤을 대표하죠. 안디옥 교회는 이 두 그룹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 크리스챤들과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로부터 온 어떤 사람들을 무서워하여 식탁을 떠난 것이 문제의 발단입니다. 이방인 크리스챤들을 지지하던 게바가 식사도중에 떠났다는 것은 유대인 크리스챤이라는 특권층의 지지로 돌아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2:18에서 바울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게바의 행위를 범법행위라고 규정을 합니다. 여기서 ‘헐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 즉 자신들을 특별하게 여기고 이방인을 하찮게 여기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라서 사람은 누구도 그것을 헐 수 없습니다. 윫법은 한 마디로 차별의 담입니다. 게바가 처음에는 그것을 담을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고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유대인 크리스챤들은 자신들의 특별하다고 여기게 되고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이방인)을 차별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차별)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평등)”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이 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이방인 크리스쳔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던 것이지 기독교의 보편적인 구원론을 설파한 게 아닌 겁니다. 이방인들의 권리란 단순한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약속한 진정한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의 출발점이고 그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은 무엇을 뜻할까요? 약2:19을 보세요. 이른바 유일신관인데, 바울은 그런 신관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읽으면 당연한 것을 바울이 비난한다고 하겠지만, 바울의 말은 유대교의 율법이 정한대로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걸 지적 수납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대교적 믿음관 이었습니다. 이른바 유일신관은 유대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이걸 믿는 거지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니라는 말이죠. 신6:4에 “우리 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주 이다.”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자식에게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습니다(신6:6-7). 야고보서는 이걸 지적하는 겁니다. 이런 신관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믿는 믿음이 삶으로 실천되지 않는 다면, 유일신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믿음은 유대교적 믿음만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약2:1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다”할 때, 믿음은 기독교적 믿음입니다. 1:3, 2:5에도 다시 표현합니다.
야고보가 믿음의 ‘행위’를 말할 때, 그는 그 행위가 두 가지임을 밝힙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율법에 관련된 행위입니다. 일반 행위란 “내 형제들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위가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의 양식조차 없는데 너희 중에 누가....”(1:4, 2:14)와 같은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유일신관’으로서의 믿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일반의 행위죠. 헐벗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일은 특권이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의 이 선언은 마7:21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하는 내용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행하는 사람과 행하지 않는 사람을 대조시키고 전자를 반석위에 집을 지은 사람으로, 후자를 모래위에 집을 지은 사람으로(7:24-26)으로 간주합니다. 뿐만 아니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 겪을 참담함이 세계 심판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마25:31-46).
야고보서 2:24이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할 때 이 행위 역시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다“라는 것을 믿는 율법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전 존재로 실행하는 믿음인데, 그것을 증언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으로 믿은 게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그 일반적인 행위가 그들을 구원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강조한 행위는 바로 이런 일반적인 행위였습니다. 종교적인,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에게 그 일반적인 행위가 곧 믿음이었고, 이는 예수의 권면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니 야고보의 행위는 예수님의 ’사랑‘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본래 바울의 ‘믿음’과 야고보의 ‘행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울의 ‘믿음’도 일반적인 삶의 실천을 동반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고, 야고보의 행위도 일상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인데, 루터라는 개혁자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택하고 야고보서를 버림으로서 이런 양자택일의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루터는 자신의 개혁사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입장을 옹호하고 야고보서는 지푸라기서신이라고 평가 절하한 것입니다. 루터는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야고보서, 유다서, 히브리서, 계시록을 정경으로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번역을 했지만 일련번호를 매기지 않고 그대로 두어서 차별을 두었습니다. 신약성경이 397년에 정경으로 채택이 되지만 4권의 책은 루터때까지도 정경축에 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루터는 이런 오류를 범했는가 하면, 바울과 야고보의 믿음과 행위를 동일선상에 놓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상은 결코 ‘믿음으로만“이라는 표어로 요약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으로만‘이라는 것에 자신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으로만‘이라는 주장들은 바울을 오해한 초기 기독교인들과 종교개혁가로 불리는 사람들의 편리한 구호였습니다. 바울은 ’믿음‘만을 절대위위에 놓지 않았습니다. 고전13:13은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아십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구절이죠? 만약 ’믿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겼다면 여기서도 제일은 믿음이라고 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롬8:24에서는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습니다.“합니다. 결국 바울은 어떤 경우엔 믿음을, 또 어떤 경우엔 소망을 그리고 사랑을 강조해야 할 때 사랑을 말합니다. 그 어느 것도 배타적인 축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루터가 저지른 실수를 우리가 다시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좀 더 우리의 신앙과 삶이 전체적이고 총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라는 초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초석이 부분적으로 잘려 나간 그 위에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위에 세워진 집은 위태로울 거 아닙니까? 초석을 전체로 써서 집을 지어야만 비바람이 나고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양자택일해서 신앙생활을 하면 쉽기는 합니다. 그러나 불안정하고 위태롭습니다.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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