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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4:21-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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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03.8.24 |
하갈과 사라
바울은 오늘 구약의 이야기를 비유로 삼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 16, 17, 21장에 보도된 아브라함의 매우 은밀한 가족사에 대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줄거리만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레처럼 많은 후손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만 나이가 늙도록 자식에 대한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생존 자체가 워낙 고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후손을 많이 두는 것만큼 화급한 일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남편에게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낳으라고 제안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이스마엘'로서 지금 중동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믿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은 하갈과 본부인인 사라 사이에서 알력다툼이 벌어집니다. 그런 와중에 아브라함은 100세 되던 해에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생물학적 능력으로는 아기를 낳을 수 없게 된 때에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로 만족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은 굳이 이삭을 생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그런데 이스마엘이 열 뎃 살이 되었고 이삭이 젖을 갓 뗄 무렵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을 충돌질 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보기 싫던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습니다.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두 여인의 갈등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상당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간혹 여성신학자들은 아브라함의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그것에 기대서 하갈을 내쫓은 사라의 행위를 비판합니다만, 그런 시각은 성서 본문의 해석에서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고대사회가 안고 있는 한계를 전제하고 성서기자들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이었는가를 파악해야 하지 부수적인 문제에 집착하면 성서의 근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는 바울은 우리에게 성서에 접근하는 바른 방식을 정확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었고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입니다(23절). 그러나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갈과의 관계는 육체적이고 사라와의 관계는 영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이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런 설명은 비유입니다(24절). 이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키는데, 하갈은 율법이며 사라는 은혜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종으로 만들고 은혜는 자유롭게 만듭니다. 이것을 바울은 각각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합니다(25,26절).
갈라디아 교회
이런 정도만 우리가 읽어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무슨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처음에 바울이 가르쳐준 은혜의 복음에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만 그후에 그 교회로 몰려간 율법주의자들의 꾀임 때문에 그들이 율법에 기울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나에게서 떼어 내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열성을 품도록 하려는 술책입니다."(17절).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습니다."(20절). 아무리 바울이 참된 것을 가르쳐주었어도 순식간에 돌아선 갈라디아 교인들을 보고 바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겠는지 이해가 갑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그 감정과 판단력은 이렇게 변덕이 심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엄청난 신앙의 비밀을 경험하고 지혜롭게 전달한 바울이 생생하게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기만 하면 그의 가치관까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어떤 사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데는 상당한 조심성이 필요합니다. 예컨대 세일즈맨들은 고객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 매우 기술적으로 호의를 베푸는데, 고객들은 그런 줄 알면서도 물건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보통 우리가 사이비, 또는 이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태도도 역시 일반적으로 친절하고 적극적이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줍니다. 다른 데서는 별로 느낄 수 없는 친절을 받다보면 그들이 하는 이야기까지 좋게 들리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을 향한 바울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갈리디아 교인들에게 나타나는 율법주의적인 성향을 왜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과격하게 비판하고 있는 걸까요? 하갈이라는 역사적 한 인물을 비유로 삼아 그가 경계하고자 하는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인간적 육정의 소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우리에게 매우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합리적인 생각에 기울어진 태도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 이 말은 좋은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합리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을 좋게 보듯이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태어나게 된 동기를 보면 명확해집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이 늙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후손이 없기 때문에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라고 후손을 이어가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의 나이가 90세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이대로 낮아있다가는 '죽도 밥도' 아니게 될지 모르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훨씬 구체이고 확실한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런 생각과 판단을 그 당시에 아무도 거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여러 명의 부인을 얻음으로써 후손을 널리 퍼뜨리는 걸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게 되면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도 네 명의 부인을 통해서 12명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사실 무슨 방법을 통해서라도 자기 후손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불임부부들이 의학기술의 도움을 통해서 자기들의 아이를 갖겠다는 심정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라고 정의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삭을 조롱하는 이스마엘
바울은 이스마엘과 이삭의 비유를 아주 적절하게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29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였듯이 지금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주의자인 바울을,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미묘한 갈등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하갈과 사라가 함께 살 수 없듯이, 이스마엘과 이삭이 사이 좋게 지낼 수 없듯이 율법과 은혜는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양측 모두 하나님의 약속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바울의 깊은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사태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오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은 무조건 악한 것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사를 이분법적으로 재단합니다. 선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하기만 합니다. 때에 따라서 이런 구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충분한 해석이 없을 경우에 지금 중동 사태에서 보듯이 폭력적인 원리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이 두 차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은혜를 말하면서도 실상은 율법에 치우쳐 있는 경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관계에 대한 바울의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마엘로 대표되는 율법은 우리의 일반적인 삶이나 신앙적인 삶에서 이삭으로 대표되는 은혜와 복음을 조롱합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상당히 추상적이고 미래적인 반면에 율법은 훨씬 구체적이고 현재적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질문해봅시다. 우리가 생산해내는 모든 업적은 우리를 흡족하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삶을 그것에 기울어지게 합니다. 현대의 기술, 기업, 복지, 생산성은 율법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오늘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서 찬성을 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도 거의 이런 차원에 머물러 있습니다.
지금 전북에 계시는 분들은 새만금 간척사업은 찬성하고 위도 핵폐기물 건설은 반대하고 있습니다. 반생태적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사안에 대해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는 것은 생각의 토대가 근본적으로 다른 데 있다는 뜻입니다. 즉 물질적으로 잘 살아야한다는 욕망이 그것입니다. 물적 토대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확실한 기반 위에 올려놓아야겠다는 그런 생각은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에 그 어떤 주장도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듯이 그렇게 조롱할 뿐입니다.
지난봄에 매년 열리는 성결교회의 총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2007년이 되면 성결교회 100주년이 되기 때문에 그 준비를 마감하는 성격의 총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총회차원에 실천해 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업의 목표로 정한 것이 '3천 교회, 100(?)만 신자'였다고 합니다.
숫자는 정확하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교회 숫자 늘리기, 교인 숫자 늘리기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한국교회의 정신적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등 거의 모든 한국 내의 교단이 비슷합니다. 이렇게 숫자를 통해서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매진하는 신앙적 힘은 놀라운 정도로 강력합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신자들에게 다가갑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힘을 지배하면서 그 이외의 소리를 조롱합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라든지, 생태적 미래라든지, 사랑의 일치 같은 개념들은 조롱거리입니다. 당장 교회 숫자가 늘고 교인이 늘어야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쫓아내라
그래서 바울은 성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종과 그의 자식을 쫓아내어라, 종의 자식은 결코 본자식과 같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30절). 여종과 그의 자식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뿌리가 다르기 때문에, 즉 상속자는 하나뿐이기 때문에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앞서 잠시 지적했듯이 어떻게 보면 이런 상황은 아주 비인간적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첩과 첩의 자식이라는 위치가 서러운 마당에, 이제 이삭이 태어났다고 그들을 쫓아낸다면 그건 차마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못되니까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달래서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지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했다는 것을 빌미로 몸종을 쫓아내서야 되겠습니까?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마엘이 조롱한 게 아니라 그냥 데리고 논 것인데 애당초 못마땅한 시선으로 본 사라의 눈에 조롱한 걸로 보였다고 합니다. 어찌되었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이르셨습니다. 아내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너무 야박한 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절대악이기 때문에 쫓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녀의 몸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이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축복 내용을 검토해보면 거의 아브라함과 맞먹는 크기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원래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에 충실하시기 위해서 하갈을 쫓아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게 사실은 양쪽 모두 사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마엘은 율법의 자손으로, 이삭은 은혜와 약속으로 자손으로 말입니다.
자유의 근원
이제 바울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비록 그들이 이삭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면에서 이스마엘의 자손이고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이삭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려는 것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그 시민들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입니다."(25,26절).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얽매어 있지만 하늘의 예루살렘인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유로운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는데도 갈라디아 신자들이 다시 율법주의에 미혹을 받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바울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종으로부터 자유인이 된 사람들이 다시 종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보고 겪게 되는 바울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핵심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5: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단순한 종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아마 자유를 논한 그 모든 철학과 사상에 비해서 훨씬 근원적인 차원에 속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에릭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 분석하고 있듯이, 대개의 사람들은 노동의 소외로부터의 해방, 물질적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무지로부터 해방을 가장 중요한 자유의 요소로 생각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 요소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율법의 성취를 통해서 얻어보려 했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것을 성취하게 되면 또 다른 욕망이 우리를 종으로 삼습니다. 연봉이 2천만 원에서 4천만 원으로 늘어나면 그만큼 자유의 영역도 늘어나야 하는데, 우리의 정신은 늘 궁핍합니다. 단지 필요한 것이 늘어날 뿐입니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시각장애인이 개안수술을 받고 세상을 보게되었다고 합시다. 얼마나 놀라운 자유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자유의 경험은 잠시 그 사람에게 머물다가 사라집니다. 거꾸로 본다는 것 자체가 그를 억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자유, 신체적인 자유 같은 요소들을 제가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가능한 최대한으로 그런 것들이 보장되는 완전한 복지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는 결코 자유가 확보되지 않는다는 데에 근원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고상한 종교인이 될 수 있지만 여전히 형식주의에 빠져버리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자유는 우리의 노력으로 쟁취되는 게 아니라 자유의 근원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하이덱거의 생각처럼 존재가 우리 인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의 자유로부터 실현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자유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인 그리스도가 우리를 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단지 우리의 부도덕성이나 파렴치한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허무한 물질에 기울어지는 모든 경향을 가리킵니다. 이제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이 세상의 피조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 강압적인 쇠사슬이 끊겨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생산해냄으로써 우리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만 속했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을 제 멋대로 산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의 문제와는 담을 쌓고 초월적인 하나님만을 생각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의 질서가 자리잡고 있는 이 세상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가치에 따라 우울해지거나 불편해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이런 기독교의 신앙을 하나의 비유를 듦으로써 오늘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어떤 두 젊은이가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났습니다. 김 아무개 청년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떤 회사의 요구에 따라서 유럽 시장을 조사해야만 했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가 노력한 것만큼 돈을 받게 될 것입니다. 김 군은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물가도 알아보고 사람들의 왕래도 알아보아야만 했기 때문에 여행다운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박 아무개 청년은 인생 공부를 위해서 부모들이 보냈습니다. 비록 재정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그냥 구경만 하면 되니까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적당한 예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떤 가시적인 업적을 이루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종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상속자가 된 자유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종에서 자유인으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는, 세속적인 성취나 종교적인 업적에서 해방된 그런 자유인답게 살아야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그것을 증명하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200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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