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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질 수 없는 거울

갈라디아 이정배 목사............... 조회 수 2051 추천 수 0 2008.08.07 07: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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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갈5:1, 22-24 
설교자 : 이정배 목사 
참고 : 새길교회 2002. 2.24 주일설교 
지난 해 말 이메일상으로 2002년 중 설교가 가능한 주간을 묻는 소식을 접하며 오늘 2월 24일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 적을 두신 선생님들은 다 아시겠지만 2월 마지막 주간은 새학기 준비로 심적으로 몹시 분주하고 부담을 느끼는 때입니다. 또한 언제나 그렇듯이 좋은 설교를 청해듣고 사회 의식 및 도덕적 행위력을 두루 갖춘 새길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설교를 준비하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설 때마다 먼저 제 자신을 돌아보고 무슨 말씀을 전할 수 있는지를 깊이 염려하게 됩니다. 하지만 마치 압복 강변의 야곱처럼 자신과 더불어 씨름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고마운 마음을 갖게됩니다. 신문지상을 통하여 3월 첫 주에 새길 교회의 창립 10주년 기념행사가 있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지난 10년을 회고하며 새로운 10년을 내다보는 여러분들께 더 크고 올곧은 비전이 허락되기를 간구 합니다. 이런 연유로 3.1절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다음주일에 없을 것 같아 오늘 말씀을 그와 관계시켜 준비해 보았습니다.

며칠 전 은퇴하신 노 교수님으로부터 시인 윤동주에 대한 짧은 평론을 전해 받고 읽어 내려가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윤동주는 자신의 서시의 내용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던 지순하고도 청정한 마음씨를 가졌으면서도 암울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날마다 참회하며 살아간 분이었지요. 그는 자신의 얼굴이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처럼 되어 있음을 순간 순간 느끼며 그 거울을 손바닥 발바닥으로 닦아내려고 몸부림을 쳤던 분이었습니다. 참회록이란 시에서 끊임없이 참회록을 써야만 하는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부끄러워한다고 적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라면서 녹슨 거울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참회하고 있는 윤동주가 있음으로 해서 우리 민족은 결코 깨어질 수 없는 거울 하나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윤동주라는 그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보지 않으면 우리는 한없이 부끄럽게 살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를 것이며 무엇을 잘못하며 살고 있는 지 우리의 삶에 대해 참회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윤동주는 분명 암울했던 역사 속에서 우리 자신들을 비추어 지는 영원한 거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런 윤동주의 의식 속에 기독교정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항시인, 항일 시인으로서의 윤동주의 내면 속에 긷든 민족에 대한 참회의식은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이르는 기독교 정신의 산물이었던 것이지요. 민족의식과 기독교 정신 , 이 것들이 둘이 아니요 하나인 것을 보여 주었던 역사적 사건이 바로 3.1 독립 선언입니다.

3.1 독립 선언문에 비교적 늦게 서명한 감리교 출신 신석구 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동료 목사로부터 함께 서명하자는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 이 분은 당시 보수 선교사들의 가르침이 뇌리에 박혀 있어서 몹시 망설였습니다. 기독교인은 정치적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되며, 타종교인들과 함께 일해서도 안 된다 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오랜 기도 중에 신석구 목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정치적인 일에 관여할 수 있으며 불교, 동학교도들과 함께 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3.1선언문에 서명하여 끝까지 자신의 결정에 대해 정신적 배반을 하지 않은 유일한 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민족의 문제와 기독교 정신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민족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의 당면 현실을 바르게 이끌어 갈 책임이 이 땅의 기독교 신앙인 들에게 있다는 상식적인 이야기의 재현일 뿐입니다. 일상의 종교, 거리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성전과 교회에 갇혀버린 오늘의 기독교 모습으로는 민족에게 희망이 될 수 없으며, 대안 문화의 창출도 불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의 거울이었던 윤동주와 같은 영혼을 더 이상 배출할 수 있는 기독교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저 자신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고 이후 예수 정신에 사로 잡혀 살았던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케 했으니 다시는 종노릇하지 말라고 쓰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구원, 영생을 말하고 해탈이란 말도 있지만 이는 결국 그 본질에 있어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는 참 자유를 지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당시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껏 누구의 종이 되어 살아 본 적이 없는 데 왜 우리를 말끝마다 종이라고 부르느냐고 예수께 반문하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 대명천지에 새삼 종노릇하지 말라고 하는 복음이 오히려 조소거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볼 때, 저마다 가진 것이 있거나 배운 것이 많아 상전인척 하며 사는 사람은 보일지언정, 참된 주인, 자유인은 보이지 않으며, 또한 에릭 프롬이 에서 말한 대로 자신의 자유를 내맡긴 채 빵을 얻고 거짓 평화를 이루려는 무수한 종의 모습들만이 줄을 이어 존재할 뿐입니다. 철저하게 수지타산의 논리를 숨긴 채 자신의 행동을 선과 악이라는 종교적 담론으로 포장하고 있는 미국에게서 우리가 참된 자유인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성스러움으로 포장된 권력을 휘두르는 미국은 거짓과 술수로 왕이 되기를 바랬던 가시나무처럼 상전일 수는 있어도 결코 자유한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악의 축 발언에 토하나 제대로 달지 못하고 사양길에 접어든 무기를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사야만 하는 오늘 우리 한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종의 현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은 다음처럼 말합니다. 참다운 자유란 사랑과 희락, 평화와 인내, 양선, 온유 그리고 절제를 동반하는 법이라고. 그리고 또한 이런 행위를 금할 수 있는 법은 없노라고. 한 개인의 삶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민족의 삶 속에서 이런 덕목들이 솟아 나올 수 있을 때 우리는 함께 자유인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며 그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대 이래로 인간은 자율성(Autonomie) 개념을 근간으로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더욱 안정된 삶을 얻으려고 애써온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 안정의 공동체적 토대는 허물어 졌고, 오로지 개인적, 사적인 안정만이 관심거리가 되어 졌습니다..저마다 자율성을 앞세워 안정을 추구해온 결과 세계는 세계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그리고 우리 개인은 개인대로 이율배반적인 모순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첫째로 모두가 그렇게 추구해온 안정이었지만 오늘의 세계는 전혀 안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고 아는 대로 세계는 종교간 문명간, 이념간 갈등으로 전쟁의 장이 되어 가고 있으며, 환경파괴, 환경 호르몬의 영향으로 미래를 도둑맞고 있고, 인간의 심성은 날로 강퍅해져 사소한 일로도 피를 부르는 일들이 너무도 잦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누군가가 현대를 불특정 다수의 살인 시대라고 말한 것도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개개인의 가정도 안정을 잃어 가는 추세입니다. 10여 년 만에 한국을 찾은 한 여성 학자는 외형적으로 드러난 이혼 증가율에도 놀랐지만 한국 가정의 결속력이 너무도 느슨해 진 것에 대해 충격을 금치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등산에 있어 베이스 캠프로 비유되는 가정의 쇠락은 모든 것을 앗아 갈만한 큰 위기로 인식되어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는 모두가 자율, 자유 등을 말해왔지만 현실의 인간은 오히려 독립적이지 못하고 자유하지 못한 채 더욱 철저하게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점점 더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을 축소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손과 머리가 분리되어 손의 창조력을 잃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전구하나 스스로 바꿀 줄 모르고 자동차 보닛을 열고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고추장 된장을 빚고 수정과하나 제재로 만들 수 있는 힘도 시간도 없이 그 모든 것을 남의 손에 맡긴 채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철저하게 종속적인 인간이 되면 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 오로지 돈 뿐 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남의 시간, 재능 심지어 생명까지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에, 그것을 얻고자 수단 방법을 다하게 되지요. 그러나 여기에 인류의 위기가 있고,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며 하느님의 탄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모순을 우리는 희랍의 탄달루스 신화를 통해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우스 아들인 탄달루스는 신들의 비밀을 폭로한 죄로 물이 턱밑까지 잠기는 곳에서 살아야 만 하는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그 물을 마시려 들면 물이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어 항상 목마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할 수 있는 한 안정을 추구하며 살아 왔지만 안정을 얻지 못했으며, 스스로 자유 하려고 발버둥 쳐 왔으나 더욱 종속적으로만 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이율 배반적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자유 하게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바울의 말을 어떻게 이해 할 수 있을 까요. 자기모순 자기 분열 속에 살고 있는 이 민족에게 기독교는 어떤 거울이 될 수 있을 까요. 과거 윤동주가 우리 민족에게 깨어지지 않는 거울이 되었다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떤 거울로서 그들을 비추어야 할까요.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랬고 그렇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참회록을 기록했던 윤동주처럼 우리가 써내려 가야 할 참회록은 무엇일까요.

21세기를 가리켜 학자들은 단순성(Simplicity)과 협력(Cooperation)이 핵심 가치가 되는 시대라고들 말합니다. 지난 세기가 자유와 평등 두 이념이 대결하고 갈등하는 시대였다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21세기의 화두는 단순 소박한 삶과 협동이라는 것입니다. 단순 소박하게 삶을 사는 일은 우리 주변의 존재들에게, 그것이 사람이든, 한 그루의 나무이든 간에, 그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다하는 일(Mindfulness)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주변에 늘 상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배고픈 이웃이 있었고 나무가 있고 꽃이 있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마음을 다하지 못하면 그것들은 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가족을 포함하여 누구에게 단 몇 번이라고 마음을 다해 본 경험이 있는 지요. 그들에게 정말 뜨거운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있었는지요. 한 사람, 나무 한 그루에게 마음을 다하여 살다 보면 우리는 많은 것 없이도, 무엇을 더 소유하려 발버둥치지 않아도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가 이미 현대인들의 소유에 대한 집착은 죽음의 본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다하는 그 곳에서 참다운 협력, 관계의 그물코가 생겨나게 되고 비로소 함께 즐거워하며 어느 누구도 홀로 외롭지 않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지요. 마음을 다하는 곳에서 천지 이웃과 한 몸 되는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이를 일컬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며, 노자 도덕경에는 심무소주라 하여 절대적 현재를 살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21세기를 사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써야 할 참회록의 내용이며, 민족의 거울이 되기 위해 닦아야 할 목표인 것입니다. 은총의 수단으로 알려 진 기독교의 성만찬은 우리의 참회록을 위해 좋은 가이드 라인을 제시합니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함께 골고루 나누어지는 예수님의 식탁, 너무도 단순하고 간편하여 버려 질 것 하나 없는 예수의 식탁을 일상의 삶을 통해 구현함으로써 우리는 민족의 현실을 비추는 깨어 질 수 없는 거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거울은 지금 파란 녹이 낀 채로 빛을 비추고 있지를 못 합니다. 윤동주 시인이 그랬듯이 밤이면 밤마다 손으로 발로, 그것도 부족하면 자신의 온몸을 던져 파랗게 변질된 마음의 거울을 닦아 내려고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이끼 끼듯 흉한 녹을 마음 수북히 쌓아 놓고 3월을 마지하고 창립 주일을 맞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참된 교회는 저명인사들이 많이 모인다고 훌륭해 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위해 괴로워하며 매일 매일 자신의 참회록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 질 때 우리 교회는 민족을 비추이는 깨어지지 않는 거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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