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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2:2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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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4년 10월 24일 주일2부설교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 인생을 누가 살아주나?’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양가집 처녀가 직업도 없고 장례가 불투명한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처녀의 집 부모는 야단이 났습니다. 부모, 형제들이 강력히 말리는데도 이 처녀가 하는 말은 한결같았습니다. “부모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시겠어요? 내 인생 내가 사는데 왜들 이래요? 내가 잘살거나 못살거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 더 이상 시비하지 마세요.” 이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 내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온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내 인생은 누가 살아 주느냐?
[본론]
1. 내 인생 내가 산다
첫째로, 내 인생 내가 산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마귀가 아담을 꾈때에도 똑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 필요가 없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이게 마귀가 아담을 향해서 한 말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마귀는 와서 “왜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듣느냐? 너도 하나님처럼 독립해서 살아라! 네가 하나님이 되라. 네 인생 네가 살지 왜 남에게 속박을 받고 사느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처럼 되어서 좋다 나쁘다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주인이 되지 왜 종으로 사느냐?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아담은 이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 자기가 살겠다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오자 에덴에서 추방되고 그 이후에 환경과 저주, 수고와 죽음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똑같은 말로 시험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느냐? 네 마음대로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 하나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이 40주 40야 금식하고 주리실 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네 인생 네가 살아라! 하나님께 먹고 사는 것조차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 네 인생 네가 살아라!” 그때 예수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하시며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것도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나는 살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뛰어 내려라!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저 밑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네가 뛰어 내릴 때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사뿐이 내려오면 박수를 치고 너에게 명예와 존귀와 영광을 돌릴 것 아닌가! 네 인생 네가 살아라!” 그럴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단호하게 내 인생 내가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에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고 가로되 “네가 내게 절하면 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천하만국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취해서 당당하게 살지 뭘 하나님에게 엎드려 굴복해서 종같이 사느냐?” 그때 마태복음 4장 10절에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나는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산다.” 예수님은 끝까지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인생 내가 살면 내가 모든 삶의 책을 짊어져야 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내가 책임져야 되고 내 인생의 일과 내 인생의 짐을 내가 짊어져야 됩니다. 내가 주인이니까 내 인생 내가 사니까. 내가 책임져야합니다. 그런데 내 인생 내가 살면 내가 마귀를 이길 수 있느냐?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인생 내가 살겠다고 나오자마자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좌절과 절망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탐심과 세속의 종이 되고 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인생 내가 살겠다하면 목에 마귀가 무거운 멍에를 걸어서 끌고 다닙니다. 그것은 죄와 세속과 탐욕과 고통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3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했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사니까 마귀에게 잡혀서 죄의 멍에를 짊어지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 노예 생활을 하고 온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살면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지고 책임져야 되기 때문에 마음에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지혜있고 총명있고 능력 많다고 하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기 힘에 넘치는 수고와 고통이 늘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슬픔과 고통이 끊일 날이 없는 것은 자기 힘으로 짊어질 수 없는 짐과 일들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학문적으로 루터를 크게 도와주었던 멜랑톤은 15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17살에 튀빙겐 대학에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크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또 낙심하여 해야 할일도 추진하지 못하고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에 루터가 찾아와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멜랑톤 자네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자기가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하느냐?” 멜랑톤이 낙심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고 자기가 왕노릇하면서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기가 감당하려니까 감당할 힘이 없어요. 그렇게 총명하고 지혜있는 사람도 인생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지 못하니까 좌절하지요. 그래서 루터가 “네 인생 네가 살지 말아라. 네가 주인이고 네가 왕이면 네 인생 네가 책임져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고 고통을 당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주인이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일을 해주시기 때문에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 살고 우리가 주인되어 살면 악한 꾀, 죄, 교만의 노예, 무거운 짐, 허무와 낭패를 모두다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져서 밀려가듯이 이사야는 말하기를 우리는 다 쇠패한 나뭇잎사귀 같이 죄의 바람이 불면 한사람 남김없이 다 밀려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를 감당할 수 없고 교만과 세상의 무거운 짐과 낭패와 실망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7장 24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다가오는 허무와 절망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20세기 록큰롤의 황제로 불리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생전에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많은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으며 총 10억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하고 147곡이나 히트시켜 70억달러의 돈을 벌었습니다. 천문학적인 수의 돈이기 때문에 입이 딱 벌어져서 계산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200만 달러의 재산을 남긴 채 실패한 결혼으로 인한 외로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으로 부와 인기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엘비스 프레슬리였지만 실상은 공허와 외로움으로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고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은 이와 같이 결국 절망과 허무와 무의미에 짓눌려서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약물중독으로 죽지는 않을지라도 모든 사람은 가슴속에 허무와 무의미의 텅빈 가슴을 안고 인생을 끝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안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니 인생의 의미를 자기가 만들 수 없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가 만들 수가 없습니다. 길 잃어버린 사람, 버림받은 사람, 공허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주인 노릇하면 결국에는 자기의 삶의 모든 결과의 책임을 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이 되고 현재와 미래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가 주인이니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8장 24절에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진 사람은 이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마지막 지옥 심판뿐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벌써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진 사람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북한의 정치와 경제정책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주체사상입니다. 이 주체사상을 다시 말하면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본주의입니다. 북한측에서는 이 주체사상을 통해 각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개혁을 해나가기 때문에 외부의 원조없이도 서로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경제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서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한 조사에 의하면 1995년에서 1998년 사이에 무려 350만명이나 되는 북한 동포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단법인 좋은 벗 2004년 2월의 잡지에 나온 것입니다. 북한이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의 힘으로 살아 보겠다고 하는 주체사상을 추종한 결과 나라 전체가 가난에 꽉 들어차서 국제사회가 도와주지 아니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때에 이런 비극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 인생 내가 산다는 것은 마귀의 논리입니다. 마귀는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내 인생 내가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담은 속았지만 예수님은 속지 않았습니다.
2.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둘째로, 우리는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사람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아직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체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더불어 산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하고 의논해야 되시고 하나님이 원하더라도 우리가 원치 않으면 “안해요. 못해요.” 우리가 원치 않으면 “안 따라가요. 순종할 수 없어요.”하므로 끝없는 하나님과의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고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삽니까? 더불어 살지 못합니다. 부부는 더불어 삽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더불어 살면서 남편과 아내가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더불어 삽니다. 그런데 그 더불어 사는 것이 안 되기 때문에 근 50%의 결혼한 가정이 깨어지지 않습니까?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에 서로서로 보조를 못 맞춥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조를 맞추어야 되는데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보조를 맞추어서 살라고 하면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울 왕이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초대 왕으로써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초대 왕으로 선택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 하나님께 복종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그래서 하나님과 항상 보조를 맞추는데 하나님보고 자기에게 보조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자기 삶에 언제나 보조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이 된지 2년에 하나님의 뜻도 묻지 않고 군사 3천을 모아 블레셋을 치려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격하여 병거 3만과 마병 6천과 수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을 치고 오니 혼비백산 했습니다. 군사 수만명과 병거 3만과 마병 6천명을 3천명 군사로써 어떻게 대결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부탁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꼭 제사장이 드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왕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기다리기가 피곤하니까 “에라~ 까짓것 사무엘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제사장만이 제사를 드리라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내 생각대로 내가 하자!” 그래서 그는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양을 잡아서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내가 태워드리는 제사를 드렸으니 우리 군대를 도와주옵소서.” 제사는 사무엘이 드려야 하는데 사울이 자기의 본분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은 편의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내게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늦게 사무엘이 와보니 벌써 제사가 끝났습니다. 태워 드리는 제사를 왕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진노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로 14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사무엘이 굉장히 화를 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한 것은 인본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편한 대로 하나님을 믿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믿을 것이 뭐냐.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보조를 맞춰야지.” 그 다음 또 다시 나타난 인본주의적 신앙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절로 3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아말렉을 전멸하고 씨를 말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또 편의주의로 했습니다. 그가 나가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말렉을 쳤는데 “내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 다 죽일 순 없지? 아각 왕을 잡아서 당당하게 포로 행렬을 끌고서 가면 내가 영광을 받을 것 아니냐. 그리고 왜 다 진멸할 것이냐 이 소와 살찐 양들이 얼마나 많은고. 이것을 왜 죽여 버리겠느냐. 이것들을 우리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군사들도 나누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 생각이 아니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이 내게 보조 맞추세요.” 그래서 그는 아말렉을 치되 아각왕을 살려 놓고 그의 모든 소와 말과 양과 염소를 좋은 것은 다 전리품으로 잡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9절에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는 하는 말이 “아니오. 이 양이나 소를 가지고 가는 것은 우리만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진노했습니다. “왕이여 하나님이 번제와 다른 제사와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 중에서 무엇을 좋아하겠나이까?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제사고 뭐고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과 더불어 나는 산다. 하나님이 내게 보조를 맞춰야 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자기 중심에 서서 내게 좋으면 믿고 안 좋으면 안 믿는다. 내가 편하면 따라가고 편하지 않으면 안 따라간다. 내가 편하면 주일날 교회가고 편하지 않는 날은 안 간다. 내가 필요하면 십일조 안 드려도 되고 필요할 때만 드린다. 내가 주님을 예배하는 것 을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한다. 편의주의, 인본주의.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만 내 주체를 가지고 하나님은 내게 보조를 맞춰야 된다. 그러한 신앙은 결국 사울이 파산한 것처럼 파산하고 맙니다. 끝없이 하나님과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고 당기고 긴장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그런 신앙을 가졌다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하고 씨름하지 않았습니까? 밤새도록 하나님은 얍복강을 건너가라는데 야곱은 건너가지 않겠다고 해서 하나님이 환도뼈를 치니 절름발이가 되어서 도망칠 수 없어서 절망의 벽에 처했을 때 그는 깨어지고 순종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편의주의, 인본주의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얻어 맞아서 환도뼈가 어그러지고 항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항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3. 내 인생 하나님이 사신다
셋째로, 가장 좋은 신앙이 내 인생 하나님이 살아 주신다.
따라 말씀해 보십시오.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인생 하나님이 살아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완전히 비워 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며 섬길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로 바울선생의 그와 같은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완전히 주님이 우리 주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을 복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섬기기 위해서 살게 되니까 이제 우리의 주인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 31절로 33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하나님을 주인삼고 그 의와 그 나라를 구하고 살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2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가 난관에 부딪힐 때도 늘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주인에게 부탁하면 주인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모르스부호는 가장 쉽고 유용하게 만들어진 전신부호로 1832년부터 얼마 전 위성통신으로 대치되기 까지 100여 년간 주요 해상구조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뚜뚜뚜두뚜’ 하면서 전보치는 것 말입니다. 이 모르스부호는 사무엘 모르스교수가 발명했는데 하루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실험을 하시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까?” “여러 번 그랬지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드렸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그로인해 모르스부호를 발명할 수 있었지요. 덕분에 지금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모르스교수가 모르스부호를 발명한 뒤 제일 먼저 보낸 전문은 잠언서 3장 5절, 6절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모르스부호를 발명해서 친 것이 잠언서 3장 5절로 6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런 위대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이 놀라운 전보부호를 발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소년시절 10살에서 17살 사이가 바로 소년이라고 하는데 소년 시절에 그는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치다가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잡아가면 뛰어가서 곰과 싸워서 빼앗고 곰이 달라들으면 처서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사자가 와서 양새끼를 물고 가면 도전해 가서 양새끼를 빼앗고 사자와 싸워 죽였습니다. 10살에서 17살 사이에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그는 이새의 여덟째아들 제일 멸시받고 천대받고 못난 아들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생명을 받치고 하나님을 찬미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미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온전히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소년이 어떻게 곰하고 싸우고 사자하고 싸웁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그를 통해서 곰을 죽이고 사자를 죽인 것입니다. 10대 소년이 대 장군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골리앗의 도전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나라가 위태할 때에 바로 이 소년 다윗이 사울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서 싸우겠다”하니까 사울이 말하기를 “흥~ 너는 17살 먹은 소년이고 저 장군은 대 장군인데 아에 단칼에 너 목이 날라 간다. 안 된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장군들도 무서워 벌벌 떠는데 다윗이 어떻게 감히 나가겠다고 했습니까? 다윗은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살아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싸움이 자기의 싸움이 아니라 야웨의 싸움이라고 알았었습니다. 만군의 야웨께서 자기 인생을 살아 주시고 자기를 통해서 싸워 주시니까 골리앗이 아무리 대장군이라도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골리앗은 키가 2미터 80센치. 제가 1미터 73센치니까 저보다 1미터나 더 큽니다. 갑옷 무게가 57킬로그램에 창날 무게가 7킬로그램입니다. 거인이었어요. 그런데 다윗이 이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가면서 그가 한말을 들어 보십시오. 아주 가슴이 찌릿한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이 이렇게 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인생 자기가 살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왕으로 주인으로 목자로 받아 들여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살도록 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내 인생은 하나님이 살아주신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눈보라야 처라. 험산준령아 막혀라. 내 인생 내가 살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 않고 내 인생 하나님이 살아 주시니 하나님께서 넉넉히 이기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성직자 토마스 아캠피스의 기도문은 전적인 주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 더 나은 길을 아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이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원하시는 그것만큼 또 주께서 원하실 때 주옵소서. 꼭 주님의 존귀를 위하여 나에게 행하시옵소서. 주께서 보내고 싶은 곳에 나를 보내시고 만사에 주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의 손에 있사오니 바퀴처럼 마음대로 돌리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무엇이나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기를 원치 않나이다.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주님이 가지고 계시고 주님이 주권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네 인생 네가 살면서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결론]
여러분 온유라는 말은 영어로는 “휴밀리티”인데 이는 라틴어로 ‘후무스’란 말인 것입니다. 흙 또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것은 흙 위에 땅 위에 납작하게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처다 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재갈을 물린 말과 같이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나는 겸손해서 흙에 엎드려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한다. 나에게 이것을 배워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살아 주신다. 하나님이 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너의 일을 해주시고 너는 마음에 평안함을 가지고 산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가시밭길을 걸어가도 태산준령을 걸어가도 너는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신다.”
여러분 마귀는 네 인생 네가 살아라!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하나님이 내게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한 신자는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십니다. 나는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버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삽니다. 나를 붙잡아 주실 이도 하나님이시오, 나를 채워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나에게 열매 맺게 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도 밖에도 온통 충만하여 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평안을 가지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고 천국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그 삶이 오늘날 세계 팽배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제 인생 제가 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제 인생 제가 살기 때문에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전쟁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됩니다. 아버지여 또 많은 신자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매를 맞고 부러지고 하는 이유는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하나님보고 자기 삶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려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예수님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유한 마음으로 입에 자갈을 물고 절대로 순종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땅위에 몸을 엎드려서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여 살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시고 목자가 되셔서 우리 인생을 살아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 인생을 누가 살아주나?’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양가집 처녀가 직업도 없고 장례가 불투명한 남자와 결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처녀의 집 부모는 야단이 났습니다. 부모, 형제들이 강력히 말리는데도 이 처녀가 하는 말은 한결같았습니다. “부모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시겠어요? 내 인생 내가 사는데 왜들 이래요? 내가 잘살거나 못살거나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 더 이상 시비하지 마세요.” 이 에피소드를 들었을 때 내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온 질문이 있었습니다. 과연 내 인생은 누가 살아 주느냐?
[본론]
1. 내 인생 내가 산다
첫째로, 내 인생 내가 산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마귀가 아담을 꾈때에도 똑같은 말을 사용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 필요가 없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이게 마귀가 아담을 향해서 한 말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마귀는 와서 “왜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명령을 듣느냐? 너도 하나님처럼 독립해서 살아라! 네가 하나님이 되라. 네 인생 네가 살지 왜 남에게 속박을 받고 사느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4절로 5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처럼 되어서 좋다 나쁘다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주인이 되지 왜 종으로 사느냐?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아담은 이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 자기가 살겠다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오자 에덴에서 추방되고 그 이후에 환경과 저주, 수고와 죽음이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똑같은 말로 시험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느냐? 네 마음대로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 하나님께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이 40주 40야 금식하고 주리실 때 마귀가 와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네 인생 네가 살아라! 하나님께 먹고 사는 것조차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 네 인생 네가 살아라!” 그때 예수께서 마태복음 4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하시며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사는 것도 내 인생 내 마음대로 나는 살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 그러자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뛰어 내려라!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저 밑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네가 뛰어 내릴 때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사뿐이 내려오면 박수를 치고 너에게 명예와 존귀와 영광을 돌릴 것 아닌가! 네 인생 네가 살아라!” 그럴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 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단호하게 내 인생 내가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에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고 가로되 “네가 내게 절하면 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천하만국의 부귀, 영화, 공명을 다 취해서 당당하게 살지 뭘 하나님에게 엎드려 굴복해서 종같이 사느냐?” 그때 마태복음 4장 10절에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나는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산다.” 예수님은 끝까지 내 인생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29절에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내 인생 내가 살면 내가 모든 삶의 책을 짊어져야 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내가 책임져야 되고 내 인생의 일과 내 인생의 짐을 내가 짊어져야 됩니다. 내가 주인이니까 내 인생 내가 사니까. 내가 책임져야합니다. 그런데 내 인생 내가 살면 내가 마귀를 이길 수 있느냐?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인생 내가 살겠다고 나오자마자 마귀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좌절과 절망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과 탐심과 세속의 종이 되고 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인생 내가 살겠다하면 목에 마귀가 무거운 멍에를 걸어서 끌고 다닙니다. 그것은 죄와 세속과 탐욕과 고통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3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했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사니까 마귀에게 잡혀서 죄의 멍에를 짊어지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 자랑을 따라 노예 생활을 하고 온 것입니다. 내 인생 내가 살면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지고 책임져야 되기 때문에 마음에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지혜있고 총명있고 능력 많다고 하더라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자기 힘에 넘치는 수고와 고통이 늘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슬픔과 고통이 끊일 날이 없는 것은 자기 힘으로 짊어질 수 없는 짐과 일들이 생겨나기 때문인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학문적으로 루터를 크게 도와주었던 멜랑톤은 15살에 대학을 졸업하고 17살에 튀빙겐 대학에서 라틴어와 헬라어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에 부딪히면 크게 좌절하고 낙심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또 낙심하여 해야 할일도 추진하지 못하고 절망과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에 루터가 찾아와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습니다. “멜랑톤 자네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자기가 스스로 왕노릇하려고 하느냐?” 멜랑톤이 낙심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살고 자기가 왕노릇하면서 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자기가 감당하려니까 감당할 힘이 없어요. 그렇게 총명하고 지혜있는 사람도 인생문제를 스스로 짊어지지 못하니까 좌절하지요. 그래서 루터가 “네 인생 네가 살지 말아라. 네가 주인이고 네가 왕이면 네 인생 네가 책임져야 되기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고 고통을 당하지 않느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주인이 우리의 짐을 지시고 우리의 일을 해주시기 때문에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힘으로 살고 우리가 주인되어 살면 악한 꾀, 죄, 교만의 노예, 무거운 짐, 허무와 낭패를 모두다 감당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가을에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져서 밀려가듯이 이사야는 말하기를 우리는 다 쇠패한 나뭇잎사귀 같이 죄의 바람이 불면 한사람 남김없이 다 밀려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죄를 감당할 수 없고 교만과 세상의 무거운 짐과 낭패와 실망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 7장 24절에 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면 다가오는 허무와 절망을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20세기 록큰롤의 황제로 불리던 엘비스 프레슬리는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생전에 그는 무대에 설 때마다 많은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으며 총 10억장 이상의 앨범을 판매하고 147곡이나 히트시켜 70억달러의 돈을 벌었습니다. 천문학적인 수의 돈이기 때문에 입이 딱 벌어져서 계산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200만 달러의 재산을 남긴 채 실패한 결혼으로 인한 외로움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약물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적인 조건으로 부와 인기의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엘비스 프레슬리였지만 실상은 공허와 외로움으로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고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은 이와 같이 결국 절망과 허무와 무의미에 짓눌려서 이겨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약물중독으로 죽지는 않을지라도 모든 사람은 가슴속에 허무와 무의미의 텅빈 가슴을 안고 인생을 끝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안 되고 자기가 주인이 되니 인생의 의미를 자기가 만들 수 없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가 만들 수가 없습니다. 길 잃어버린 사람, 버림받은 사람, 공허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주인 노릇하면 결국에는 자기의 삶의 모든 결과의 책임을 져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이 되고 현재와 미래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습니다. 자기가 주인이니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8장 24절에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진 사람은 이 책임을 지고 하나님 앞에 마지막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마지막 지옥 심판뿐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벌써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진 사람은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북한의 정치와 경제정책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주체사상입니다. 이 주체사상을 다시 말하면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인간이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본주의입니다. 북한측에서는 이 주체사상을 통해 각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개혁을 해나가기 때문에 외부의 원조없이도 서로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경제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서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한 조사에 의하면 1995년에서 1998년 사이에 무려 350만명이나 되는 북한 동포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단법인 좋은 벗 2004년 2월의 잡지에 나온 것입니다. 북한이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의 힘으로 살아 보겠다고 하는 주체사상을 추종한 결과 나라 전체가 가난에 꽉 들어차서 국제사회가 도와주지 아니하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을 우리는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될 때에 이런 비극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내 인생 내가 산다는 것은 마귀의 논리입니다. 마귀는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내 인생 내가 살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담은 속았지만 예수님은 속지 않았습니다.
2.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둘째로, 우리는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사람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 아직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주체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더불어 산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우리하고 의논해야 되시고 하나님이 원하더라도 우리가 원치 않으면 “안해요. 못해요.” 우리가 원치 않으면 “안 따라가요. 순종할 수 없어요.”하므로 끝없는 하나님과의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고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삽니까? 더불어 살지 못합니다. 부부는 더불어 삽니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더불어 살면서 남편과 아내가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더불어 삽니다. 그런데 그 더불어 사는 것이 안 되기 때문에 근 50%의 결혼한 가정이 깨어지지 않습니까? 의견이 맞지 않기 때문에 서로서로 보조를 못 맞춥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조를 맞추어야 되는데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보조를 맞추어서 살라고 하면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사울 왕이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초대 왕으로써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초대 왕으로 선택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언제나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 하나님께 복종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그래서 하나님과 항상 보조를 맞추는데 하나님보고 자기에게 보조를 맞추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자기 삶에 언제나 보조를 맞추라고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왕이 된지 2년에 하나님의 뜻도 묻지 않고 군사 3천을 모아 블레셋을 치려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격하여 병거 3만과 마병 6천과 수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진을 치고 오니 혼비백산 했습니다. 군사 수만명과 병거 3만과 마병 6천명을 3천명 군사로써 어떻게 대결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는 사무엘에게 부탁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써 하나님께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사무엘을 기다립니다. 왜냐하면 제사는 꼭 제사장이 드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왕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기다리기가 피곤하니까 “에라~ 까짓것 사무엘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제사장만이 제사를 드리라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고 내 생각대로 내가 하자!” 그래서 그는 사무엘이 오지도 않았는데 양을 잡아서 태워 드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내가 태워드리는 제사를 드렸으니 우리 군대를 도와주옵소서.” 제사는 사무엘이 드려야 하는데 사울이 자기의 본분을 뛰어 넘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것은 편의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내게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늦게 사무엘이 와보니 벌써 제사가 끝났습니다. 태워 드리는 제사를 왕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진노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3절로 14절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영히 세우셨을 것이어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사무엘이 굉장히 화를 냈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한 것은 인본주의적인 신앙입니다. “내가 편한 대로 하나님을 믿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서 믿을 것이 뭐냐.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보조를 맞춰야지.” 그 다음 또 다시 나타난 인본주의적 신앙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 2절로 3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아말렉을 전멸하고 씨를 말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또 편의주의로 했습니다. 그가 나가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말렉을 쳤는데 “내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 다 죽일 순 없지? 아각 왕을 잡아서 당당하게 포로 행렬을 끌고서 가면 내가 영광을 받을 것 아니냐. 그리고 왜 다 진멸할 것이냐 이 소와 살찐 양들이 얼마나 많은고. 이것을 왜 죽여 버리겠느냐. 이것들을 우리 전리품으로 가져가서 군사들도 나누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 생각이 아니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이 내게 보조 맞추세요.” 그래서 그는 아말렉을 치되 아각왕을 살려 놓고 그의 모든 소와 말과 양과 염소를 좋은 것은 다 전리품으로 잡았습니다.
사무엘상 15장 19절에 사무엘이 사울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였나이까”“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그는 하는 말이 “아니오. 이 양이나 소를 가지고 가는 것은 우리만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 드리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 사무엘이 진노했습니다. “왕이여 하나님이 번제와 다른 제사와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 중에서 무엇을 좋아하겠나이까? 순종하는 것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제사고 뭐고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과 더불어 나는 산다. 하나님이 내게 보조를 맞춰야 된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 자기 중심에 서서 내게 좋으면 믿고 안 좋으면 안 믿는다. 내가 편하면 따라가고 편하지 않으면 안 따라간다. 내가 편하면 주일날 교회가고 편하지 않는 날은 안 간다. 내가 필요하면 십일조 안 드려도 되고 필요할 때만 드린다. 내가 주님을 예배하는 것 을 하고 싶으면 하고 안하고 싶으면 안한다. 편의주의, 인본주의.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만 내 주체를 가지고 하나님은 내게 보조를 맞춰야 된다. 그러한 신앙은 결국 사울이 파산한 것처럼 파산하고 맙니다. 끝없이 하나님과 경쟁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밀고 당기고 긴장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그런 신앙을 가졌다가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하고 씨름하지 않았습니까? 밤새도록 하나님은 얍복강을 건너가라는데 야곱은 건너가지 않겠다고 해서 하나님이 환도뼈를 치니 절름발이가 되어서 도망칠 수 없어서 절망의 벽에 처했을 때 그는 깨어지고 순종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는 것은 편의주의, 인본주의로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깨뜨리는 것입니다. 얻어 맞아서 환도뼈가 어그러지고 항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항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3. 내 인생 하나님이 사신다
셋째로, 가장 좋은 신앙이 내 인생 하나님이 살아 주신다.
따라 말씀해 보십시오.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인생 하나님이 살아 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완전히 비워 버리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믿고 의지하며 섬길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로 바울선생의 그와 같은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완전히 주님이 우리 주인이 되고 우리는 주님을 복종하고 믿고 의지하고 섬기기 위해서 살게 되니까 이제 우리의 주인이 우리의 인생을 살아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 31절로 33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하나님을 주인삼고 그 의와 그 나라를 구하고 살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2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가 난관에 부딪힐 때도 늘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주인에게 부탁하면 주인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모르스부호는 가장 쉽고 유용하게 만들어진 전신부호로 1832년부터 얼마 전 위성통신으로 대치되기 까지 100여 년간 주요 해상구조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뚜뚜뚜두뚜’ 하면서 전보치는 것 말입니다. 이 모르스부호는 사무엘 모르스교수가 발명했는데 하루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실험을 하시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중단하신 적이 없습니까?” “여러 번 그랬지요.” “그럴 땐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를 때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드렸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그로인해 모르스부호를 발명할 수 있었지요. 덕분에 지금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주로 모시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모르스교수가 모르스부호를 발명한 뒤 제일 먼저 보낸 전문은 잠언서 3장 5절, 6절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모르스부호를 발명해서 친 것이 잠언서 3장 5절로 6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런 위대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이 놀라운 전보부호를 발명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소년시절 10살에서 17살 사이가 바로 소년이라고 하는데 소년 시절에 그는 놀라운 일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치다가 곰이 와서 양 새끼를 잡아가면 뛰어가서 곰과 싸워서 빼앗고 곰이 달라들으면 처서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사자가 와서 양새끼를 물고 가면 도전해 가서 양새끼를 빼앗고 사자와 싸워 죽였습니다. 10살에서 17살 사이에 어린아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그는 이새의 여덟째아들 제일 멸시받고 천대받고 못난 아들이지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생명을 받치고 하나님을 찬미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을 보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미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온전히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살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소년이 어떻게 곰하고 싸우고 사자하고 싸웁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와 그를 통해서 곰을 죽이고 사자를 죽인 것입니다. 10대 소년이 대 장군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골리앗의 도전을 받고 혼비백산하여 나라가 위태할 때에 바로 이 소년 다윗이 사울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서 싸우겠다”하니까 사울이 말하기를 “흥~ 너는 17살 먹은 소년이고 저 장군은 대 장군인데 아에 단칼에 너 목이 날라 간다. 안 된다”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장군들도 무서워 벌벌 떠는데 다윗이 어떻게 감히 나가겠다고 했습니까? 다윗은 자기는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살아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싸움이 자기의 싸움이 아니라 야웨의 싸움이라고 알았었습니다. 만군의 야웨께서 자기 인생을 살아 주시고 자기를 통해서 싸워 주시니까 골리앗이 아무리 대장군이라도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골리앗은 키가 2미터 80센치. 제가 1미터 73센치니까 저보다 1미터나 더 큽니다. 갑옷 무게가 57킬로그램에 창날 무게가 7킬로그램입니다. 거인이었어요. 그런데 다윗이 이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가면서 그가 한말을 들어 보십시오. 아주 가슴이 찌릿한 말을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이 이렇게 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인생 자기가 살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왕으로 주인으로 목자로 받아 들여서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살도록 했기 때문에 담대하게 하나님을 의지해서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내 인생은 하나님이 살아주신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바람아 불어라. 눈보라야 처라. 험산준령아 막혀라. 내 인생 내가 살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지 않고 내 인생 하나님이 살아 주시니 하나님께서 넉넉히 이기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성직자 토마스 아캠피스의 기도문은 전적인 주님의 주권을 고백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오! 주여 주께서 더 나은 길을 아십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무엇이나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원하시는 그것만큼 또 주께서 원하실 때 주옵소서. 꼭 주님의 존귀를 위하여 나에게 행하시옵소서. 주께서 보내고 싶은 곳에 나를 보내시고 만사에 주 뜻대로 하시옵소서. 나는 주의 손에 있사오니 바퀴처럼 마음대로 돌리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종입니다. 무엇이나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나는 나를 위하여 살기를 원치 않나이다. 주님만을 위하여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권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주님이 가지고 계시고 주님이 주권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고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살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네 인생 네가 살면서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느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결론]
여러분 온유라는 말은 영어로는 “휴밀리티”인데 이는 라틴어로 ‘후무스’란 말인 것입니다. 흙 또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것은 흙 위에 땅 위에 납작하게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처다 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재갈을 물린 말과 같이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나는 겸손해서 흙에 엎드려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한다. 나에게 이것을 배워라. 그리하면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살아 주신다. 하나님이 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너의 일을 해주시고 너는 마음에 평안함을 가지고 산다. 동남풍이 불고 서북풍이 불어도 가시밭길을 걸어가도 태산준령을 걸어가도 너는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신다.”
여러분 마귀는 네 인생 네가 살아라! 하나님이고 뭐고 없다. 네 인생 네가 살아라. 그렇게 말합니다. 또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 하나님이 내게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한 신자는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살아 주십니다. 나는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버리고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삽니다. 나를 붙잡아 주실 이도 하나님이시오, 나를 채워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오, 나에게 열매 맺게 해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도 밖에도 온통 충만하여 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평안을 가지고 승리하는 인생을 살고 천국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담과 하와의 타락한 그 삶이 오늘날 세계 팽배하여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제 인생 제가 산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제 인생 제가 살기 때문에 시기와 분노와 질투와 전쟁과 고통이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피투성이가 됩니다. 아버지여 또 많은 신자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매를 맞고 부러지고 하는 이유는 내 인생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고 하나님보고 자기 삶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려고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예수님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유한 마음으로 입에 자갈을 물고 절대로 순종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땅위에 몸을 엎드려서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여 살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왕이 되시고 주인이 되시고 목자가 되셔서 우리 인생을 살아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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