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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5: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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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사랑과 자유
갈 5:13-15
06. 1. 22, 오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 기독교인에게 오는 가장 큰 유혹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율법주의와 자유주의입니다. 율법주의가 좀더 잘 믿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오는 유혹이라면 자유주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위안을 삼으면서도 그리스도에게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즐기려는 사람에게 오는 유혹입니다.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는 자신의 어떤 의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속성 때문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유주의는 언제는 확신에 넘치고 언제는 당장이라도 지옥에 갈 것 같은 착각 속에서 그도 역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의 유혹은 우리들이 벗어나기가 힘들 정도로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 끼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을 유지시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특히 모든 것이 자유롭고 모든 것이 다 허용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은 이 양극단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함께 고민하면서 참된 자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 자유를 위한 부르심(13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을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1절에서 이미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를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이미 자유자이지 결코 노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했길래 성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부르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결박 아래 있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의 그 모진 고난을 다 당하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 인한 저주와 죄책감의 노예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규정에 대한 학생신분으로 그리고 율법의 속박에 메어서 꼼짝을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결박 아래에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셔서 우리의 속박을 끊어버리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본성의 분담자로 만들어주셔서 이제는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자유자라고 하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왔던 거짓교사들과 같이 자유를 얻은 자들에게 다시 결박을 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우리들에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뿐만 아니라 죄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자유해야 합니다. 심지어 죽음으로부터도 우리는 자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삶 자체에는 힘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죄책감에 억눌려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은 마귀의 요구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면서 힘을 못쓰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힘있는 신앙생활을 하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로 와서 속삭입니다. 너는 자유자가 아니라 종이다라고 말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가 자유자가 아니라고 와서 속삭입니다. 옛날에 머슴살이를 하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머슴살이를 하여 세경을 받아 논도 사고 밭도 사서 이제 어느 정도 자립을 할 정도가 되어서 자립을 합니다. 그런데 옛날의 주인들이 자꾸만 그를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만 생각하고 마구 대하고 조종하려고 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마귀가 마치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기 때문에 자유자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는 부르실 때에 이미 자유자로 부르셨고 이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종에게 자유를 주는 제도가 여러 가지로 되어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정당하게 자유를 얻는 사람도 있었고, 주인이 자유를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는 국가적으로 법적으로 그들을 해방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종이 해방이 되어서 평민의 최고 계급인 호민관에까지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호민관이 끝나면 원로원의원으로서 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번 노예가 되었던 사람이 자유가 되면 과거의 주인이 그를 노예라고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러한 모습을 주변에서 흔히 보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설명하는데 아주 쉽게 설명합니다.
왜 과거에 노예노릇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기에 자유자로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는 종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의 신분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2. 참된 자유는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13절).
참된 자유는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13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우리에게 이미 자유하다고 선언하고서 이제 와서 다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참된 자유는 율법의 자구에 얽매여서 율법의 종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은 이제 사랑의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미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여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사랑의 종이 되는데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소유한 사람은 사랑으로 종노릇하기를 먼저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종이 되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먼저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셔서(빌2:7)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요13:14) 그의 전 삶을 통하여 이 사랑으로 하는 종노릇을 실천에 옮기셨기 때문입니다(고전9:19∼22). 주님은 이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는 요13:14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심으로 서로 섬기는 생활을 강조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서로 섬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섬김의 자유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깊은 애정을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종노릇하기를 즐겨합니다.
자유롭게 살던 한 남녀가 결혼하면 그들은 당장에 얽매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종노릇 하므로서 진정한 자유가 있음을 알고 그 자유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다른 데에서 만족과 자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부부간에 서로에게서만이 자유를 찾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만끽하는 자만이 결혼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결혼한 부부가 자유를 내세우면서 서로 자기의 길을 간다면 그것은 부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서로에게 종노릇할 때에 가장 행복한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서로 자기 주머니 차고서 생활하는 부부가 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종노릇하기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일 뿐입니다. 거기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주어진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베풀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결혼생활과 똑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에게 종노릇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종이 될 때에 비로소 거기에는 사랑이 있고, 거기에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참된 자유는 율법의 완성(14절).
그래서 참된 자유는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14절 말씀은 레19:18의 인용으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 17∼40절에서 요구하신 것이다. 유대인은 유대인만을 사랑하고 이방인은 사정없이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누구든지 율법의 본래의 정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룰이 필요합니다. 그 안에서 벗어나게 되면 나는 자유로운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자유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사랑이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온 율법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의무를 규정하는 율법을 제외한 온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 율법을 다 이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13:8에서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근원이 바로 그리스도이신데 롬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합니다. 주님은 요13:34에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요15:12에서는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의 전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를 소유한 우리들이 가진 루울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출하는 향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동감있게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최우선적이며 필수불가결하게 해야 할 전제조건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인도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자유를 누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4. 참된 자유는 남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15절).
진정한 자유는 죤 스토트의 말대로 "이웃을 착취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맹수들은 싸울 때에 상대를 존중한다고 동물학자들은 말합니다. 맹수들은 동족 간에는 절대로 생명에 치명적인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방울뱀은 무서운 독이 나오는 송곳니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울뱀과 싸울 때는 이 무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자들은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주도권 쟁탈전을 벌일 때 동족과 치열하게 싸우지만 상대를 죽이거나 중상을 입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동물세계의 싸움의 법칙입니다. 인간은 동족간에 살상의 무기를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상대가 항복을 하면 더욱 잔인하게 공격해 굴복을 받아냅니다. 약점을 보이는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위대한 것은 사랑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무기는 사랑입니다. 1g의 사랑은 1t의 무기보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국민일보).
바울은 앞에서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승리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승리를 생각해야 하고 하나님의 교회의 승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남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입니다.
"우리"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나"라는 말을 사용하는 서양인들은 개인보다는 단체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라는 말을 "나"라는 말보다도 더 많이 사용하는 우리 한국에서는 모두보다는 나 개인을 더 우선하고 생각하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사로 잡혀서 우리는 어느새 이웃이라는 관념이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라는 생각을 잊어버린 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사랑의 법이 아니라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사람이 출세하고 잘 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날마다 싸우는 모습이 맹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사랑하는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희생하고 우리를 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 자유를 소유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랑만이 살 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들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을 때에 소중한 것입니다. 만일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면 혼란만이 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왜 이리도 시끄럽습니까? 그것은 자유를 자유로 알지 못하고 방종하는 일부 사람들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되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면서도 무절제한 방종으로 흘러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자유를 위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소유했다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소유하고 사랑으로 종노릇했다면 우리는 맹수가 싸우듯이 피차 물고 뜯지는 않을 것입니다. 롬13:10에서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결정적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한 율법사는 하나님께 대한 모든 사랑을 다 실천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슬퍼하며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봉사에 열심입니다. 예배와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일에 열심입니다. 이 일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증명될 수 있는 이웃에 대한 사랑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더욱 열심으로 표현합시다. 그에 못지 않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므로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선포하는 이 시대의 빛과 소금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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