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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2:20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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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8-11-16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최고의 감사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上).
Ⅰ. 본문해설
갈라디아 교회는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참된 복음 신앙을 거절하고 율법으로 회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멍에를 다시 지는 것은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주신 종의 멍에를 다시 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 사도는 다시 오직 그리스도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녀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유명한 구절로 자신의 신앙을 담대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上).
Ⅱ. “못 박혔다”의 의미
그렇다면 “못 박혔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일회적 사건
이것은 우선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에게도 일회적이었고 사도바울에게 그 의미가 적용되었던 것도 일회적인 일이었습니다. 사도는 전에는 그리스도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하며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기 위해 길을 재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그 일은 커다란 혼란이자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에 대한 형벌이라고 믿어온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며 부활할 수 없는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말할 수 없는 영광으로 자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사실이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예수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이며,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위한 대속적인 죽음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도 더불어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이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오히려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그리스도의 크신 능력에 대해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다음 두 가지 일을 경험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철저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백한 사건과, 그러므로 죄인인 자기 자신을 향한 모든 진노로부터 자신을 벗어나게 해주시는 유일한 출구가 ‘그리스도 예수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회심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그 큰 고난의 사건의 첫 적용이었던 것입니다.
B. 반복적 경험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를 쓸 때도 일회적인 십자가의 경험으로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도 한 번이었고 그의 회심도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회적인 사건은 사도 바울의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경험되어졌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못 박혔다’는 헬라어 ‘순에스타우로마이’라는 한 동사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십자가’라는 단어와 같은 어군의 동사입니다. 또 이것은 현재완료 시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못 박혔다’라는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지만 그 영향력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그렇게도 혈기 충천하던 사울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위대한 사랑에 대한 장을 고백하고, 감히 날마다 그분을 위해 죽노라고 고백하게 만들었던 성화의 핵심, 바로 십자가 경험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 하나님의 핏빛사랑에 감동되었고 복음이 자기를 구원했기 때문에 이 땅에 많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 같았던 영혼의 부담감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한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경험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중생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때 우리도 사도처럼 죄인임을 고백하였고 예수님만이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다는 진실한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기도가 있었고 참된 헌신이 있었으며, 자신의 전적인 무가치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뵙고,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이 은혜의 경험에서 멀어지게 되었을 때, 다시 자기 사랑에 빠졌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참회보다 교만의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전심으로 믿고 따르기보다 자신을 신뢰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궤도 이탈이 시작됩니다. 문제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순에스타우로마이’의 경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큰사랑으로 나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니 자신은 철저히 죄인일 뿐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그 앞에 자신은 할 말이 없는 자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날마다 경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지름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진실한 경험은 신앙의 초기증상이며 오래 믿으면 그 경험으로부터 멀어질 때 어떤 새로운 것이 신앙의 중심부에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연코 그것은 거짓이며 죄의 속임일 뿐입니다. 신앙의 경륜을 보자면 사도 바울은 여러분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 순간까지 그의 마음을 붙잡은 것은 목숨까지도 위협한 고난과 충성스럽고 위대한 삶의 족적이 아니라, 자기 같은 죄인을 건져내주신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Ⅲ. 최고의 감사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경험이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하다면 왜 이런 것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일까요? 답은 이것입니다. 신자가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는 모두 한 가지 죄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앞에 받은 이 구원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구원 받은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지 않을 때,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큰 사랑에 대한 감동이 더 이상 내 마음 속에 살아있지 않을 때 성도는 무슨 죄든지 지을 수 있는 준비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의 반복은 오직 두 가지로서만 발생하게 됩니다. 복음과 성령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한 줄의 명제로 요약되지만 그 의미는 복음교리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펼쳐집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깨닫게 될 때 그곳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우리는 항상 그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경험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십자가에 은혜에 대한 감격이 살아있다면 신자는 배교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고 삶도 부패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 신자의 삶은 더욱 부패하게 되고, 그 일들이 다시금 복음으로부터 신자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근심시켜 성령의 은혜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 때는 그렇게 감격했던 복음의 아름다움이 아주 하찮고 아무것도 아닌 사건으로 전락해 버리고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허덕이며 살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들과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감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더욱이 성도에게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영혼의 복과 섭리의 복입니다.
A. 두 복: 영혼과 섭리
영혼의 복은 영혼에 직접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복입니다. 이 복은 영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지각하도록 만들어줍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영혼의 기능인 지성을 통해 볼 수 있고, 마음 안에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영혼의 특별한 복은 영혼의 경향을 바꾸고, 마음의 성향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등졌던 사람들이 그분을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또 은혜가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그 큰 은혜를 빚지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이 직접 영혼에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과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심으로 주시는 은택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곰곰이 생각할 줄 아는 성도는 그곳에서 감사를 드리고, 간접적으로 그 복이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B 두 복의 관계
이 두 복은 마치 구심점과 원심력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신령한 은혜가 있을 때, 그 은혜의 영향력 아래서 변화된 그의 마음의 중심을 보신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시는 많은 증거들이 그의 내면세계뿐만 아니라 외적인 세계에도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신자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원천에 물이 꽉 차면 물길을 따라 물이 흐르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인 복이 충만하게 되면 그는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이 자기를 세워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적합한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위해서는 사랑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부어진 영혼의 복은 이 세상에 사물에 대한 복으로 흐르고 사물의 복은 더듬어 올라가면 우리의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관심을 깨닫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똑같은 환경일지라도 직접 어루만지신 큰 사랑 안에 있을 때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새롭게 보이는 것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 안에 충만한 은혜의 경험이 없을 때에는 불만과 욕망, 불평과 슬픔, 좌절과 분노 이런 것들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시고 자기를 향한 십자가에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면 감사와 기쁨 은혜와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Ⅳ. 결론: 은혜에 빚진 자로 살아감
사도바울은 상처를 받으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상처를 받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엄격한 종파를 따라 유대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지도자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잘된 것이 무엇입니까? 동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가족들과도 이별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가 교회 안에서는 항상 환영을 받는 사람이었습니까?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나은 자식들과 같은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버리고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 속에는 항상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있었으니 바로 ‘감사’와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영혼과 마음이 하나님 앞에 바뀌기 전에는 결코 정당한 감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지신 십자가로 우리의 마음을 녹여 나는 다만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무한한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도는 누구도 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사물의 질서 속에 살면서도 최고의 감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 앞에 우리가 어떠한 죄인인줄 알고 나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안 해주신 것이 없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아들을 주셨을 때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 않으시겠느냐?”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생애에 최고의 감사는 바로 나 같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도록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이라는 것을 가슴에 깊이 아로 새겨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의미에 사로 잡혀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을 위해 이 길을 걸어가며 어려움이 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데 그리스도께 그 고난의 비밀에 참여하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면서 이 길을 걷게 될 때 눈앞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감사의 제목이 될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랑의 경험 안에서 우리는 다만 그 은혜에 빚진 자들일 뿐이며 주님을 위해 일 백번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임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가 어디이든지 그 은혜의 빚진 자임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200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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