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감옥, 그리고 [죄]-1

갈라디아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99 추천 수 0 2015.08.08 23:24:54
.........
성경본문 : 갈3:2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5.4.24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감옥, 그리고 [죄]-1
갈3:27


감옥은 누가 가는 곳입니까? 그렇습니다. ‘죄’진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을 뭐라고 부릅니까? 그렇습니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 단어를 이렇게 구성하여 사회적인 가치화를 이룹니다. “죄지은 사람은 감옥에 가둬야 한다. 그래야 죄 짓지 않은 사람들을 보호 할 수 있고, 죄인들을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셀 푸코라는 이는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정신병원과 감옥을 달리 말합니다. 그는 말하길, 정신병원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곳이 아니라 이성중심적인 사회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가치기준으로 광인을 추방하고 감금하는 장소로서, 인간에 대한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억압적 수단이라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감옥도 정신병원과 같아서,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권력의 사회 통제를 위한 전략으로 필요한 기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푸코에 의하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은 ‘억압’하는 곳이 아니라 뭔가를 생산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뭘 생산 하는가 하면 바로 ‘권력’을 생산한다는 겁니다. 권력은 뭡니까? 지배하는 것입니다. 지배하는 곳에는 규율이 있고, 감시가 있고, 처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배 권력을 생산하는 항목들 즉 규율, 감시, 처벌은 개개인의 무엇으로부터 출발을 합니까? 그렇습니다. 이는 모두 ‘죄’에서 출발합니다.

이제 우리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를 옮겨야 하겠습니다. 푸코가 말하는 근대적 권력의 특성이 바로 ‘억압과 감시와 처벌’에서 나왔다고 본다면, 이걸 우리는 기독교적 담론에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도 이미 수 천 년의 역사를 통해 ‘교회권력’을 휘둘러 왔습니다. ‘휘둘렀다’는 말에는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현상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아무튼 교회의 권력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죄론]입니다. 죄에 대한 해석과 설교, 주석과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결국 교회의 권력은 ‘죄’의 담론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다시 ‘구원의 어법’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왜 ‘죄’에 대해서 물음을 가졌나요? 그것은 ‘악의 해석’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악에 눈길을 둔 이유는 기본적으로 ‘인간 존재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관한 문제 때문입니다. 악이 작동해서 생존에 위기도 생기고 나쁜 결과도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악’은 ‘인간과 신의 거리’나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고, 구원이란 바로 그 멀어진 간격을 좁히거나 없애는 것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악이라는 게 들어와서 사이가 멀어지게 했다. 그런데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둘로 갈라졌던 인간과 하나님이 다시 하나가 되는 길이 열렸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작용된다. 이처럼 둘 사이의 거리해소를 구원이라 한다.”
이상과 같은 패러다임들은 모두 죄에 관한 물음에서 출발합니다. 즉 사람이 경험하는 모든 위기 상황을 죄와 연관 지어 해석함으로써 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래되었고, 오래 갈 기독교적 담론의 본질인 [죄]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교권력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 두 시간에는 다 말씀드리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러니 빼먹지 말고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죄를 다루는 성서는 바울서신입니다. 이 말은 복음서는 죄에 대해서 어떤 담론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바울 서신중에서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을 펼쳤습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세례를 받는다는 것,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옷 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로마서에서는 구원의 때가 가까웠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라’고 하면서(13:12)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죽음으로 귀결되는(여기서 죄로 인한 죽음은 곧 ‘감옥에 갇히는 형벌’과도 같은 의미)죄의 권력에 매인 ‘이 썩을 몸’이 그리스도라는 ‘불멸의 옷’을 입고 있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도 동장을 하는데 이는 바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골3:8을 보세요.
“여러분은 모든....부끄러운 말을 벗어 버리고, 묵은 사람의 행실도 벗어버리시오. 그리고 새 사람을 입으시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옛 사람을 벗고 그리스도의 새 사람을 입다’입니다.
에4:22-24은 또 이렇습니다.
“낡은 인간성을 벗어버리고.....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으라.”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바울의 갈라디아서와 골로새, 에베소서의 차이가 있다면 바울은 종말이 임박했다는 의식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반면, 대략 갈라디아서보다 50년 뒤에 나온 골로새나 에베소서는 종말이 한정 없이 지연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적어도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인이란 ‘옷 입다’혹은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다’로 정의한다는 겁니다. 요즘은 ‘그리스도인이란 누구냐?’ 하면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정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이 ‘옷을 입고 벗다’라는 표현은 옷을 입고 벗는 당사자의 시선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시선에 속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했을 때 그건 그를 보는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규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있느냐’하는 겁니다. 누군가가 보고 있다고 판단을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입고 벗음’이라고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인을 보고 있는 관찰자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죠.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는 관찰자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내 밖에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으로 규정되는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규정에는 바울이 이해하는 ‘죄’의 이해와 연관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의 문제는 의지나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재료’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서 5:12에서 ‘죄는 인간 존재의 구성 요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보십시다.

“그러므로 나는 좋은 일을 행하기를 원하는 내게서 한 가지 법칙을 발견합니다. 바로 악이 내게 달라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내적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법에 가까이 동의하지만, 나는 내 지체 안에 또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내 이성의 법을 거슬러 싸우며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 안에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나와 더불어 죄의 법이 내 안에서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주의 신앙을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옷을 입고 있긴 해도 또 한편으로 그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주의의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동화되어 있지만, 무의식에는 유대주의의 ‘죄인-의인’논법에도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말할 때 ‘내가 싹 바뀌어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말하지 못하고 다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에게 구원이란 완전한 존재자체의 변형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3:12에서, “내가 그것을 벌써 얻은 것도 아니고 이미 완성된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당장은 옷 입음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다만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보여 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불완전한 존재는 종말의 때가 되어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존재의 완전한 변형은 종말의 대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빌3:21),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다면(롬8:9) 현재도 변형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직 몸이 분열되어 있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지만, 내가 그리스도의 영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법의 아래 있는데, 그래서 불완전한 존재인데 어떻게 내가 영적인 존재인 것을 아느냐 하면, 두 가지 법 중에서 하나의 법을 외면하고 다른 하나의 법 즉,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기 때문에, ‘아, 네가 나의 옷을 입었구나’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바울의 이런 시선,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기는 왜 생겼습니까? 그것은 그를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는 유대주의의 율법 관과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의 죄인-의인의 논법을 거부하기 위해서 ‘옷 입음’을 쓰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선교 활동의 주요 무대였던 유대 회당 체제의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당 체제의 권력 장치는 ‘율법주의’이죠. 그리하여 율법을 통한 죄-의인 논법으로 순종의 메커니즘을 작동 시키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단순한 반기가 아니라 그런 율법적인 권력의 시스템을 해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자기 자신의 무의식에 깔려 있는 유대주의와 결별할 수 있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오랜 율법의 제도적인 장치로 작동하고 있었던 ‘죄’와 ‘배제’의 교리적이고 종교적인 뿌리를 파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시간 안에서 율법적 권력의 장치인 ‘죄인-의인’를 제거 하려는 바울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유대주의의 율법 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유대주의가 어떤 권력의 장치를 갖고 있었는지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여하튼 ‘죄’는 유대주의가 깔아 놓은 종교권력을 유지하고 신앙 대중을 지배하려는 기초 장치라는 것만을 말씀 드리고, 바울은 그걸 걷어 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75 갈라디아 은혜 받은 자의 행보 갈1:18-24  류공석 목사  2016-03-11 713
174 갈라디아 가장 큰 기적 갈1:11-24  류공석 목사  2016-03-11 732
173 갈라디아 누구를 좋게 하랴? 갈1:6-10  류공석 목사  2016-03-11 640
172 갈라디아 다른 복음은 없다! 갈1:1-10  류공석 목사  2016-03-11 798
171 갈라디아 율법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성령님 갈5:16-18  강종수 목사  2016-03-06 327
170 갈라디아 문화생활의 지혜 갈5:15-18  강종수 목사  2015-11-29 251
169 갈라디아 심는대로 거둡니다(추수감사) 갈6:6-7  강승호 목사  2015-10-31 1388
168 갈라디아 구원과 복 갈3:6-9  강종수 목사  2015-10-18 367
167 갈라디아 십자가만 자랑하라 갈6:14  강승호 목사  2015-08-29 1115
166 갈라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라 갈6:14  한태완 목사  2015-08-19 1265
165 갈라디아 감옥 그리고 [죄]-3 갈3:28  허태수 목사  2015-08-08 230
» 갈라디아 감옥, 그리고 [죄]-1 갈3:27  허태수 목사  2015-08-08 299
163 갈라디아 안녕하세요? 갈6:2  정경일 형제  2015-07-24 312
162 갈라디아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 갈2:20  김남준 목사  2015-06-29 1033
161 갈라디아 성령의 열매를 맺자 갈5:16-26  한태완 목사  2015-06-08 855
160 갈라디아 성령 안에서 살게 하시려고 갈5:25  김남준 목사  2015-04-24 751
159 갈라디아 자유와 해방 갈5:1  조용기 목사  2015-04-17 347
158 갈라디아 감격의 신앙생활 갈4:15  한태완 목사  2015-02-28 1075
157 갈라디아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 갈4:4-5  허태수 목사  2015-02-14 559
156 갈라디아 십자가에 못 박은 것 갈5:24  김남준 목사  2015-02-13 806
155 갈라디아 심고 거두는 법칙 갈6:7-9  조용기 목사  2015-02-10 680
154 갈라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갈4:4-7  정용섭 목사  2015-02-03 666
153 갈라디아 누구의 종인가? 갈1:1-5  이상호 목사  2015-01-17 414
152 갈라디아 시기심과 질투 갈5:19-26  한태완 목사  2015-01-09 828
151 갈라디아 나는 누구인가? 갈5:1  조용기 목사  2015-01-08 557
150 갈라디아 개신교와 가톨릭교와의 차이 갈1:7  한태완 목사  2014-08-25 2279
149 갈라디아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한태완 목사  2014-08-12 1761
148 갈라디아 누구의 종인가? 갈1:1-5  이상호 목사  2014-07-11 847
147 갈라디아 그런 부활’은 이제 그만 갈4:9-10  허태수 목사  2014-07-08 1551
146 갈라디아 시기, 질투와 재능 갈5:19-21  한태완 목사  2014-04-28 1647
145 갈라디아 위기가 기회입니다. 갈6:9  한태완 목사  2014-04-27 1570
144 갈라디아 좋은 씨를 뿌리고 좋은 나무를 심자 갈6: 6- 9  한태완 목사  2014-04-18 1795
143 갈라디아 복음(1)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갈1:6-10  김필곤 목사  2014-03-30 1935
142 갈라디아 행복의 항아리 갈4:1-16  최장환 목사  2013-12-18 1985
141 갈라디아 기다림이 필요하다 갈1:1-17  최장환 목사  2013-11-27 2500
140 갈라디아 초지일관의 신앙과 사랑 갈3:3  한태완 목사  2013-11-19 1803
139 갈라디아 중생한 자의 갈등 갈5:17-18  강종수 목사  2013-11-03 1566
138 갈라디아 심은 대로 거두는 추수의 원칙 갈6:7-9  한태완 목사  2013-10-15 2931
137 갈라디아 옥상 갈6:7-9  한태완 목사  2013-10-03 1905
136 갈라디아 믿음의 본질 갈2:15-21  이영화 목사  2013-08-26 2085
135 갈라디아 하나님의 시간에 충실하라 갈6:7-9  강종수 목사  2013-08-18 2450
134 갈라디아 성령의 사람이 되면 갈1:8-12  강종수 목사  2013-07-21 1793
133 갈라디아 아름다운 매듭(송년주일) 갈3:3  이상호 목사  2013-07-18 2868
132 갈라디아 교회를 위한 해산의 수고 갈4:12-20  김동호 목사  2013-07-14 2231
131 갈라디아 율법과 십자가 갈2:15-21  정용섭 목사  2013-07-07 1637
130 갈라디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갈6:6-9  류공석 목사  2013-06-22 2198
129 갈라디아 사순절과 절제 갈5:22-24  이상호 목사  2013-06-12 2124
128 갈라디아 이런 사람이 되자 갈6:1-18  최장환 목사  2013-06-12 3702
127 갈라디아 성령의 지각을 받으라 갈5:16-18  강종수 목사  2013-06-09 1607
126 갈라디아 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1:1-10  정용섭 목사  2013-06-04 211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