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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임에서 살림으로!

에배소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65 추천 수 0 2024.09.30 21:2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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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2:1-1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87072 

jys.jpg설교보기 : https://youtu.be/FsKjZNgWV_o 

성경본문 : 에베소서 2:1-10 

죽임에서 살림으로!

엡2:1-10, 사순절 4주, 2024년 3월 10일

 

그리스도교를 구원 종교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세상에 구원 지향적이지 않은 종교는 없습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예술, 문학, 과학, 정치에 이르는 인간 문명 활동도 인간 구원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교를 구원 종교라는 특징으로 이름 붙이는 이유는 교회가 구원 문제를 그 어떤 종교나 인간 문명과 달리 더 직접적이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십시오.’라는 말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일까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서 서로 대답이 다르기도 할 겁니다.

 

죽임에서

 

이 문제를 오늘 설교 본문인 엡 2:1-10절은 가장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1절과 5절에 보듯이 하나님께서 죄로 죽었던 사람들을 살리셨다고 말입니다. ‘죽임에서 살림으로!’라는 표현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의 요체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게 도대체 뭐지, 그리고 살리셨다는 뭐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죽었다고 해서 당장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살았다고 해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로 번역된 그리스어 παρ?πτωμα는 그리스어-영어 사전에 sin, wrong-doing으로 나오고, 죄로 번역된 그리스어 ?μαρτ?α는 sin으로 나옵니다. 파라프토마는 행위로 나타난 죄라 한다면 하마르티아는 존재론적인 차원의 죄인데, 둘 다 죄라고 해도 됩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본문은 2절부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우선 이 편지글의 수신자들이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짚어야 합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튀르키예 중서부 항구 도시입니다. 지금이야 튀르키예에서 이스탄불이 가장 크고 유명한 도시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에는 에베소야말로 로마나 알렉산드리아 못지않게 잘 나가는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그리스-로마의 대단한 유적지가 그곳에 남아있습니다. 에베소에서 주류로 자리를 잡으면 세계 일등 시민이 되는 겁니다. 본문 2절은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본래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는 오늘 말로 그 시대를 이끌어가는 정신, 즉 ‘시대정신’입니다. 좋은 거죠. 오늘날 미국의 뉴욕처럼 에베소가 추구하는 로마의 시대정신에 발을 맞춰서 살아야만 성공한 인생이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삶을 죄로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3절에서 이런 사태를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

 

‘육체의 욕심’이라는 표현은 매우 부도덕한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 역시 여기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보다 재산이 더 많고 더 많은 인기를 얻고 더 넓고 쾌적한 집에서 살고 더 많이 먹고 마시며, 인생을 더 많이 누리는 것 말입니다. 그걸 누가 나쁘다고 말하겠습니까. 요즘도 우리는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이어지는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즐겨라.’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을 의미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추구하던 로마의 시대정신이 바로 육체와 마음의 욕망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들은 몰염치하거나 몰상식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하고 독서도 하고 나름으로 교양도 풍부합니다. 그런데 삶의 전체 방향은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에 쏠려있습니다. 세상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성취하려는 욕망에 기울어졌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일갈합니다. 바울의 이런 말을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들으면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각자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 상층부에 올라가서 윤택하게 게 왜 문제냐 하고 말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을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인정하겠습니까? 바울은 왜 이런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서 에베소의 시대정신을 매도하는 건가요? 그에게는 세상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걸까요? 잘 나가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운 걸까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에서 ‘본질상’은 그리스어 φ?σει(퓌세이)의 번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by nature(자연에 의해서)로 번역했습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에 따라서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은 자연적입니다. 사람은 저절로(by nature)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웬만해서는 그걸 거슬려서 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대학의 정년 보장 교수와 시간 강사가 있다고 합시다. 시간 강사의 처우는 열악합니다. 처우를 끌어올리려면 정년 보장 교수의 연봉을 줄여야 합니다. 정년 보장 교수들은 연봉을 10% 줄여도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나 그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렇게 육체와 마음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켜서 바울은 진노의 자녀라고, 즉 인생이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겁니다. 바울의 이런 진단이 옳은가요?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육체와 마음의 본성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식욕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예수께서는 골방에 틀어박혀서 기도하고 성경만 읽은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면서 지내셨습니다. 성적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육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식욕과 성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서 어긋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육체적 욕망을 삶의 절대적인 목표로 삼아 다른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입니다. 성폭행 등등이 하나의 예입니다. 물질적인 욕심으로 사람을 도구화하는 것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개인도 망가지고 사회도 망가집니다. 진노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인간 세상이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니까 인생이 즐겁고 행복하더라, 요즘처럼 누릴 게 많은 시절에 진노는 무슨 진노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습니다. 에베소의 시대정신에 빠진 사람들을 바울도 설득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대정신에 푹 빠지면 다른 말이 들어오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본주의 체제 깊숙이 떨어져서 돈에 인생을 거는 사람에게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거나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예수님 말씀을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한두 사람이 정신적으로 병들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바울 당시 에베소의 시대정신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 전체가 병든 겁니다. 그걸 가리켜서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에 송곳이나 불이 닿아도 깨닫지 못하듯이 영혼이 죽으면 영혼의 병 증상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살림으로!

 

바울은 1절에 이어서 5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의 시대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전에는 철저하게 로마 정신과 가치에 따라서, 즉 자기를 성취하는 데만 몰두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니까 죽임에서 살림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던 사람이 선글라스를 벗으니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에베소의 시대정신이 가리키는 삶과 다른 새로운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 겁니다. 이를 가리켜서 바울은 죽었던 우리가 살아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6절에서 부연해서 설명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

 

우리말 <개역개정>은 그리스어 성경의 의미를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리스어 성경과 KJV과 루터 성경을 종합해서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늘의 영역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앉히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늘의 영역’이라는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하늘의 영역은 에베소라는 땅의 영역과 대립합니다. 에베소의 영역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자기를 중심에 두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게 하는 곳이지만, 하늘의 영역은 자기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나누는 방식으로 살게 하는 곳입니다. 그 하늘의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열린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일상적인 비유를 한 가지 들면 이렇습니다. 테니스 동호회 모임에서 게임을 할 때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에만 집중합니다. 상대방을 실력으로 제압하려고 합니다. 승패에 일희일비합니다. 어떤 사람은 테니스라는 운동 자체에 집중합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면서 구장에서 뛰고, 라켓과 공이 만나는 그 순간의 느낌에 집중합니다. 자기의 실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테니스 운동과 친교에만 마음을 둡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이제 로마 문명을 대표하는 에베소의 질서가 아니라,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옮겨졌습니다. 이게 바로 죽임에서 살림으로 운명이 달라진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인 실존입니다.

 

잘 들으십시오. 에베소의 질서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 옮겨졌다는 것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덕스럽고 교양 있게 행동하는 것 정도의 변화로 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교양 있게 행동하려고 해도 잠시는 모르나 오래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아실 겁니다. 무늬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교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변화만이 우리를 참된 의미에서 새롭게 하고 우리를 살립니다. 이런 존재의 변화를 가리켜서 8절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죽임에서 살림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삶의 겉모양인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데서 온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반복해서 믿으라거나 은혜를 받으라고 강조합니다. 믿음과 은혜라는 말이 현실에서 별로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제가 종종 예로 들지만, 시인들은 자기가 시를 쓴다고 말하지 않고 시가 자기에게 온다고 말합니다. 작곡자들도 그렇고 화가도 그렇습니다. 궁극적인 세계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 뭔가를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벤처 기업가가 기발한 아이템으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합시다. 그가 다른 기업가보다 뛰어난 점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주변 환경이 그걸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국제 경제 흐름이나 국내외 정세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실은 교회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삶의 깊이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의 성공을 선물로 여길 겁니다.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하는 은혜입니다. 선물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서로 베풀고 나누려고 하겠지요. 믿음과 은혜를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냥 자기가 잘났다는 사실에 도취할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습니다. 죽임에서 살림으로 나아온 사람은 그 사실이 너무 은혜롭고 감사하고, 소중하면서 각별하게 느껴져서 평생 수행하듯이 겸손하면서도 치열하게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붙들고 삽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서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라고 경고했습니다. 잘난척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를 실존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빌 2:12절에서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권면했습니다. 빌 3:12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14절에서도 반복해서 ‘달려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달려가는 일이 귀찮거나 지루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교회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교회 생활을 아예 포기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죽임에서 살림으로!’입니다. 그게 어느 정도는 설명되었을 겁니다. 그런데요. 정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남았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 죽임의 길과 살림의 길이 눈에 띄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 죽는 길일 수 있고, 죽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는 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 있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힘듭니다. 아니 신앙생활 이전에 우리의 인생 자체가 혼란스러워집니다. 자기가 인생 성공을 위해서 불철주야 애를 써서 뭔가를 이루기는 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볼 때 불행한 인생처럼 보이던 사람의 인생이 사실은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유튜브로 어릴 때 시각장애와 청각장애를 동시에 앓게 된 여자분에 관한 다큐를 보았습니다. 싱가포르 사람인 그녀는 설거지와 식사 준비에도 완벽하게 집중해야만 했습니다. 정원에서 그녀는 꽃 한 송이를 손의 촉감으로 느끼고 있더군요. 그녀는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생명 깊이를 경험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가장 불행한 조건에 놓였던 사람이 우리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행복한 사람으로 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삶 자체에 얼마나 집중하나요? 그 신비에 얼마나 놀라워하나요?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망상이 가득하여 어느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예배도 집중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집중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 그게 죄로 죽은 것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한 번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고 그만큼 위태롭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 경고했듯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면서 인생을 대충 보낼지 모릅니다. 폭식증 환자처럼 먹어 치우는 쾌락만으로 인생을 보내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친교에 집중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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