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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

에배소서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5 추천 수 0 2024.12.07 18: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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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엡3:14-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109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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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기 : https://youtu.be/u4meF_Mn47A 
성경본문 : 에베소서 3:14-21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
엡3:14-21, 성령강림후 10주, 2024년 7월 28일
 
서양 철학의 발생지는 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한 그리스의 아테네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만물의 본질이 물이라고 주장한 탈레스와 그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 등등이 활동한 소아시아의 밀레투스입니다. 밀레투스 학파가 아테네 학파보다 역사적으로 1백 년이나 더 앞섭니다. 지금은 아테네와 밀레투스가 각각 다른 나라에 속하나 고대에는 모두 그리스 문명권에 속한 폴리스(도시국가)였습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 사이의 바다가 에게해입니다. 에게해를 배경으로 그리스 신화가 전개됩니다. 바울은 당시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오가면서 복음을 전했기에 당연히 배를 타고 에게해를 수없이 여행했을 겁니다.
 
3차 선교여행을 보도하는 행 20장의 설명을 따르면 바울은 그리스 북쪽 지역인 마게도냐에 갔다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소아시아의 드로아로 왔다가 다시 배를 타고 밀레투스에 이릅니다. 밀레투스는 우리말 성경 번역으로 밀레도입니다. “거기서 떠나 이튿날 기오 앞에 오고 그 이튿날 사모에 들르고 또 그 다음 날 밀레도에 이르니라.”(행 20:15) 밀레도에서 바울은 사람을 시켜서 에베소에 있는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릅니다. 드로아에서 밑으로 내려올 때 에베소에 먼저 들릴 수도 있었으나 항해 일정상 어쩔 수 없이 에베소를 지나쳤기에 밀레도로 부른 겁니다.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제가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았습니다. ‘에페수스 박물관’에서 ‘밀레투스 박물관’까지 입력하니까 79㎞가 나오고 자동차로 1시간 4분 걸립니다. 건강한 사람이 빨리 걸으면 이틀 정도 걸렸겠지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은 유언처럼 들리는 말을 이렇게 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울었습니다. 장로 일행은 바울이 배를 타는 데까지 전송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러 교회 중에서 에베소 교회만큼 바울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교회는 없습니다. 몇 년 세월이 흐른 뒤 감옥에 갇힌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읽은 에베소서입니다.
 
당시 바울에게는 교회에 대한 걱정이 많았습니다. 영지주의가 점점 더 큰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유대 그리스도교와 이방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물론 이방 교회입니다. 정통 유대교 신학자였다가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자리를 잡은 바울로서는 유대교와 척지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본질을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정확하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작업이 간단한 게 아닙니다. 만약 당시에 바울이 이런 관계 설정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는 다른 모습으로 진행되었을 겁니다. 이후 교회 역사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구약 성경 39권은 유대교의 성경입니다. 그걸 교회가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던 유대교와의 관계를 단절하려고 했다면 구약은 받아들이지 말아야만 했습니다. 초기 교회는 구약에만 머물지 않고 신약 27권을 정경(canon)으로 정했습니다. 이런 교회의 태도를 거부하는 신학자들이 당시 교회 안에 없지 않았으나 교회는 그런 반대 목소리를 뚫고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는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풍성한 영적 자산을 확보한 종교로 성장했습니다. 거기서 바울의 역할이 아주 컸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유대교와 척지지 않으면서도 복음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인 ‘그리스도의 사랑과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이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실현되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8절과 19절은 14절부터 이어지는 전체 기도문에 속합니다. 에베소 교회 신자들을 위해서 바울이 바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γ?πη το? Χριστο?)을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베소 교인들이 ‘하나님의 충만하심’(πλ?ρωμα το? Θεο?)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교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유대교와 구별되는 복음의 특성이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우리가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경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가 흔들리면 교회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너무 뻔한 설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바울의 예수 경험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우리도 하나님 경험의 새로운 차원으로, 즉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18절에서(그리스어 성경을 비롯한 루터 성경과 우리말 <새번역> 성경, 등등에서는 19절에 나오는 내용)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바란다.’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에서 ‘지식’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γν?σι?(그노시스)입니다. <새번역>은 조금 더 분명하게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번역했고, <루터 성경>은 ‘모든 인식(Erkenntnis)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인류 문명은 그노시스, 즉 앎과 인식과 지식에 기반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지중해 문명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앎과 지식을 치열하게 추구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연의 이치를 알고 싶어 했기에 자연과학이 발전한 겁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학문을 일러 philosophy, 즉 지혜(소피아) 사랑(필로스)이라고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동양 사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가 앎과 지식을 소홀하게 여겼다면 지금의 문명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런 앎과 지식과 인식을 초월한다고 외칩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앎과 지식이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특히 자연과학이 현대인의 일상과 사유를 압도합니다. 스마트폰은 ‘그노시스’의 총아입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 모든 정보를 얻고 재미도 얻으며 삶의 활력까지 얻습니다. 나쁜 영향도 받습니다. 거짓 정보와 거짓 뉴스가 불특정 다수에게 유포됩니다. 이미 오염된 정보가 재생산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가상을 오히려 현실로 여기는 현대인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줄 유토피아를 꿈꾸거나, 인공지능이 인간을 노예처럼 지배하게 될 디스토피아를 내다보기도 합니다. 이런 앎과 지식과 인식이 바울 시대보다 훨씬 강력한 힘으로 작동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식과 정보를 초월한다고 외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의 외침이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과대망상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아닐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사람의 앎과 지식을 초월한다는 말이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바울은 19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서 말하면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으라고 했습니다.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표현은 당시 일반 지식인들도 사용한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시원적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우물 안에서 사는 개구리가 우물 밖의 세계를 다 인식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에 관해서(고후 4:6)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곧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가리키는 생명의 아득하고 시원적인 차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만 가능한 인간 구원이 현실로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생각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뒤로 이어지는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 고후 5:13절에서 그는 비장한 어투로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메시지가 세상의 앎과 지식에만 마음을 둔 사람들에게는 미친 소리처럼 들려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이어서 고후 5:14-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γ?πη το? Χριστο?)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라는 명제가 그리스도교의 초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설명이 현대인들에게는 못마땅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현대인은 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하나이고,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대신 지느냐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죄를 단순히 도덕적인 잘못이라고 보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깊이에서 발생한 인격의 왜곡으로 봅니다. 따라서 죄는 실정법이나 도덕법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양심으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죄는 죽어야만 끝납니다. 죽지 않는 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고 싶어 하던 아담과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손 중에서 죄에 기울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착하게는 살 수 있고, 실정법의 제재를 피할 수는 있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죄를 교만, 자기 사랑, 자기 집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지식이 있거나 없든지, 돈이 많든 없든지, 우리는 교만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아에만 집중하며 자기 연민에 종종 떨어집니다. 죽어야만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살아야 합니다. 죄의 지배를 계속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구원의 길로 생각했습니다. 바울도 율법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에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더 불안했습니다.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실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인간이 어떻게 죄라는 실존에서 벗어나서 의로워질 수 있는지를 놓고 몸부림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과 로마법에 따라서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이제는 율법이 무의미하고, 로마법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율법과 로마법, 그러니까 앎과 지식이 풍부해야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그럴듯하게 삽니다. 돈도 벌고 명예도 얻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이후로 율법과 로마법이 제시하는 삶에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았습니다. 쉽게 표현해서 권력을 손에 넣거나 부자가 된다고 해서, 그리고 온갖 자격증을 따서 출세하고 상류층 인사로 살아도 행복이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만 정확하게 뚫어본다면 우리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겁니다.
 
바울은 이제 삶을 완전히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고(고후 5:15b)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산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발생한 하나님의 구원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가 아니라, 즉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을 완성해야겠다는 강렬한 욕망과 자기연민과 자기사랑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율법과 로마법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무효로 만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삶의 중심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실제로 가능한 말인가요? 여러분은 설득이 되고 동의가 됩니까?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은 여전히 모호하고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지는 않나요?
 
지금까지 저는 바울이 경험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설교 제목의 두 번째 주제인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다시 말하려면 또 한편의 설교가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곧 하나님의 충만하심이기에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졌기에 더는 돈으로 충만해지기를,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한 조건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았기에 더는 세상에서 우쭐하는 기분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 없고, 우정과 명예도 필요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에서 해방되었으니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와 함께 이미 다시 살아났으니 다른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보충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겁니다. 그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세상살이는 설교 내용처럼 돌아가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호소하고 싶은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이뤄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눈을 뜨면서 잠들기 전까지 세상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라고, 자기의 삶을 끌어올리라고 유혹하고 겁을 줍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대로, 늙은 사람은 늙은 사람대로 온 세상을 다 손안에 넣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삽니다. 더 늙기 전에 인생을 즐겨야지, 하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충만하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오해는 마십시오. 출가 수도승처럼 일상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된다고, 우리 인생에서 앎과 지식은 아무 소용없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일상을 어떻게 사는지는 여러분의 형편에 따라서 선택하면 됩니다. 중요한 사실은 다음입니다.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충만하심(플레로마)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입니다. 이로 인해서 삶이 충만해진 사람들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궁핍한 사람처럼 세상을 부러워하면 되겠습니까. 바울처럼 저도 여러분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든 앎과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의 삶이 충만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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