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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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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동호 목사 |
참고 : | 높은뜻숭의교회 |
2004-05-23 무엇보다 귀한 자녀(4)
엡 6:4, 삼상 17: 45-49.
우리는 요즘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텍스트로 삼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과연 무엇을 기도해야만 하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자녀를 위하여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빼놓지 않고 기도해야만 할 중요한 제목 중의 하나는 ‘용기’입니다. 우리도 맥아더 장군과 같이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용기’를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가지 예수를 믿으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앙은 참 능동적이고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 그리고 욕심 없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이 나약한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강함 보다 강한 강함이지 절대로 나약함이 아닙니다.
니이체가 기독교를 오해하여 나약한 것을 숭상하는 종교라고 비판을 하고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하나님을 자기가 죽였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리고 요즘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그와 같은 니이체를 이야기를 하며 기독교를 폄하하고 잘난 척하고 있지만 저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주 능동적이며 다이나믹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 속에서 강한 운동력과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느낄 수 있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마 11:12) 속에서도 우리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정신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나약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마귀를 만나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타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피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적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마귀도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피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약4:7)
성경은 인생을 전투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누려야 할 천국의 세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죄악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가 세상과 죄에 오염되어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과 세상의 죄와 싸우는 전투정신과 전투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삶은 전투입니다. 부인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전쟁에 내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할 수 있는 대로 감싸주고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식을 망치는 일입니다. 자식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전쟁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안쓰럽더라도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절대로 나약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온실에서 편안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물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불 속에도 집어넣으십니다. 환난도 격께 하시고 불경기도 격께 하십니다. 훈련도 장난이 아니어서 훈련을 받다가 꼭 죽을 것만 같고,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잊으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만큼 힘들고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에 보면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인정도 사정도 없어 보이는 유격조교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질 하여 키우십니다. 절대로 오냐오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시지만 게을러서 자기의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서 가난해 진자까지 보호해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를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꾸짖으시며 그 있는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그리고 그를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시는 아주 무서운 분이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말씀하시는 아주 강하고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가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니이체와 요즘 김용옥이라는 사람은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용기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다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떠날 때는 갈 바도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어느 누구 보다도 개척정신이 뛰어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와 친척과 같은 빽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취직을 하고 직장에서 승진을 하려고 할 때에도 학연과 지연을 동원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와 같은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실력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였던 파이어니어였습니다. 그는 강한 자였고 용기 있는 자였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14장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다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만 저도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피가 끓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씀인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축복도 앉아서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힘들고 두려워서 좀처럼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던 산지,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용사라고 불리우던 아낙 자손들이 있는 그 성을 그것도 85세라는 나이에 도전하였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약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 순종과 겸손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저들을 노예처럼 쉽게 부리려고 하였던 당시의 크리스천 기득권층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었지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엉터리로 잘 못 믿는 사람을 기독교로 보고 예수 잘 못 믿는 것을 비판하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비판했던 니이체는 머리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자기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큰 소리쳤던 니이체는 정신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도 자신이 천재인줄로 스스로 착각하고 떠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미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는 다윗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칼도 들 수 없고, 갑옷도 무거워서 입을 수 없었던 어린 소년 때에 장수들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골리앗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직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무너트렸습니다. 아무리 반복하여 읽어도 여전히 신이 나고 재미있는 말씀 중에 하나는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아멘 (삼상 17:32-52)
이 외에도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신앙의 용장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왕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의 지조를 꺽지 않았던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 외치며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등등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 모두가 다 용기 있는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우리는 이 용기를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험한 세상과 싸워야 하는 자녀들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무작정 보호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차라리 골리앗에게 항복을 하고 골리앗의 종과 노예로 살아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윗만 하고 세상은 골리앗만 하지만 언제나 도망가지 말고, 항복하지 말고 정면으로 도전하고 돌파하라고 가르쳐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이유는 우리의 용기에 있습니다. 용기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용기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과 비겁함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다윗과 아브라함과 갈렙과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에스더의 용기는 모두 믿음에서 왔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세상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며 싸우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기 자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시는 것처럼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게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기 있게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용기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윗처럼 싸우라고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과 사랑은 자녀가 진정한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엡 6:4, 삼상 17: 45-49.
우리는 요즘 맥아더 장군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을 텍스트로 삼아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과연 무엇을 기도해야만 하는가를 함께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주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자녀를 위하여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자신과 자녀를 위하여 빼놓지 않고 기도해야만 할 중요한 제목 중의 하나는 ‘용기’입니다. 우리도 맥아더 장군과 같이 자신과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용기’를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가지 예수를 믿으면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기독교 신앙은 참 능동적이고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겸손 그리고 욕심 없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잘못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이 나약한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강함 보다 강한 강함이지 절대로 나약함이 아닙니다.
니이체가 기독교를 오해하여 나약한 것을 숭상하는 종교라고 비판을 하고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하나님을 자기가 죽였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그리고 요즘 김용옥이라는 사람이 그와 같은 니이체를 이야기를 하며 기독교를 폄하하고 잘난 척하고 있지만 저들은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아주 능동적이며 다이나믹 합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 속에서 강한 운동력과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느낄 수 있고,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마 11:12) 속에서도 우리는 그와 같은 기독교의 정신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귀를 대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나약한 인간인 우리들에게 마귀를 만나도 항복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타협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피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대적하여 정면으로 공격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마귀도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피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약4:7)
성경은 인생을 전투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누려야 할 천국의 세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죄악의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녀가 세상과 죄에 오염되어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삶을 살게 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마귀를 대적하고 세상과 세상의 죄와 싸우는 전투정신과 전투기술을 가르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삶은 전투입니다. 부인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전쟁에 내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할 수 있는 대로 감싸주고 보호해 주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식을 망치는 일입니다. 자식을 죽이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전쟁을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말 자식을 사랑한다면 안쓰럽더라도 자식을 강하게 키워야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절대로 나약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온실에서 편안하게 키우지 않으십니다. 물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불 속에도 집어넣으십니다. 환난도 격께 하시고 불경기도 격께 하십니다. 훈련도 장난이 아니어서 훈련을 받다가 꼭 죽을 것만 같고,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고 잊으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만큼 힘들고 어렵습니다.
예레미야 12장 5절에 보면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 하겠느냐’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읽다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인정도 사정도 없어 보이는 유격조교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채찍질 하여 키우십니다. 절대로 오냐오냐하며 응석받이로 키우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시지만 게을러서 자기의 달란트를 땅에 파묻어서 가난해 진자까지 보호해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를 악하고 게으른 자라고 꾸짖으시며 그 있는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그리고 그를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시는 아주 무서운 분이십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고 말씀하시는 아주 강하고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가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니이체와 요즘 김용옥이라는 사람은 정말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용기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다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떠날 때는 갈 바도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어느 누구 보다도 개척정신이 뛰어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향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와 친척과 같은 빽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업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취직을 하고 직장에서 승진을 하려고 할 때에도 학연과 지연을 동원하고 할 수만 있으면 그와 같은 것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실력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였던 파이어니어였습니다. 그는 강한 자였고 용기 있는 자였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 14장에서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나 다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만 저도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피가 끓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말씀인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 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축복도 앉아서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힘들고 두려워서 좀처럼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던 산지, 크고 견고한 성읍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용사라고 불리우던 아낙 자손들이 있는 그 성을 그것도 85세라는 나이에 도전하였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약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잘 못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 순종과 겸손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고 저들을 노예처럼 쉽게 부리려고 하였던 당시의 크리스천 기득권층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었지 진실한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엉터리로 잘 못 믿는 사람을 기독교로 보고 예수 잘 못 믿는 것을 비판하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비판했던 니이체는 머리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나약하게 한다고 자기가 하나님을 죽였다고 큰 소리쳤던 니이체는 정신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도 자신이 천재인줄로 스스로 착각하고 떠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미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이 이야기하는 기독교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을 받는 다윗도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칼도 들 수 없고, 갑옷도 무거워서 입을 수 없었던 어린 소년 때에 장수들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골리앗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직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무너트렸습니다. 아무리 반복하여 읽어도 여전히 신이 나고 재미있는 말씀 중에 하나는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 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지르며 블레셋 사람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의 상한 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아멘 (삼상 17:32-52)
이 외에도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신앙의 용장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왕 앞에서도 자신의 신앙의 지조를 꺽지 않았던 다니엘과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걸고 죽으면 죽으리라 외치며 왕 앞에 나아갔던 에스더 등등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 모두가 다 용기 있는 강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우리는 이 용기를 가르쳐 주어야만 합니다. 험한 세상과 싸워야 하는 자녀들이 안쓰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들을 무작정 보호만 할 수는 없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것은 너무 위험하니 차라리 골리앗에게 항복을 하고 골리앗의 종과 노예로 살아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이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다윗만 하고 세상은 골리앗만 하지만 언제나 도망가지 말고, 항복하지 말고 정면으로 도전하고 돌파하라고 가르쳐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이유는 우리의 용기에 있습니다. 용기의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용기는 믿음으로부터 옵니다. 두려움과 비겁함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다윗과 아브라함과 갈렙과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에스더의 용기는 모두 믿음에서 왔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의한 세상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대적하며 싸우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기 자녀를 위하여 기도할 때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우리를 키우시는 것처럼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게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기 있게 키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용기를 가르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과 같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다윗처럼 싸우라고 가르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과 사랑은 자녀가 진정한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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