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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5:2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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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민영진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
에베소서 5장 21절부터 6장9절까지는 아내와 남편(5:21-233), 자녀와 부모(6:1-4), 종과 주인(6:5-9) 등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20세기 전인 기원 후 1세기의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오랜 인류역사에서 기원 후 20세기를 벗어나 21세기의 문턱으로 들어서려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센추리" 곧 백년 단위로 세어보면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이지만, 밀레니엄 곧 천년단위로 계산하면 우리는 이제 곧 기원 후 세번째 천년기인 "써드 밀레니엄"에 진입합니다. 오늘 우리는 "훨스트 밀레니엄"의 독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써드 밀레니엄"에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가족윤리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말씀드리기보다는 우리의 본문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확한 것인지의 여부를 반성해 보면서 성서의 메시지 속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특히 오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시고, 세례를 받고, 이제 "빛의 자녀"가 되시는 분들에게 오늘의 말씀 증언이, 성서가 말하는 새로운 생활 규범이 어떠한 것인지를 증언하는 적절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는 에베소서가 아내와 남편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여러분에게도 익숙한 내용일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에베소서의 부부간의 윤리가,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관계의 위상이 뚜렷합니다. 순종은 낮은 쪽과 관련되어 있고, 사랑은 높은 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증언하려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생각이 우리의 본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에게 싫든 좋든, 여러분 스스로가 이 사실을 우리의 본문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말하는 본문의 첫 절인 5장 21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따로 따로 권면하기에 앞서서,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함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서로 순종하는 것이지, 아내는 순종하고 남편은 사랑하고 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5장 21절에서 33절까지의 아내와 남편의 관계 단락을 보면 시작이 21절로서 서로 순종하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이 말은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함께 주어지는 시작의 말입니다. 그 전 단락인 '빛의 자녀의 생활'(5:6-20)에 대한 결론의 말씀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5:21-33)에게 주는 권면의 서론입니다.
또 하나, 22절에 있는 말씀, "아내이신 여러분, 주님께 순종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번역된 이 본문 번역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권위를 인정받는 그리스어 고대 사본에는 본문이 마치 '전보문' 혹은 텔렉스의 전문처럼, "아내들은 주님께 하듯 자기 남편에게"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여기 아내들에게 말할 때, 바울 사도께서 여성들에게 '순종하라'는 용어의 사용을 스스로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번역판들마다 '복종하라'든지 '순종하라'는 등의 단어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신빙성 있는 그리스어 원문의 반영은 아닙니다.
신약 원문 성서 사본에 따르면, 부부관계는 '서로' 예속되는 관계이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일방적으로 예속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예속마저도 강제나 폭력에 의한 예속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이루어지는 예속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경외하여', '그리스도를 모시는 심정으로' 아내와 남편이 서로가 서로에게 예속되는 것입니다. 이 때 서로를 서로에게 예속시키는 매체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서로 예속되는 것이지, 힘으로 예속하고 예속되고 하는 것은 부부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녀와 부모에게 주는 에베소서의 권면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여기 앉아 계신 자녀가 되신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들어 왔고, 지금도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자녀이신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제 부모를 공경하여라'한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계명입니다. '네가 잘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한 약속입니다"(엡 6:1-3).
여기서 '복종하라'고 하는 말은 말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하는 것은 부모를 존경하고 높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본문 이해에 별 어려움이 없는데, 그런데 "주 안에서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에 여기, '주 안에서'라는 말은 좀 막연하게 복종의 조건을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종의 조건이라기보다는 복종의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면 복종하고, 일치하지 않으면 복종하지 말라는 '조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여러 주석이나 최근의 번역들이 보여주듯이, '주님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신도라면', '주님을 생각해서라도' 등으로 이해하여야 할 말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살지 아니하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복종을 하지 아니할 수도 있지만, 주를 믿는 신도들이라면,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신도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 안에서'라는 말은 부모님의 뜻이나 요구의 내용이 주님의 뜻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저울질 해보라는 말이 아니고, 부모님께 복종하여야 할 자녀들에게 복종의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이신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은 믿는 이들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모시고 계신 자녀 되신 여러분, '주 안에서'라는 말은 여러분의 부모를 얽어매는 말이 아니라, 자녀이신 여러분을 얽어매는 말입니다.
이제, 저는 부모된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은, 부모에게 복종하라는 성서의 이 권면을 저항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면이, 자녀된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 됩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부모의 가치관을 강요할 때에, 자식들은 그 가치 혹은 그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려하지 아니합니다.
부모가 되신 여러분, 자식들만 부모에게 복종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된 우리 자신들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는 성서의 권면(엡6:4)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훈계'로 가르치기보다는 '나의 훈계', '내가 받아왔고, 내가 배워온 훈계, 그래서 나의 이념이 되어 버린 그러한 옛 가치관'으로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새 세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한 우리의 자식들은 부모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합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분노가 생깁니다. 그런데, 성서의 말씀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우리의 자식들을 노하게 만듭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고집과 생각을 자식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식들을 더욱더 화가 나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젊은 세대를 교육시켜야 하는데, 부모들은 자신들의 가치관과 이념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니까 자식들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할 때에, '주 안에서'가 자식들을 얽어매는 말이라면, "또 아버지이신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라고 할 때, 새로운 세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주님의 훈련'과 '주님의 훈계'라는 말은 우리 부모된 이들을 얽어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모가 되신 여러분들께서는 우리가 받은 훈련과 훈계가 주님의 것과 다르다는 말이냐고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제가 비록 우리가 받아 온 훈련과 훈계가 주님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세대'가 받은 '주님의 훈련'이요 '주님의 훈계'이지 '새 세대'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훈련과 훈계는 말씀처럼 살아 있는 것이지 죽은 율법문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기 예수를 그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성전으로 데리고 가셨을 때에 시므온이 아기에게 축복한 다음에,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도록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을 받는 표징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꿰뚫을 것입니다..."(누가 2:34). 이 말은 부모와 자식간의 긴장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우리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방을 받고 죄인으로 처형 받으심으로써, 인간적으로는 어머니의 기대를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어머니를 흐뭇하게 기쁘게 해 드린 효자가 아니고, 가슴을 비수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어머니에게 안긴 불효자였습니다.
자식들이 부모의 말에 "아니오"라고 할 때에, 부모된 여러분께서는, 그처럼 대견스럽게 말하는 자식에게서 성장의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자식이 부모에게 "아니오"라고 할 때에, 그 자식은 이제 저 혼자 서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런 자식을 격려할 수 있습니까? 다 큰 자식은 우리의 품을 떠나야 합니다.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그 때부터 부모된 우리들은 그 자식의 미숙을 걱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 6장 5절 이하 9절에는 종과 주인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남의 종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의를 다하여 자기의 주인에게 복종하고, 주인된 사람들도 자기의 종들에게 같은 정신, 곧 그리스도를 대하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종들을 대하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문은 종과 주인이라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자와 사용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이 의도하는 바는, 진짜 주인, 진짜 사용자는 하늘에 계시며, 그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노동자든 사용자든, 차별 없이 대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주인의 올바른 관계를 말하는 에베소서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살이의 세 국면을 봅니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부관계에서 보듯이, 사람은 남녀가 어우러져 사는 성적인 존재입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부부관계입니다. 둘째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보듯이, 사람은 역사적 존재입니다.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고, 그 자녀는 또 성장하여 부모가 되고, 그리고 또 자녀를 낳고... 자녀는 부모를 통하여 과거와 연결이 되고, 자신의 삶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 그는 또 자기가 낳은 자녀를 통하여 미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역사적인 존재입니다. 부모에게서 나지만,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고, 자녀를 낳지만 자녀의 삶을 부모의 뜻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의 결정에 복종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셋째로, 노사관계에서 보듯이, 사람은 생산하고 소비하는 경제적인 존재입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고찰하면, 사람이란 수입과 지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경제적 존재입니다. 수입이 제한되어 있고 소비 의욕이 증대될 때 가족 구성원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일반적으로 수입을 담당하는 소수보다는 수입이 적거나 수입이 전혀 없는 구성원이 더 많은 지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입과 지출을 균형 있게 하려면, 그리고 지출의 우선 순위를 결정함에 있어서 가족 구성원 사이에 합의를 이룩해 내려면, 구성원 사이에 사랑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삶의 세분야 곧 성적인 삶, 역사적인 삶, 경제적인 삶 속에는 각각 쌍을 이루는 두 요소들이 있습니다. 성적인 삶 속에는 남성과 여성이 있고, 역사적인 삶 속에는 부모와 자녀가 있고, 경제적인 삶 속에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쌍의 관계들이 늘 위험합니다. 둘 사이에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이 생길 위험, 둘 사이의 관계가 천박하여질 위험, 둘 사이의 관계가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일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두 쌍의 관계를 올바로 잡아 주는 공통의 요소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에베소서는 삶의 세 분야, 그리고 그 세 분야의 여섯 주역들에게 '그리스도'를 늘 상기시킵니다. 아내들에게는 남편 대할 때에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하고, 남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시듯 아내들에게 하라고 하고, 자녀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하고, 부모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훈련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하고, 종들에게는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인을 대하라고 하고, 주인들에게도, '그리스도'대하듯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종들을 대하라고 합니다.
삶의 세 분야, 여섯 주역들에게, '주 그리스도'는 화해자가 되시고, 갈등해소자가 되십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두 당사자가 갈등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두 당사자가 자신들의 이기적인 탐욕을 버리고 '그리스도에게서' '화해'의 가능성을 찾을 때에, 서로 복종하게 되고, 평화를 이룩하게 되고, 즐거운 삶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약속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에서 듣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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